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회] 90세로 사망, 국립묘지에 묻혀
독재자 이승만 평전/[15장] 4월혁명으로 몰락한 독재자 2012/05/29 14:43 김삼웅
4ㆍ19혁명은 현상적으로는 독재자 이승만과 그 아성 자유당 정권을 퇴진시키는데 성공했지만, 역사적으로는 한민족 최초로 피압박 민중세력이 지배계급을 전복시킨 근대적 시민혁명의 의미가 크다. 한국사는 창업과 반란, 반정ㆍ쿠데타ㆍ역성혁명 등이 여러 차례 있었으나 대부분이 기득권세력 간의 권력교체에 머무르는 수준이었다.
조선 중기 서북지역의 홍경래의 난과 후기 남부지역의 동학혁명이 민초들에 의해 봉기되었으나 관군과 조정이 끌어들인 외세에 의해 무자비한 참살로 막을 내렸다. 민중봉기의 일환이기도 하는 3ㆍ1항쟁 역시 왜적을 축출하지 못한 채 엄청난 희생을 치러야 했다.
1960년 4ㆍ19혁명은 사상 처음으로 학생들에 의해 주도되고 민중들이 참여하여 철옹성과 같은 독재 권력을 타도하는 데 성공하였다. 에리히 프롬은 “집권세력은 화학무기로 무장하고 있는데 민중은 주먹이나 돌멩이밖에 갖고 있지 못한 처지에서는 프랑스혁명과 같은 민중혁명은 불가능하다.”고 말하였다.
1789년 7월 파리 콩코드광장에서 3천여 명의 희생자를 내면서 이루어진 프랑스대혁명 당시에는 지배자나 피지배자나 갖고 있던 무기가 비슷했다. 그렇기 때문에 민중혁명이 가능했다. 동학혁명이나 3ㆍ1항쟁 당시 우리 선대들이 일제에 무참히 짓밟혀야 했던 것은 병기와 화력의 차이때문이었다. 4ㆍ19 당시에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지배층에는 “쏘라고 준 총”이 있었고, 중무장한 경찰병력 수십만 명이 있었고, 그 뒤에는 60만 대군이 포진하였다.
여기에 전국 도처에 수만 명에 이르는 정치깡패들까지 ‘사육’되고 있었다. 다행히 4ㆍ19때는 송요찬 계엄사령관과 조재미 사단장에 의해 계엄군의 발포가 엄격히 금지되었으나, 그로부터 20년 뒤 광주에서는 국군이 국민을 살상하는 만행이 자행되었다.
4ㆍ19혁명은 이승만의 장기집권과 폭정에 저항하면서 남북통일운동의 한 전기를 만들었다.
이승만에 의해 철저히 차단되어온 통일구호가 봇물처럼 쏟아졌다. 이승만은 허황한 ‘북진통일론’을 외치면서 남북협상파ㆍ평화통일 세력을 극형으로 다스렸다. 이승만의 북진통일론은 “통일의 외피를 쓴 반통일운동” (서중석) 이었다. 4ㆍ19는 이 ‘외피’를 벗기는 계기가 되었다.
하와이에 망명한 이승만은 거의 칩거하면서 살았다.
“이박사는 반수(半睡) 상태로 몇 년을 살았다. 산 것도 아니고 죽은 것도 아니고, 아마 이박사의 반수야말로 현대과학으로 해석이 안 된다고 해야 할 것이다. 물론 이박사의 타고난 정력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한 의사의 말에 의하면 이박사의 반수는 산삼을 먹은 때문이라고 한다. 이박사가 대통령으로 권세가 하늘을 찌를 듯 할 때 많은 아첨배들이 산삼을 갖다 바쳤다.” (주석 10)
반수 상태로 몇 해를 더 살았던 이승만은 1965년 7월 19일 하와이 마우나리니 요양원에서 사망하였다.
90년 4개월의 생애였다. 생전에 국내로 돌아오기를 원했으나 박정희 정권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국내에 남아 있는 이승만 세력의 준동을 겁낸 것이다. 이승만의 유해는 국내로 운구되어 국민장으로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장례식날 연도에서 장송하는 인파가 120여 만이라고 언론은 보도했다. 이와 같은 현상에 대해 당시 정치평론가 신상초는 다음과 같이 분석했다.
첫째로, ‘넘버원 맨’으로서 12년 동안이나 군림했던 노독재자가 끝내 조국에 돌아오지 못하고 이역에서 죽은데 대한 인간적인 동정심.
둘째로, 구경거리라면 밥먹기보다 좋아하는 국민의 호기심.
셋째로, 생전에 신격화되어 도저히 접촉할 수 없었던 독재자에 대해 사후라도 접촉해보았으면 하는 서민의 열등자 의식.
넷째로, 이박사 통치시대가 적어도 지금보다 좋았다는 중년층ㆍ노인층의 회구감.
이상 네 가지 사유를 관통해서 그 밑바닥을 흐르고 있는 것은 국민의 낮은 정치의식이다. 죽음은 가장 엄숙한 사실이기 때문에 생자로 하여금 사자 생시에 대한 은원ㆍ애증의 감정을 초월케하고 한없는 관용심을 자아내게 한다. (주석 11)
이승만 영결식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역사를 헤치고 나타나 자기 몸소 새역사를 짓고 또 역사 위에 숱한 교훈을 남기고 가신 조국근대화의 상징적 존재”라고 추켜세웠다. 이승만과 박정희는 인연이 깊었다. 군인 박정희가 남로당 전력으로 사형선고를 받았을 때 이승만은 무기형으로 감형을 시켜주고, 6·25전쟁이 일어나자 군에 복귀시켜 주었다. 박정희는 한때 쿠데타를 모의하여 이승만 타도에 나선 바도 있었다. 생존 이승만의 귀국을 반대했던 박정희는 막상 그가 사망하자 극존의 영결사를 한 것이다.
이승만의 파란만장한 90년 생애는 이렇게 하여 영욕의 삶을 접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그가 망명한 뒤 허정 과도정부에 의해 국정이 운영되어 6월 15일 국회는 내각책임제 개헌을 통과시키고 7월 29일 민ㆍ참의원 총선거를 실시, 민주당이 과반수 의석을 차지했다. 8월 13일 윤보선 대통령이 취임하고 총리에 장면이 인준되어 마침내 민주정부 제2공화국이 수립되었다.
주석
10> 경향신문사, <여적>,67~68쪽.
11> 신상초, <밖에서 본 이승만 박사>, <신동아>, 1965년 9월호.
전 대한매일(현 서울신문) 주필, 제7대 독립기념관장, 성균관대학 겸임교수, 민주화 명예회복과 보상심의위원회 위원, 제주 4.3진상규명과 명예회복위원회 위원, 친일반민족행위진상조사위원회 위원 등을 역임하고, 신흥무관학교 100주년기념사업회 공동대표(현)를 맡고 있다. 독립운동가와 민주화운동에 헌신한 인물의 평전을 집필해 왔다. 역사바로잡기와 민주화ㆍ통일운동에 관심이 많으며 이 분야 저서 30여권을 집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