죽음보다 강한 사랑 손양원(孫良源) 목사
호 산돌. 경남 함안(咸安) 출생. 1910년 아버지와 함께 그리스도교에 입교, 1917년 선교사 맹호은(孟晧恩)에게 세례를 받았다. 1923년 일본 스가모중학교[巢鴨中學校]를 졸업하고 귀국하여, 1929년 경남성경학교(慶南聖經學校)를 졸업, 1934년까지 밀양·울산·부산 등지의 교회에서 전도사로 일하였다. 다시 신학을 지망, 1938년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여수의 나병환자들의 수용소인 애양원(愛養園) 교회에 부임하여 나환자들에 대한 구호사업과 전도활동을 시작하였다.
일제강점하인 1940년신사참배(神社參拜)를 거부하다가 여수경찰서에 구금되었는데, 8·15광복으로 출옥, 1946년에 목사가 되었다. 다시 애양원 교회를 지원하여 시무하던 중 1948년 영수 순천사건으로 동인(東印)·동신(東信) 두 아들을 폭도들에 의해 잃었으나, 사태 진압 후 가해자들의 구명(救命)을 탄원하여 원수를 양자로 삼음으로써 세상을 감복시켰다. 6·25전쟁이 일어나자, 동료와 신도들의 피난 권유를 거절하고, 행동이 부자유한 나환자들과 교회를 지키다가 공산군에 의해 총살당했다. 그의 일대기인 《사랑의 원자탄》은 영화화까지 되었다. 저서에 《산돌 손양원 목사 설교집》이 있다.
전남 여수시 율촌면 에 있는 손양원 목사의 순교를 기리는 기념관.
기념관은 시옷(ㅅ)자 형태인데, 손양원 목사의 성씨를 상징하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삼위일체를 상징하며 동시에 송양원 목사와 그의 두 아들들을 상징하기도 한다. 건물 벽 12면은 이스라엘 12지파와 예수의 12제자를 상징한다. 6계단은 안식일에 들어가는 과정을 상징한다. 천정의 원뿔은 신자가 하늘을 향해야 함을 상징한다. 머릿돌은 이 기념관이 종교적 의미로 지어졌음을 밝히고 있다.
애양원은 일 년 내내 꾸준히 순례객들이 찾는 곳으로, 기념관 건립 요청이 쇄도하여 1989년 안용준 목사가 소장하고 있던 손양원 목사의 유품 150여 점을 기반으로 건립 준비에 착수하였다.
애양원교회 당회에서는 1990년 순교기념관을 건축하기 위해서 1차적으로 한국 성지를 순례하며 자료 수집에 착수했다. 1991년에 손양원 목사 순교기념관 건축위원회가 당회원 및 안수집사들로 구성되었다. 위원회 발족 후 3개월 만에 건축 부지 2,558㎡를 마련하게 되었고 설계는 송건이 맡았다.
1991년 11월 2일 기공식을 갖고 공사를 진행하여 1994년 3월 27일 준공했다. 준공 후 남아 있던 1억 4천만 원의 부채는 1994년 말 애양원교회 성도들의 헌금으로 청산되었다. 기념관 사업에 512개 교회와 663명의 개인, 108개 기관들이 헌금 등을 통해 도움을 주었다.
1층은 전시실, 제1예배실, 제2예배실, 개인기도실, 화장실, 기계실로 구성되어 있으며, 2층은 전시실, 사무실, 화장실로 구성되어 있다.
1층 전시실에는 예수의 사도들과 손양원 목사 삼부자의 사진 및 손양원 목사의 유품, ‘예수님 생애의 성지’라는 제목의 신윤식의 사진, 한완석의 서예와 김동일의 서예 등이 전시되어 있다. 2층 전시실에는 손양원 목사 삼부자의 생애 사진과 손양원 목사의 옥중 서신, 한성신학교 자료들 및 많은 고서들이 전시되어 있다. 2008년 기준으로 연평균 3만 명이 넘는 순례객이 방문하고 있다. 여름방학과 겨울방학에는 수련회를 개최하고 있으며, 평일에는 철야 기도와 각종 세미나 장소로 이용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