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문집 <무소유>의 작가로 불자들에게 친숙한 법정 스님이 2010년 3월 11일 오후 1시52분께 서울 성북동 길상사에서 법랍 55세 세수 78세로 입적하셨습니다. 법정 스님께서는 지난 2007년 10월 폐암 진단을 받고 제주도 서귀포 등에서 요양해오다 최근 삼성서울병원으로 옮겨 치료를 받아오시다 이날  길상사로 옮겨져 열반하셨습니다.


법정 스님은 한국 불교에서 대중적으로 가장 널리 알려진 스님으로서 1932년 전남 해남에서 태어나 목포상고를 거쳐 전남대 상과대를 다니다 1956년 당대의 고승인 효봉 스님을 은사로 비구가 됐으며, <불교신문> 편집국장, 송광사 수련원장, 보조사상연구원장 등을 지낸 뒤 1970년대 이후 조계산 송광사 뒷산에 불일암을 직접 지어 홀로 살아오셨습니다.

 
특히 법정 스님은 불교계의 현실 참여가 전무하다시피했던 ‘씨알의소리’ 편집위원으로 씨알의 소리가 큰 사회적 반향을 일으키도록 활기를 불어넣었고, 1970년대에 장준하 함석헌 등과 함께 불교계를 대표해 민주화운동에 나서기도 했으며, 지난해 선종한 김수환 추기경과도 깊은 교분을 나누셨습니다. 
특히 법정 스님은 1994년부터는 순수 시민운동단체 ‘맑고 향기롭게’를 만들어 마음과 삶을 맑히는 운동을 펼치며 고독한 수행 생활을 해오셨으며 1997년엔 서울 성북동에 길상사를 창건했고 2005년 강원도 산골 오두막으로 내려가 무소유의 삶을 살면서 가끔씩 길상사에서 법문을 해오셨습니다.

 
법정 스님은 입적하기 전날 밤 “모든 분들에게 깊이 감사드린다. 내가 금생에 저지른 허물은 생사를 넘어 참회할 것이다. 내것이라고 하는 것이 남아있다면 모두 맑고 향기로운 사회를 구현하는 활동해 사용해 달라. 이제 시간과 공간을 버려야겠다”라고 말씀하시며 머리맡에 남아 있던 책을 저서에서 약속한 대로 스님에게 신문을 배달한 사람에게 전해줄 것을 상좌에게 당부하셨으며 또 “그동안 풀어놓은 말빚을 다음 생으로 가져가지 않겠다. 내 이름으로 출판한 모든 출판물을 더 이상 출간하지 말아주기를 간곡히 부탁한다”는 말을 남기셨습니다. 
아울러 법정스님은 평소에 번거롭고, 부질없으며, 많은 사람에게 수고만 끼치는 일체의 장례의식을 행하지 말고, 관과 수의를 따로 마련하지도 말며, 편리하고 이웃에 방해되지 않는 곳에서 지체없이 평소의 승복을 입은 상태로 다비해주고, 사리를 찾으려고 하지 말며, 탑도 세우지 말라고 상좌들에게 당부하셨습니다.

 
이런 법정 스님의 말씀에 따라 대한불교 조계종과 송광사, 길상사 등은 이런유지를 받들어 별도의 공식적인 장례위원회를 구성하지 않기로 했으며, 다비식 이외 일체의 장례의식을 치르지 않기로 했으며, 조화나 부의금도 접수하지 않기로 했으며 조문객을 위해 길상사와 송광사, 스님이 17년간 머물렀던 송광사 불일암 등 3곳에 간소한 분향소만 마련했습니다.

 
법정 스님의 다비식은 13일 오전 11시 전남 순천 송광사에서 봉행됩니다.
한편 법정 스님은 맑고 정갈한 필치의 산문인 <무소유> <오두막 편지> <새들이 떠나간 숲은 적막하다> <산방한담> <텅빈 충만> <아름다운 마무리> <일기일회> <한 사람은 모두를, 모두는 한 사람을> 등의 저서를 남기셨습니다. 이에 부처님 찾아 떠나는 법우님들께서는 무소유의 지혜를 일러 주시고, 청빈의 도와 맑고 향기로운 삶을 몸소 실천하셨을 뿐만 아니라,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들어 수행자의 본분을 지켜 온 큰 스승이셨던 법정 스님의 열반에 애도의 마음을 함께 해주셨으면 합니다.

 

성민 법사 합장 삼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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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다비식 이외에는 일체의 장례의식을 거행하지 않기로 한 사실이 알려지며서 법정스님의 책 <무소유>의 ‘미리 쓰는 유서’ 편이 다시 관심을 끌고 있다.  법정스님은 특히 “그동안 풀어 놓은 말빚을 다음 생으로 가져가지 않겠다며 출판물을 더 이상 출간하지 말 것”을 간곡히 당부한 것으로 알려져 책의 내용이 더욱 더 주목받고 있는데 그 ‘미리 쓰는 유서’ 전문을 소개한다.

미리 쓰는 유서(저서 "무소유" 중에서)

 

죽게 되면 말없이 죽을 것이지 무슨 구구한 이유가 따를 것인가.

스스로 목숨을 끊어 지레 죽는 사람이라면 의견서(유서)라도 첨부되어야겠지만, 제 명대로 살 만치 살다가 가는 사람에겐 그 변명이 소용될 것 같지 않다. 그리고 말이란 늘 오해를 동반하게 마련이므로, 유서에도 오해를 불러일으킬 소지가 있다. 그런데 죽음은 어느 때 나를 찾아올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그 많은 교통사고와 가스 중독과 그리고 원한의 눈길이 전생의 갚음으로라도 나를 쏠는지 알 수 없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죽음 쪽에서 보면 한 걸음 한 걸음 죽어 오고 있다는 것임을 상기할 때, 사는 일은 곧 죽는 일이며, 생과 사는 결코 절연된 것이 아니다. 죽음이 언제 어디서 내 이름을 부를지라도 “네”하고 선뜻 털고 일어설 준비만은 되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나의 유서는 남기는 글이기 보다 지금 살고 있는 ‘생의 백서(白書)’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 육신으로서는 일회적일 수밖에 없는 죽음을 당해서도 실제로는 유서 같은 걸 남길 만한 처지가 못 되기 때문에 편집자의 청탁에 산책하는 기분으로 따라 나선 것이다.

 
누구를 부를까(유서에는 흔히 누구를 부르던데)?
아무도 없다. 철저하게 혼자였으니까.

설사 지금껏 귀의해 섬겨온 부처님이라 할지라도 그는 결국 타인이다.

이 세상에 올 때에도 혼자서 왔고 갈 때에도 나 혼자서 갈 수 밖에 없다.

내 그림자만을 이끌고 휘적휘적 삶의 지평을 걸어왔고 또 그렇게 걸어갈 테니 부를 만한 이웃이 있을 리 없다.
물론 오늘까지도 나는 멀고 가까운 이웃들과 서로 왕래를 하며 살고 있다.

또한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갈 것이다.

하지만 생명 자체는 어디까지나 개별적인 것이므로 인간은 저마다 혼자일 수밖에 없다.

 

그것은 보랏빛 노을 같은 감상이 아니라 인간의 당당하고 본질적인 실존이다.
고뇌를 뚫고 환희의 세계로 지향한 베토벤의 음성을 빌리지 않더라도, 나는 인간의 선의지(善意志) 이것밖에는 인간의 우월성을 인정하고 싶지 않다.

 

온갖 모순과 갈등과 증오와 살육으로 뒤범벅이 된 이 어두운 인간의 촌락에 오늘도 해가 떠오르는 것은 오로지 그 선의지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세상을 하직하기 전에 내가 할 일은 먼저 인간의 선의지를 저버린 일에 대한 참회다.

 

이웃의 선의지에 대해서 내가 어리석은 탓으로 저지른 허물을 참회하지 않고는 눈을 감을 수 없을 것이다.
때로는 큰 허물보다 작은 허물이 우리를 괴롭힐 때가 있다.

 

허물이란 너무 크면 그 무게에 짓눌려 참괴(慙愧)의 눈이 멀고 작을 때에만 기억에 남는 것인가. 어쩌면 그것은 지독한 위선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평생을 두고 그 한 가지 일로 해서 돌이킬 수 없는 후회와 자책을 느끼고 있다.

 

그것은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면서 문득문득 나를 부끄럽고 괴롭게 채찍질했다.
중학교 1학년 때, 같은 반 동무들과 어울려 집으로 돌아오던 길에서였다.

엿장수가 엿판을 내려놓고 땀을 들이고 있었다. 그 엿장수는 교문 밖에서도 가끔 볼 수 있으리만큼 낯익은 사람인데 그는 팔 하나가 없고 말을 더듬는 불구자였다. 대여섯 된 우리는 그 엿장수를 둘러싸고 엿가락을 고르는 척하면서 적지 않은 엿을 슬쩍슬쩍 빼돌렸다. 돈은 서너 가락치밖에 내지 않았다. 불구인 그는 그런 영문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이 일이, 돌이킬 수 없는 이 일이 나를 괴롭히고 있다.

그가 만약 넉살 좋고 건강한 엿장수였더라면 나는 벌써 그런 일을 잊어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가 장애자라는 점에서 지워지지 않는 채 자책은 더욱 생생하다.
내가 이 세상에 살면서 지은 허물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 중에는 용서받기 어려운 허물도 적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무슨 까닭인지 그때 저지른 그 허물이 줄곧 그림자처럼 나를 쫓고 있다.
이 다음 세상에서는 다시는 더 이런 후회스런 일이 되풀이되지 않기를 진심으로 빌며 참회하지 않을 수 없다.

내가 살아생전에 받았던 배신이나 모함도 그때 한 인간의 순박한 선의지를 저버린 과보라 생각하면 능히 견딜 만한 것이다.
“날카로운 면도날은 밟고 가기 어렵나니, 현자가 이르기를 구원을 얻는 길 또한 이같이 어려우니라.”
<우파니샤드>의 이 말씀을 충분히 이해할 것 같다.

 
내가 죽을 때에는 가진 것이 없을 것이므로 무엇을 누구에게 전한다는 번거로운 일도 없을 것이다.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은 우리들 사문의 소유관념이다.

그래도 혹시 평생에 즐겨 읽던 책이 내 머리맡에 몇 권 남는다면, 아침저녁으로 “신문이오”하고 나를 찾아주는 그 꼬마에게 주고 싶다.
장례식이나 제사 같은 것은 아예 소용없는 일.

요즘은 중들이 세상 사람들보다 한술 더 떠 거창한 장례를 치르고 있는데, 그토록 번거롭고 부질없는 검은 의식이 만약 내 이름으로 행해진다면 나를 위로하기는커녕 몹시 화나게 할 것이다.

 

평소의 식탁처럼 나는 간단명료한 것을 따르고자 한다.

내게 무덤이라도 있게 된다면 그 차가운 빗돌 대신 어느 여름날 아침에 좋아하게 된 양귀비꽃이나 모란을 심어 달라 하겠지만, 무덤도 없을 테니 그런 수고는 끼치지 않을 것이다.
생명의 기능이 나가 버린 육신은 보기 흉하고 이웃에게 짐이 될 것이므로 조금도 지체할 것 없이 없애 주었으면 고맙겠다.

그것은 내가 벗어버린 헌옷이니까.

 

물론 옮기기 편리하고 이웃에게 방해되지 않을 곳이라면 아무데서나 다비(茶毘: 화장)해도 무방하다.

사리 같은 걸 남겨 이웃을 귀찮게 하는 일을 나는 절대로 절대로 하고 싶지 않다.
육신을 버린 후에는 훨훨 날아서 가고 싶은 곳이 있다. ‘어린왕자’가 사는 별나라 같은 곳이다.

의자의 위치만 옮겨 놓으면 하루에도 해지는 광경을 몇 번이고 볼 수 있다는 아주 조그만 그런 별나라.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으로 봐야 한다는 것을 안 왕자는 지금쯤 장미와 사이좋게 지내고 있을까. 그런 나라에는 귀찮은 입국사증 같은 것도 필요 없을 것이므로 한번 가보고 싶다.

 
그리고 내생에도 다시 한반도에 태어나고 싶다. 누가 뭐라 한대도 모국어에 대한 애착 때문에 나는 이 나라를 버릴 수 없다. 다시 출가 수행자가 되어 금생에 못다 한 일들을 하고 싶다. - 법정스님 <무소유> 79~8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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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법정 스님 행장 -  

 

-1932215: 전남 해남군 문내면 선두리에서 박근배(朴根培) 선생과 김인엽(金仁葉) 여사의 아들로 출생. 우수영 초등학교, 목포상업학교를 졸업하고 전남대 상과대학 3년 수료.

 

-1954215: 통영 미래사로 입산 출가  

-1956715: 송광사에서 당대의 선지식이었던 효봉스님을 은사로 사미계 수계  

-1959315: 통도사 금강계단에서 자운스님을 계사로 비구계 수계  

-1959415: 해인사 전문 강원에서 명봉스님을 강주로 대교과 졸업  

-1960년 초 봄~1961: 운허스님의 부름을 받고 통도사로 가 <불교사전> 편찬 작업에 동참했고 이 일을 계기로 타고난 문재(文才)를 발휘해 글을 쓰기 시작함. 한편 지리산 쌍계사, 가야산 해인사, 조계산 송광사 등 선원에서 수선안거(修禪安居)  

-1967: 동국역경원 개설에 참여하고 역경위원으로 활동  

-1972: 스님의 첫 저서인 <영혼의 모음> 발간됨   

-1973: 대한불교조계종 기관지인 불교신문사논설위원, 주필 역임. 함석헌, 장준하 등과 함께 민주수호국민협의회를 결성. 유신철폐 개헌 서명운동에 참여했으며 <씨알의 소리> 편집위원으로 참여함  

-197510: 불현듯 송광사로 돌아감. 인혁당 사건이 발생, 8명의 민주화 운동을 하던 젊은이들이 사형당하는 것을 보고 큰 충격을 받음. 한편 반체제 운동의 한계를 느끼고 송광사로 가 뒷산 중턱에 불일암을 짓고 홀로 수행함  

-1976: 스님의 대표적인 저서 <무소유> 발간   

-1984~1987: 송광사 수련원장 역임. 1971년부터 구산스님이 시작한 송광사 선() 수련회는 법정스님이 수련원장을 맡으면서 크게 확산됐다. 한해 6~7차례에 걸쳐 500여 명 이상이 참가할 정도로 큰 호응을 받았고 이와 같은 45일간의 짧은 출가는 전 불교계로 확산, 지금은 많은 사찰에서 선 수련회를 하고 있다  

-1987~1990: 보조사상연구원 원장 역임  

-1987: 미국 LA에서 김영한 보살(1999년 작고함)이 자신의 소유인 대원각의 대지 7000여 평과 건물(40여 동) 일체를 불교의 수행도량으로 바꾸어달라며 기증할 뜻을 밝힘. 이때 법정스님은 저는 평생 주지 노릇을 해 본 일도 없고 앞으로도 주지가 될 생각은 없다며 완곡한 사양의 뜻을 밝힘  

-1992: 저작 활동으로 명성이 높아져 불일암으로 많은 불자들의 방문이 이어지자 다시 출가하는 마음으로 불일암을 떠나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강원도 산골, 화전민이 버리고 간 오두막에서 지내기 시작함. 강원도 생활 17년째인 2008년 가을에는 묵은 곳을 털고 남쪽 지방에 임시 거처를 마련함  

-19937: ‘연못에 연꽃이 없더라는 글을 발표해 정부의 종교편향 정책을 지적함. 당시 기독교인인 김영삼 정부가 들어서면서 독립기념관, 경복궁, 창덕궁 연못에 불교를 상징하는 꽃이라 하여 연꽃을 제거해 버렸다는 이야기를 듣고 각 현장을 직접 확인한 뒤 연못에 연꽃이 없더라는 글을 발표함. 이 글을 통해 날로 각박해지고 메말라만 가는 인심을 맑고 향기롭게 가꾸기 위한 시민운동을 주창함. 또한 불자들의 시주 덕분에 살아왔으니 그 빚을 갚는다는 뜻으로 맑고 향기롭게모임을 이끌게 되었음. 이 글이 발표되자 김영삼 대통령이 직접 실태를 파악한 후 잘못된 일이라며 시정하겠다는 뜻을 전함  

-19938: 맑고 향기롭게 살아가기 운동 발기인 모임. 현호스님, 청학스님, 윤청광, 박수관, 김형균, 이계진, 강정옥, 정채봉, 김유후, 이성용 씨 등 지인들의 권유로 순수 시민운동 맑고 향기롭게 살아가기 운동을 시작함. 이 모임의 상징은 연꽃으로 했고, 그 도안은 고현 조선대 교수가 함  

-19931010: 프랑스 최초의 한국 사찰 파리 길상사(송광사 파리 분원) 개원. 유럽 여행 도중 프랑스 파리에서 만난 불자 교포들과 유학생들의 어려운 형편을 보고 재불(在佛) 화가들과 함께 뜻을 모아 법당을 마련하는데 나섬. 이때 도움을 받은 화주불자들을 위해 길상회를 결성, 서울 법련사 옆 출판회관에서 매월 1회 모임을 갖고, <선가귀감> 등을 공부했으며 이 모임은 길상사 개원 때까지 이어졌다. 한편 맑고 향기롭게 모임의 창립에도 도움이 됐다. 당시 실무는 청학스님이 맡음  

-1994326: 맑고 향기롭게 살아가기 운동 창립 법회. 서울 양재동 구룡사에서 창립 기념 대중 법문을 함. 같은 해 44일에는 부산에서 역시 대중법문을 하여 일반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킴. 맑고 향기롭게 모임은 순수 시민단체를 지향, “회원 각자가 자신이 정한 방식대로 후원을 하는데 힘입어 물이 흐르는 만큼 물길이 열리듯 회원들의 성의와 뜻을 모아 우선은 내 마음을 맑고 향기롭게 지니고, 이웃과 사회를 향한 나눔을 실천하며 소중하고 감사한 자연을 보전, 보존해가는 일에 힘쓰라는 스님의 뜻을 따라 전국 1만여 회원이 서울, 부산, 대구, 경남, 광주, 대전 등 6개 지역 모임에서 각각 활동하고 있음. 맑고 향기롭게 장학금을 마련, ·고교생을 대상으로 매년 학비 지원  

-1995: 맑고 향기롭게 살아가기 운동이 조용히 정착하면서부터 김영한 보살이 거듭 대원각을 법정스님에게 기증하겠다는 뜻을 밝힘. 네 차례나 사양하던 법정스님은 주변 사부대중의 간청을 수락해 김영한 보살의 뜻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함. 다만 스님 개인이 아닌 조계종단의 이름으로, 자신은 상징적인 관리자(주지가 아닌 회주(會主))의 입장에서 대원각을 기증 받겠다는 의지를 천명함  

-1995613: 대원각 터와 건물 일체를 길상사(吉祥寺)로 창건하면서 대한불교조계종 송광사 분원으로 등록함  

-1996520: 대원각 부동산 일체를 증여받음. 같은 해 67일 서울지방법원 성북등기소에 등기를 마쳐 법적인 절차를 마침  

-19968: 청도 운문사에서 제1회 맑고 향기롭게 회원 수련회 실시. 임원 및 전국의 회원 80명 참석  

-1996926: 김영한 보살의 대원각 기증과 길상사 창건 소식이 언론을 통해 보도되면서 전국적인 화제를 불러일으킴. 당시 민심이 흉흉하던 터에 따뜻하고 아름다운 소식이 전해지면서 길상사는 창건 법회 이후까지 언론의 중심에 서게 됨  

-199612: 사단법인 맑고 향기롭게 이사장 취임. 회원이 생기고 후원금이 들어오면서 모임의 공신력이 필요하다는 건의에 따라 당시 문화체육관광부로부터 비영리사단법인으로 인가를 받음. 이때 스님은 부득이 이사장이란 세속 직위를 받았으나 그것은 서류상의 직책일 뿐이라며 이사장 대신 회주(會主)’라는 호칭을 사용함. 여기서 회주는 어떤 모임의 중심이 되어 이끌어가는 사람을 가리키는 뜻으로, 이후 불교계에서는 특정한 소임을 맡지 않은 어른 스님을 일컫는 말로 자리 잡게 됨  

-19971월 말: 사부대중으로 구성된 길상사 자문위원회를 통해 향후의 사찰 운영방안과 마스터플랜이 세워짐. 이때 같은 해 1214일을 창건 법회일로 정하고 차분히 개원을 준비함  

-19976월 말: 기존에 대원각 터를 임대한 영업주가 임대 기간 만료일인 6월 말을 넘겨 11월 초까지 영업 기간을 연기해 줄 것을 요청하고, 길상사측이 이를 수락해 창건에 따른 보수 공사가 지연됨  

-19978: 김천 직지사에서 제2회 맑고 향기롭게 회원 수련회 실시. 전국에서 120명 회원이 참석했고 34일간의 일정을 스님이 직접 진두지휘함  

-19979~12: 길상사 초대(初代) 주지 청학스님의 주도로 불철주야 창건 보수 공사를 실시함. 수십 년 동안 요정으로 사용됐던 흔적을 일소하고 주요 건물을 극락전, 설법전, 요사채, 후원, 시민 선방 등으로 개조하는 일에 박차를 가함. 당시 법정스님은 강원도 산골 마을에 주석하면서 길상사 창건 준비에 여념이 없는 사부대중을 여러 차례 격려함  

-19971214: ‘맑고 향기롭게근본도량 길상사 창건 법회. 4000여 불자가 참여한 가운데 경내 극락전에서 이계진(현 국회의원) 아나운서의 사회로 창건 법회가 진행됨. 각 언론사의 열띤 취재 경쟁 속에서 김수환 추기경이 창건법회에 참석해 축사를 해 다시금 화제를 불러일으킴. 이 날 법정스님은 길상사가 가난하면서도 맑고 향기로운 도량이 되길 바란다면서 선택된 맑은 가난, 즉 청빈은 삶의 미덕이며 마음의 평화를 이루게 하고 올바른 정신을 지니게 한다는 내용의 법문을 함. 김종서, 윤용숙, 김유후, 공종원 씨 등을 자문위원으로 위촉. 한편 법정스님에게 길상화(吉祥華)라는 법명을 받은 김영한 보살은 개원 법회에 참석해 없는 것을 만들어서 드려야 하는데 있는 것을 내놓았을 뿐이니 의미가 없다고 말해 모든 이들의 가슴에 환희심을 일으킴. 맑고 향기롭게 장학금을 길상화 보살의 뜻을 살려 맑고 향기롭게 길상화 장학금으로 바꾸고 이후 매년 전국의 중고교생 30명을 선정, 장학금을 지급함  

-1998224: 명동성당 축성 100돌 기념 초청 강연. 김수환 추기경의 길상사 창건 법회 축사에 답례 성격도 있음. 글 쓰는 일 외에는 좀 체로 하지 않았던 대중 법문을 맑고 향기롭게근본도량 길상사 창건에 대한 책임과 맑고 향기롭게 모임의 회원으로서 역할을 해야 한다며 격월로 대중법문을 함  

-200312: ‘맑고 향기롭게근본도량 길상사 회주에서 스스로 물러남. 당시 스님은 맑고 향기롭게 모임의 이사장직도 사임하겠다는 뜻을 밝혔으나 임원들의 거듭된 만류로 사임의 뜻을 철회함  

-2004: 그간 격월로 해오던 맑고 향기롭게근본도량 길상사에서의 대중 법문을 연 2, 4월과 10월 두 번 함  

-200710: 폐암 진단을 받음. 그러나 이 병고도 당신을 찾아온 친지 중 하나라며 어르고 달래며 지내시겠다는 것을 친지 및 상좌들이 수차례에 걸쳐 간곡히 권유해 치료를 위해 도미함. 세계 최고 권위의 의사들조차 성공률 4%라며 치료를 주저했으나 스님은 수행자로 일반인들과는 전혀 다르다는 친지들의 강력한 주장에 치료를 시작, 현대의학으로는 설명이 불가능하다며 담당 의사들이 놀랄 정도로 회복함  

-20082: 미국에서의 치료를 마치고 귀국함. 이후 다시 길상사에서의 정기 대중법문을 하고, 글도 다시 쓸 정도로 회복  

-20094: 병고가 재발해 치료, 요양함  

-20103월 현재: 사단법인 맑고 향기롭게 이사장  

-2010311일 법란 55, 세수 78세로 입적


하늘과 바람과 달을

 

예전에는 시인(詩人)이라는 직종이 따로 없었다. 글을 아는 사람이면 누구나 시를 읊고 지었다.  

제대로 된 선비(그 시절의 지식인)라면 , , 를 두루 갖추고 있었다. 그것이 보편적인 교양이었다.  

'승려시인'이란 말도 예전에는 없었다. 경전을 읽고 어록을 읽을 수 있는 스님들은 그 자신도 삶의 노래인 를 짓고 즐겼다.  

라는 글자를 살펴 보면 '말씀 언 변''절 사'자이다. 절에서 수행자들이 주고 받는 말이 곧 라는 뜻이다  

바람과 달과 시냇물과 나무와 새와 꽃과 더불어 살아가는 산중에서는, 보고 듣고 말하는 것이 언어의 결정체인 의 분위기로 이루어지게 마련이다.  

선문 선답도 논리적으로 비약은 심하지만 의 형식을 빌린 문답이다.

 

지는 꽃향기 골짜기에 가득하고

우짖는 새소리 숲 너머에서 들려 온다.

그 절은 어디에 있는가

푸른 산의 절반은 흰구름이어라.

 

늦은 봄날 절 안의 한가로운 풍경이다. 꽃이 지고 새소리 들려오는 곳, 그런 절은 어디 있는가. 하고 묻는 이에게 푸른 산의 절반은 흰 구름이라고 슬쩍 비켜서 답한다. 속세의 먼지가 닿지 않는 흰 구름 속에 묻혀있는 절이므로 더욱 신선하다. 서산대사 휴정스님이 어느 산에서 읊은 이다.

 

초가는 낡아 삼면의 벽이 없는데

노스님 한 분이 대평상에서 졸고 있다

석양에 성긴 비 지나가더니

푸른 산은 반쯤 젖었다.

 

다 허물어진 암자에 사는 노스님의 모습이 그림 같다.  

노스님이라 좌선이 곧 졸음으로 이어진 것. 뻣뻣하게 곧은 자세로 앉아있다면 노스님답지 않다. 조는 그 속에서 선정삼매를 이룬다.  

해질 무렵 한 소나기가 지나가자 반쯤 젖은 푸른 산이 대나무 평상에서 졸고있는 노스님을 받쳐주고 있다.  

역시 휴정스님의 '草屋'이란 .

요즘 큰 절과 암자를 가릴 것 없이 다들 물질적으로는 풍부하게 살기 때문에 퇴락해가는 절을 만나기 어렵다.  

그 속에서 사는 처지에서는 그렇지 않지만, 지나가는 나그네의 눈으로 보면 번쩍거리는 절보다는 얼마쯤 퇴락해가는 절의 모습이 그윽하고 아름답게 보일 것이다.

 

벽이 무너져 남쪽 북쪽이 다 트이고

추녀 성글어 하늘이 가깝다

황량하다고 말하지 말게

바람을 맞고 달을 먼저 본다네

 

조선시대 환성 지안 스님의 인데

곧 허물어져 가는 오두막에 살면서도 궁기가 전혀 없는 낙천적인 삶의 모습이다.  

벽이 무너지고 추녀가 벗겨져 나갔지만 도리어 그 속에서 자연을 가까이 할 수 있음을 다행스럽게 여기는 것이 예전 수행자들의 한결같은 모습이었다. ㅓㄷ 하늘과 땅, 산과 강을 큰 집으로 여겼던 것이다.  

옛것과 낡은 것은 아름답다.

거기에 세월의 향기가 배어있기 때문이다.

 

- 아름다운 마무리 - 중에서 (법정 스님)

 

* 품격과 슬기를 교양으로 갖추게 하여 질적 삶을 중시하던 시대의 선비 교육과정에는 은유를 담는 詩文을 통한 고금의 대화법이 필수 였다그러나 의 감흥을 갖추지 못하는 현대의 양적 교육과정에서는 팔과 다리가 각기 노는 무지한 선비를 양산하고 있다.  

, , 를 아예 모르는 사람이 가르치고 있으니 어찌 人生香氣하랴  

잘 살고 못사는 것이 모두 물질에 척도를 두고 있으니 인생을 마무리하려면 괴로움을 뿌리치기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