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2년 대구에서 독실한 가톨릭 집안의 막내로 출생하여 1941년 서울 동성상업학교를 졸업하였다. 같은 해 도쿄 조치[
]대학 철학과에 입학하였으나 제2차세계대전으로 1944년에 귀국하였다. 1951년 가톨릭대학(전 서울 성신대학) 철학과를 졸업하고, 1964년 독일 뮌스터대학에서 신학사회학을 연구하였으며, 1974년 서강대학교에서 명예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51년 사제 서품을 받고 대구 대교구 안동천주교회 주임신부가 되었으며, 1955년 대구 대교구 김천시 황금동 천주교회 주임신부 겸 김천시 성의중고등학교장을 지냈다. 1964년 주간 가톨릭시보 사장, 1966년 마산 교구가 설정됨과 동시에 마산교구장으로 임명되었으며, 5월 29일 주교가 되었다.

1968년 제12대 서울 대교구장으로 임명되면서 대주교가 되었다. 1969년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한국 최초의 추기경이 되었다. 1970년 이후 한국 주교회의 의장, 아시아 천주교 주교회의 준비위원장, 교황청 세계주교회의(시노두스) 한국 대표를 지냈다. 1984년 한국 천주교 200주년 기념 성회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집전한 가운데 개최하였으며, 1998년 서울 대교구장을 은퇴하였다.

 

1968년 서울 대교구장 취임사에서 '교회의 높은 담을 헐고 사회 속에 교회를 심어야 한다.'고 밝히면서 교회 쇄신과 현실 참여 원칙에 따라 가난하고 봉사하는 교회, 한국의 역사 현실에 동참하는 교회상을 제시하였다. 또 '존엄성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바탕으로 하는 공동선의 추구'를 사회 교리로 주장하였다. 취임사와 사회 교리로 인해 교회 안팎의 젊은 지식인과 노동자들로부터 지지를 얻었고, 이후 시국 관련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직접,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저서에《하느님은 사랑이시다》(분도출판사, 1981), 《평화를 위한 기도》(1981), 《이 땅에 평화를》(햇빛출판사, 1988)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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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유혈" 못 막은 것 지금도 후회 서울교구장 끝으로 모든 현업 물러나... "내 몸엔 유교-불교 피 흐르 고 있어"
 
1971년 12월 6일 박정희 당시 대통령은 국가비상사태를 선언했다. 이 어서 여당인 민주공화당은 국회에 특별법을 제출한다. 대통령에게 비 상대권을 부여하기 위한 '국가보위에 관한 특별법'이다. 국민의 시선 은 온통 청와대와 정치권으로 쏠렸다.
 
그해 12월 25일 명동성당에서는 성탄미사가 열린다. 미사는 KBS를 통해서 전국에 생방송으로 중계되고 있었다. 경건하고 평온했다. 강 론시간이 되자 추기경이 강대에 섰다. 김수환 추기경은 강론을 시작 한 후 무겁게 입을 열었다.
 
"정부 여당에 묻습니다. 대통령에게 비상대권을 주는 것이 나라를 위 해서 유익한 일입니까? 지금도 대통령은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습 니다. 새로운 특별법을 만들면 오히려 국민과의 일치를 깨게 될 것입 니다. 그렇게 되면 국가안보에도 위협을 주게 될 것입니다. 이 땅의 평화에 해를 끼치지 않겠습니까."

    

      

성당 안이 술렁거렸다. 공교롭게도 박 전 대통령은 텔레비전을 통해 서 이 미사를 지켜보고 있었다. 청와대가 발칵 뒤집혔다. 급하게 중 계방송의 책임자를 찾았지만 자리에 없었다. 강론의 대부분이 국민에 게 전해진 후에야 방송을 중단할 수 있었다. 한국천주교회의 수장이 방송을 통해서 국가의 절대권력을 비판한 이 사건은 충격이었다. 권 력의 회유와 위협도 있었고 보수적인 교회 안팎으로부터 비난도 쏟 아졌다. 그러나 한국의 천주교회는 그때부터 인권과 사회 정의의 보 루로 인식되기 시작한다. 교회로서는 어려운 시절이 시작되었지만, 한 국의 천주교는 국민의 신뢰를 받게 된 것이다.
 
▲1971년부터 민감한 사회 문제 발언
 
김수환 추기경이 민감한 정치-사회적 문제에 대해서 발언했던 것은 개인적인 신앙의 목표와 일치했기 때문이다. 1966년 마산 교구장으로 임명되면서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라는 표어를 사목(司牧)의 목 표로 삼았다. 신앙의 목적을 인간의 존엄성과 모든 이들을 위한 공동 선을 추구하는 데 둔 것이다.
 
일선 교회의 신부로 일할 때 교도소의 사형 집행을 참관한 일이 있 었다. 마침 교수대가 망가졌다. 고장을 수리하는 도중 사형수는 아무 런 동요가 없이 고요히 기다리고 있다. 그가 옆에 서 있는 신부의 눈 을 한참 들여다보더니 이렇게 말한다.
 
"신부님. 저는 이제 하늘나라에 갑니다. 제가 먼저 가서 신부님을 위 해서 기도하겠습니다."
김수환 신부는 그에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 후 서대문교도소 에서 만난 사형수들에게서 말할 수 없는 마음의 평화를 발견하고는 놀랐다. 추기경이 된 뒤에는 교회가 허락해주기만 한다면 가난하고 불우한 사람 속에 들어가 그들과 함께 살고 싶다는 고백을 남겼다. 1968년 서울대교구장 취임식 때 남긴 인사말은 아직도 유명하다.
 
"교회의 높은 담을 헐고 사회 속에 교회를 심어야 합니다."
추기경의 이야기대로 사회 속에 뛰어든 명동성당은 '민주화의 성지' 라는 별명을 얻었다.
지난 10월 15일 북한산 도선사에서 열린 법회에서 추기경을 만날 수 있었다. 청담 스님 탄신 100주기 추모 법회였는데 김수환 추기경은 이 자리에 참석해 스님과의 교류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전에도 김수 환 추기경이 타종교의 종교행사에 참석하는 일은 드물지 않게 있어 왔다. 법정 스님의 책 〈무소유〉에는 직접 추천사를 써서 사람들에 게 권한 적도 있다. 김수환 추기경은 스스로 자신의 핏줄 속에 불교 의 피가 흐르고 있음을 알고 있다고 고백한다.

    

  

▲추기경보다 '혜화동 할아버지'에 더 만족
 
"언젠가 경주 석굴암에 가서 불상을 넋을 잃고 쳐다보았습니다. 한 시간 이상을 그렇게 서 있었던 것 같습니다. 뭔가에 깊이 빠져 들어 가는 것 같았어요. 바티칸에 가서 세계적인 미술품인 성상을 볼 때는 한 작품을 5분 이상 본 적이 없었습니다. 결국 내 안에 불교적인 피 가 흐르고 있다는 걸 느낄 수밖에 없었습니다."
 
성균관대학교의 설립자인 심산(心山) 김창숙 선생이 돌아가셨을 때의 일이다. 빈소에서 자신의 내면에 흐르는 유교의 피는 속일 수 없다면 서 큰 절을 했다. 가톨릭 사제가 유생의 신위 앞에 절을 한 것은 그 야말로 종교적 파격이었다. 천주교회도 우리나라 정신문화의 풍토 속 에서 뿌리내려야 한다는 것이 김수환 추기경의 생각이다.
 
종교인으로서 모든 것을 얻었지만 자신에 대해서는 종종 '그다지 선 하지 않은 사람'이라고 표현한다. 신학교도 어머니에게 효도하기 위 해서 갔다. 말썽도 많이 부려서 학교에서 쫓겨날 뻔한 적도 있었다. 신학을 공부하면서도 신부가 될 수 있을까 끊임없이 고민했다. 사제 서품을 받기 전에는 한 여인으로부터 열렬한 애정 공세를 받은 적도 있었다. 병든 여인을 간병하다가 구애받게 된 것이다. 1년에 걸친 여 인의 애정 공세와 함께 신부가 될 것인지 말 것인지를 깊이 번민했 다. 그때 김수환 추기경은 이런 결론을 내렸다.
 
"한 여인을 깊이 사랑할 자신이 없었어요. 그보다는 오히려 보다 많 은 사람을 위해서 도움이 되는 일을 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었습니다. 결국 신부가 되는 것이 좋겠다는 결심을 하게 됐습니다."
 
작은 집을 지어서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살겠다던 어릴 적 꿈과는 너무나 달라진 결정이 되고 말았다. 그 이후로 사제 서품을 받은 지 50년을 넘겼다.
 
신부로서 영광스러운 삶이었지만, 1980년에는 자신이 사제인 것이 슬 프고 힘들었다고 한다. 광주에서의 유혈 사태가 예상되자 전두환 보 안사령관을 만났다. 주한 미 대사-주한 미군사령관도 만나서 어떻게 든 유혈을 막으려 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성명서를 발표하려다 가 그만둔 것은 지금도 후회가 된다고 한다. 교황청에 추기경 사표를 썼다가 몇 번을 찢어버렸다. 살아오면서 가장 괴로웠던 시간이 자책 감 속에서 지나갔다. 무고한 사람의 피는 추기경에게 참을 수 없는 고통을 주었다.
 
민주화를 외치는 이들에게 성당의 뜰을 열어주었던 추기경은 이제는 은퇴했다. 오랫동안 청원해오던 서울교구장의 사임도 교황청으로부터 겨우 허락을 받았다. 공식적으로는 모든 현업에서 물러났다. 이제는 추기경 보다는 \'혜화동 할아버지\'로 불리는 것을 즐긴다.
 
인생의 황혼에서 김수환 추기경은 이런 이야기로 자신의 현재 생활 을 표현한다.
 
"나는 석양을 좋아해요. '어린 왕자'는 자기가 사는 조그만 별에서 의 자를 옮겨 가며 하루에도 수십 번씩 석양을 봅니다. 자신을 비우면서 석양을 바라보고 싶은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오늘도 추기경의 하늘에는 노을이 아름답게 비쳐질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