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회] 시민들, 이승만 동상 끌어내다
독재자 이승만 평전/[15장] 4월혁명으로 몰락한 독재자 2012/05/26 08:00 김삼웅
운명의 날 4월 26일이 밝았다.
정부는 이날 새벽 5시를 기해 서울지구에 다시 비상계엄을 선포하여 시위를 봉쇄하려 했으나 시위대는 이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오전 7시부터 3만여 명의 시민이 이승만 하야를 요구하며 시내 중심가로 이동하고, 광화문 거리에 모인 1만 여 시민은 계엄군의 탱크 위에 올라가서 시내를 누볐다. 계엄군 일부가 최루탄과 공포탄을 발사했지만 시민들은 물러서지 않았다. 이날 송요찬 계엄사령관은 이승만을 만나 사태수습과 시민ㆍ 학생대표의 면담을 요청, 오전 9시경 면담이 성사되었다.
이날 남산의 이승만 동상이 시민들에 의해 끌어내려지고 시내 탑동공원의 동상도 끌어내려져 시민들이 동아줄에 묶어 끌고다녔다.
10시 20분경 이승만은 학생ㆍ시민대표와 가진 면담에서 “국민이 원한다면 물러나겠다”고 하야 의사를 밝혔다. 이승만의 하야 발표문은 다음과 같다.
ㅡ. 국민이 원한다면 대통령직을 사임하겠다.
ㅡ. 3ㆍ15 정ㆍ부통령선거에 많은 부정이 있었다 하니 선거를 다시 하도록 지시했다.
ㅡ. 선거로 인한 모든 불미스러운 것을 없애기 위하여 이미 이기붕 의장에게 공직에서 완전히 물러나도록 했다.
ㅡ. 내가 이미 합의하여 준 것이지만 만일 국민이 원한다면 내각책임제 개헌을 하겠다.
이날 오후 1시 이승만은 전국에 대통령직의 하야를 녹음으로 방송하였다. 이승만의 하야를 촉구하는 26일의 시위에서도 사망 24명, 부상 113명이 발생하여 국민의 분노가 다시 들끓었다. 계엄군이 아닌 경찰의 발포로 마지막 날까지 희생자를 낸 것이다. 이승만의 이날 하야 발표가 늦어졌다면 경무대는 시민들에게 포위당하고 그는 어떠한 변을 당했을지 모른다.
4월 27일 오후 3시, 국회는 이승만의 사임서를 즉시 수리하고, 헌법 규정에 따라 허정 수석 국무위원이 대통령권한대행을 맡았다. 장면 부통령이 이승만의 하야를 촉구하고자 사임하여 외무장관 허정이 승계한 것이다.
다음날 오후 경무대 관사 36호실에서 이기붕과 부인, 장남과 차남 등 일가족이 장남 이강석이 쏜 총으로 집단자살하였다. 이기붕 일가의 집단자살에는 의문이 있었다. 모든 책임을 이기붕에게 떠넘기고 이승만을 구하려는 측근들의 소행이라는 주장이 따랐다. 하지만 아직까지 역사는 ‘집단자살’로 기록하고 있다.
이승만은 이기붕 일가의 비극적인 참사 현장을 잠시 둘러보고 경무대를 떠나 걸어서 이화장으로 거처를 옮겼다. 12년 동안 절대권력을 누리다가 전국적으로 186명의 사망자와 6천여 명의 부상자를 남긴 살육을 저질르다가 마침내 시민혁명으로 권좌에서 쫓겨나 사가로 돌아간 것이다. 시민들 중에는 그의 하야 길을 박수로 맞았다. 참으로 ‘선량’한 국민이다.
전 대한매일(현 서울신문) 주필, 제7대 독립기념관장, 성균관대학 겸임교수, 민주화 명예회복과 보상심의위원회 위원, 제주 4.3진상규명과 명예회복위원회 위원, 친일반민족행위진상조사위원회 위원 등을 역임하고, 신흥무관학교 100주년기념사업회 공동대표(현)를 맡고 있다. 독립운동가와 민주화운동에 헌신한 인물의 평전을 집필해 왔다. 역사바로잡기와 민주화ㆍ통일운동에 관심이 많으며 이 분야 저서 30여권을 집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