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효대사의 속성(俗姓)은 설(), 아명(兒名)은 서당(誓幢)ㆍ신당(新幢)이다. 법명(法名)은 스스로 원효()라고 지었는데, 이는 불교를 새로 빛나게 한다는 뜻이며 당시 사람들은 ‘새벽[始旦]’이라는 뜻의 우리말로 불렀다고 전해진다. 617년(진평왕 39년) 압량군(押梁郡) 불지촌(佛地村, 지금의 경상북도 경산시 자인면) 북쪽 율곡(栗)에서 태어났으며, 조부는 잉피공(仍皮公, 赤大公이라고도 함)이고, 아버지는 신라 17관등 가운데 11위 내마(柰麻)의 지위에 있던 담날(談捺)이다. 설총(薛聰)을 낳은 뒤에 스스로 소성거사(小性居士)ㆍ복성거사(卜性居士)라고 칭하기도 했으며, 고려 숙종 때(1101년)에는 대성화쟁국사(大聖和諍國師)라는 시호(諡號)를 받았다. 한국 불교 사상의 발달에 크게 기여하여 해동보살(海東菩薩), 해동종주(海東宗主)라고도 불린다.
 
15세 무렵에 집안의 재산을 희사(喜捨)하고 출가하여 자신의 집을 절로 지어 초개사(初開寺)라고 하였다. 그리고 자신이 태어난 사라수(裟羅樹) 곁에 사라사(沙羅寺)를 세웠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낭지(朗)와 혜공(惠空) 등의 고승에게 불법을 배웠다고 전해지며, 완산주(完山州)에 머무르며 열반종(涅槃宗)을 강론하던 고구려의 승려 보덕(普德)에게 열반경(涅槃經)과 유마경(維摩經) 등을 배웠다는 기록도 있다. 그러나 특별하게 한 명의 스승을 정해 놓고 배우지는 않았으며, 스스로 깨달음을 얻었다고 전해진다. 648년(진덕여왕 2년)에는 황룡사(皇龍寺)에서 불경을 연구하며 수도하였다.
 
650년(진덕여왕 4년), 의상(義湘)과 함께 현장(玄奘)이 인도에서 새로 들여온 신유식(新唯識)을 배우기 위해 중국의 당() 나라로 유학을 떠나려 했으나 요동(遼)에서 첩자(諜者)로 몰려 사로잡히면서 실패하였다. 661년(문무왕 원년)에 다시 의상과 함께 당 나라로 떠나려 하였으나, 배를 타러 당항성(唐項城, 지금의 경기도 화성시)으로 가던 길에서 진리는 밖에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서 찾아야 한다는 깨달음을 얻고 되돌아왔다. 밤에 오래된 무덤에서 잠을 자다가 잠결에 해골에 괸 물을 마시고 ‘이 세상의 온갖 현상은 모두 마음에서 일어나며, 모든 법은 오직 인식일 뿐이다. 마음 밖에 법이 없는데, 어찌 따로 구할 필요가 있겠는가(三界唯心 萬法唯 心外無法 胡用別求)’라는 깨달음을 얻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옷을 짓는 대는 작은 바늘이 필요한 것이니
비록 기다란 창이 있다고 해도 소용이 없고

 
비를 피할 때에는 작은 우산 하나면 충분한 것이니
하늘이 드넓다 하여 따로 큰 것을 구할 수고가 필요 없다.

 

그러므로 작고 하찮다 하여 가볍게 여기지 말지니

그 타고난 바와 생김에 따라 모두가 다 값진 보배가 되는 것이다.

- 원효대사 -

 

그 뒤 분황사(芬皇寺) 등에 머무르며 불경의 연구와 <화엄경소(華嚴經疏)> 등의 저술에 힘쓰기도 하였으나, 요석공주(瑤石公主)와의 사이에서 설총(薛聰)을 낳은 뒤에는 스스로 소성거사(性居士), 복성거사(卜性居士)라고 칭하며 서민 속으로 들어가 불교의 대중화에 힘썼다. 광대들이 가지고 노는 큰 박으로 도구를 만들어 이를 ‘무애(無碍)’라 하였다. 무애(無碍)는 ‘일체의 거리낌이 없는 사람이 한 길로 삶과 죽음을 넘어설 수 있다(無碍人 一道出生死)’는 화엄경(華嚴經)의 구절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리고 이를 가지고 각지를 떠돌며 불교의 교리를 쉬운 노래로 만들어 전했다. 그는 사람들에게 본래의 마음을 깨달으면 정토(淨土)를 이룰 수 있으며, 입으로 부처의 이름을 외우고 귀로 부처의 가르침을 들으면 성불할 수 있다고 가르쳤다. 이러한 원효의 활동으로 신라의 백성들은 모두 부처의 이름을 알고 ‘나무아미타불’의 염불을 외우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만년에는 경주의 고선사(高仙寺)에 머무르다가, 686년(신문왕 6년) 3월 30일 혈사(穴寺)에서 70세의 나이로 입적하였다. 그가 죽은 뒤에 아들인 설총이 유골을 빻아 소상(塑像)을 만들어 분황사에 안치하였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신라 애장왕(哀莊王, 재위 800∼809) 때에 그의 후손인 설중업(薛仲業)이 당시 실권자였던 각간(角干) 김언승(金彦昇, 뒷날의 헌덕왕)의 후원으로 고선사(高仙寺)에 서당화상비(誓幢和尙碑)를 세웠다. 이 비석은 오늘날에도 일부가 훼손되어 전해지는데, 원효의 전기에 관한 가장 오래된 자료로서의 의의를 지닌다. 고려 명종(明宗, 재위 1170∼1197) 때에도 분황사(芬皇寺)에 화쟁국사비(和諍國師碑)를 세웠다고 전해지지만, 오늘날에는 남아 있지 않다.
 
원효에 관한 기록은 <삼국유사>와 ‘서당화상비’ 이외에 중국의 송() 나라 때에 찬녕(贊寧)이 편찬한 <송고승전(宋高僧傳)> 등에도 전해진다. <삼국유사>에는 ‘원효불기(元曉不羈)’ 이외에 ‘낭지승운보현수(朗智乘雲普賢樹)’, ‘사복불언(蛇福不言)’, ‘의상전교(義湘傳敎)’, ‘이혜동진(二惠同塵)’, ‘낙산이대성관음정취조신(洛山二大聖觀音正趣調信), ‘광덕엄장(廣德嚴莊)’ 조() 등에 원효와 관련된 일화가 소개되어 있다. 그리고 오늘날 서울시 용산구의 원효로(元曉路)와 원효대교(元曉大橋)의 지명은 원효의 이름에서 비롯된 것이다.

 

금수사 원효대사 탑비

 

저술: 원효는 불교를 널리 보급하는 한편, 불교 경전의 연구에도 힘을 기울여 당시 전해진 거의 모든 경론(經論)들에 대한 주석서(註釋書)를 저술하였다. 원효가 남긴 저술에 대해서는 학자들마다 견해가 다르지만, 모두 100여종 240여권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그 가운데 일부만 전해진다.
 
현재 전해지고 있는 저술은 <금강삼매경론(金剛三昧經論)>, <기신론별기(起信論別記)>, <대승기신론소(大乘起信論疏)>, <대승육정참회(大乘六情懺悔)> 등이 있고, 이 중 <대승기신론소>, <금강삼매경론> 등은 중국의 고승들도 ‘해동소(海東疏)’라 칭하며 즐겨 인용되었다. 특히 <금강삼매경론>은 원효가 <금강삼매경>에 대해 주석을 한 것으로, <삼국유사>에도 ‘삼매경소(三昧經疏)’라고 기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