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진 스님이 말한 인생 최대의 부끄러움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서 8월 정기법회 "국군의 베트남 양민 학살에 사과"
명진 스님(조계종 중앙종회의원)이 9일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 지하공연장에서 스님의 팬클럽 회원 등과 8월 정기법회를 개최했다. 스님은 봉은사 주지 소임을 마친 후 성동구민회관, 청담동 벙커 등을 옮겨 다니며 법회를 열고 있다.
조계종 측은 이날 스님에게 대관을 승낙하면서 스님이 정부‧종단을 비판하면 마이크를 꺼버리겠다고 통보했다.
명진 스님은 “마이크가 언제 꺼지는지 보겠다”면서 동국대 이사장 일면 스님의 문화재 절도 의혹과 수원 용주사 주지 성월 스님(명진 스님은 성월 처사라고 했다)의 처자식 문제만큼은 종단이 시급히 해결해야 한다고 했다.
도반들 보면 힘이 난다
9월에 찬바람이나 나면 법회를 할 까 했는데, 총무원이 오늘 대관 신청을 허락해 줄지 몰랐다. 이것 또한 총무원을 원망해야 될 것 같다. (하하하) 법회를 할 수도 안할 수도 없지만 그래도 여러분을 보면 힘이 난다. 오늘 이 자리에는 봉은사를 오래 다닌 신도, 오랫동안 공부하신 분, 시민사회운동 하시는 분, 전직 경찰서장, 평화재향군인회장 등 다양한 분들이 참석했다. 나는 지난달 25일부터 이달 1일까지 베트남을 다녀왔다. 오늘 법회에는 베트남에 동행했던 분들도 참석했다.
씬 라이(미안합니다)
내 가슴에 달린 꽃은 베트남에서 고엽제 후유증 환자로부터 선물 받은 것이다. 베트남은 월남전 당시 전역에 뿌려진 고엽제 때문에 400만여 명이 고통을 겪고 있다. 그 후유증은 2~3세까지 이어지고 있다. 고엽제를 뿌리면 이틀 만에 나무가 말라 죽는다. 사람에게 해가 없을 리 없다. 베트남인들은 아이를 낳으면 고엽제 후유증에 기형아를 출산할까 걱정을 한다.
내가 베트남에 도착하던 첫날이었다. 눈 없는 사람, 성장이 멈춘 사람 등이 피아노를 치고 노래를 했다. 그들을 본 나는 울다가 무릎 꿇고 사과했다. 베트남을 다녀와 후회하는 것이 있다.왜 그때 베트남 말로 사과하지 못하고 한국말로 했는지 스스로 원망스럽다. 베트남에서 돌아오자마자 베트남 역사책과 회화책 사서 공부하고 있다.
내가 다음에 베트남을 다시 찾아 그들에게 “미안합니다. 용서해 주십시오”라고 베트남어로 말하겠다. “씬 라이, 씬 하이 타떠 초떠이(Xin lỗi. Xin hãy tha thứ cho tôi)라고 말하겠다.
66살인 내가 다시 어학을 할 결심을 하고 베트남어 책을 샀다는 것에 내 스스로도 놀랐다. 그러나 베트남인들이 당했을 고통을 생각하면 내가 멀쩡하게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죄송스러운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베트남 가서 무슨 일을 했는지, 인간이 얼마나 잔인하고 몰염치한지를 새삼 느꼈다.
종교는 친절, 더불어 연민 지녀야
달라이라마는 종교는 친절이라고 했다. 나는 친절과 더불어 연민(자비)를 말하고 싶다. 한국 사회에서 종교가 그 역할을 하고 있는가? 한국 종교는 친절과 연민을 갖추고 있는가? 잘되게 해달라고 빌고, 빌어주고 이런 것에 집중한다. 봉은사를 본보기로 들면, 극락 보내준다며 모시는 재가 전체 수입의 50%, 입시 등 각종 기도가 30%였다.
이미 여러번 지적했다. 공부 못하는 애가 부처님에게 기도를 올려서 대학에 갔다면 그것은 부처님이 부정입학에 관여한 것이다. 지금 같다면 종교가 있어야 하는지 회의를 느낀다.
여러분 마음속에 타인에 대한 친절, 연민의 정이 있어 생활화 했다면 여러분이 스님이고 목사님이 되는 것이다. 내 마음 속에 이기심이 싹트고 나만 잘되길 바라는 것이야말로 사회악이다. 그것이 비리 부패 조장하는 악의 씨이다.
끝도 없이 타인에 대한 연민 자비 키워나가는 사람이 수행자이고, 성인의 가르침 실천하는 진정한 구도자이다.
우리 손에 희생당한 베트남인들
(스님은 베트남을 다녀와서 찍은 사진들로 구성한 프리젠테이션 자료를 대중에게 보였다)
수없이 침략 당했으면서도 파병하지 안했던 우리의 자부심이 베트남 전쟁에서 무너졌다. 우리가 파병한 군인들로 인해 군인들끼리 죽고 죽인 것은 어쩔 수 없다고 해도 국군에 의해 희생된 민간인에 대한 연민을 가져야한다.
국군에 의해 희생된 이들의 가족을 만났을 때 나는 하염없이 눈물만 흘렀다. “미안하다. 잘못했다”는 말 밖에 달리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과거에 대해 우리가 잘못 빌고 용서를 구하지 않는다면 이는 짐승만도 못하다.
1968년 3월 18일, 미군은 베트남 밀라이 마을에서 504명의 민간인을 죽였다. 504명 가운데 여성과 어린이가 350여 명이었다. 이 사건은 한 미국인 종군기자가 만년필 심을 빼고 필름을 숨겨 귀국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민간인을 학살한 미군들은 법정에 섰다. 미국 시민단체는 밀라이 마을에 병원 학교 등을 세워줬다. 학살현장에는 기록을 보관한 박물관도 지어줬다.
미국인들은 지금도 끊임없이 찾아와 참회하고 용서를 구한다. 밀라이 마을에서는 “미국이 전쟁 때는 폭탄으로 폭격하더니 전쟁 후에는 돈으로 폭격한다”는 말도 있다.
죽임 당할거면 국군 아닌 미군에?
미군이 양민을 학살한 그 옆에서는 국군이 양민들을 학살했다. 한국은 외면하고 있지만 베트남인들은 잊지 않고 있었다.
베트남 꽝응아이(Quang Ngai)성에는 ‘한국군 증오비’가 있다. 꽝응아이 성에서만 현재까지 18건의 양민학살 사건이 확인됐고, 1700여 명의 양민이 희생됐다고 한다. 이 가운데 국군이 340여 명을 죽였다고 한다.
베트남인들은 “학살당할 거면 미군에게 당하지 왜 한국군에게 당했느냐”는 자조 섞인 말도 한다. 꽝응아이 지역은 우물도 부족하고 학교도 없고 도로포장도 안 돼 있는 등 낙후돼 있다.
베트남에는 한국군 증오비가 베트남 전역 60여 곳에 있다. 그 내용은 이렇다.
“하늘에 가 닿을 죄악 만대를 기억하리라. 한국군들은 이 작은 땅에 첫 발을 내딛자마자 참혹하고 고통스런 일들을 저질렀다. 수천 명의 양민을 학살하고, 가옥과 무덤과 마을들을 깨끗이 불태웠다.
1966년 12월 5일 정확히 새벽 5시, 출라이 지역에 주둔하고 있던 남한 청룡여단 1개 대대가 출라이 지역으로 행군을 해왔다. 그들은 36명을 쯩빈 폭탄구덩이에 넣고 쏘아 죽였다. 다음 날인 12월 6일, 그들은 계속해서 꺼우안푹 마을로 밀고 들어가 273명의 양민을 모아놓고 각종 무기로 학살했다.
모두가 참혹한 모습으로 죽었고 겨우 14명만이 살아남았다. 미제국주의와 남한군대가 저지른 죄악을 우리는 영원토록 뼛속 깊이 새기고 인민들의 마음을 진동토록 할 것이다. 그
들은 비단 양민학살뿐만 아니라 온갖 야만적인 수단들을 사용했다. 그들은 불도저를 갖고 들어와 모든 생태계를 말살했고, 모든 집을 깨끗이 불태웠고, 우리 조상들의 묘지까지 갈아엎었다. 건강불굴의 이 땅을 그들은 폭탄과 고엽제로 아무것도 남지 않은 불모지로 만들었다.”
베트남인들은 국군의 만행을 잊어서는 안된다고 자장가로 만들어 부르면서 애들에게 가르치고 있다. 이것이 베트남 전쟁의 실상이다.
나는 1972~1973년 베트남에 가 있었다. 전투에 직접 참여는 않았지만 참전군인 명단에 내 이름 올려져있다는 것이 내 인생 최대의 부끄러움이다. 우리 사회에 베트남인들 만난다면 죄 지은 마음으로 배려와 연민의 손길을 내어주길 바란다. (명진 스님이 꼽은? 조계종 허물 2가지 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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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본: http://www.bulkyo21.com/news/articleView.html?idxno=293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