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산도에선 상하이에서 우는 닭소리가 들린다?
[고래의 섬, 흑산도] 고대 국제해양플랫폼, 흑산도
17.06.20 15:27l 이주빈(clubnip)
사람들은 '고래'하면 동해나 울산, 장생포만을 떠올립니다. 하지만 홍어로 유명한 전남 신안군 흑산도에 '고래공원'이 있습니다. 흑산도와 고래는 어떤 특별한 인연이 있을까요? 왜 흑산도에 고래공원이 생긴 것일까요? 대체 흑산도에선 고래와 관련한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이 연재는 흑산도와 고래의 연관성을 좇는 '해양문화 탐사기'입니다. - 기자 말
▲ 해무에 안긴 흑산도 예리항 전경. 철마제를 지냈던 상라산 전망대에서 찍은 모습이다. ⓒ 이주빈
목포항을 출발한 여객선이 도초도와 비금도를 벗어나자 선장의 안내방송이 흘렀다. 반복되는 일상인 듯 선장의 목소리에선 다소 지루함이 느껴졌다.
"지금부터는 서해남부 먼바다입니다. 파고(波高)가 2미터 이상으로 높게 일 것으로 예상됩니다. 여행객 여러분께서는 지정된 자리에서 절대 이동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잠시 후, 선장의 말처럼 파도는 쾌속여객선을 흔들어대기 시작했다. 파도에 부딪힌 여객선은 하늘 높이 솟았다가 바다 속으로 곤두박질치기를 반복했다. 그리고 날개 꺾인 새처럼 평형을 상실한 채 좌우로 끝없이 요동쳤다.
상하좌우로 어그러진 불규칙한 신호가 몸을 어지럽혔다. 멀미 기운이 돌았다. 균형을 잡으려 수평선과 시선을 맞추려 해 보았지만 쉽지 않았다. 불일치, 여객선은 수평선과 계속 어긋나며 빠르게 스쳤다. 그렇게 어긋나 버린 빠른 스침은, 먼바다로 나아가는 게 아니라 육지로부터 도망가는 것 같은 불쾌한 느낌을 주었다. 운명처럼 섬에서 태어나 늘 먼바다를 넘나들고 살지만, 이렇듯 먼바다로 들어가는 길은 언제나 고통스런 의례다.
'먼바다'는 육지 사람들에겐 생소한 단어다. 한반도 해안선을 기준으로 20km 이내에 있는 동해와 40km 이내에 있는 서해·남해를 근해(近海) 즉 '가까운 바다'라고 부른다. '먼바다'는 가까운 바다 너머에 있는 바다로, 한반도 육지로부터 동해는 20km 밖에, 서해·남해는 40km 밖에 있다.
바다 너머 바다인 먼바다를 건너 찾아가는 곳은 흑산도. 목포에서 약 92.7km(50해리)나 떨어진 서남해 외딴 섬이다. 지금은 '산과 바다가 푸르다 못해 검다'해서 '흑산(黑山)'이라 하지만 한 때 흑산은 '월산(越山)'으로 불렸다.
대개의 경우 지명은 닮은 형상을 빗대 짓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흔히들 하는 것처럼 달 월(月)자를 써 '월산(月山)'인가 했더니 넘을 월(越)자를 써 '월산(越山)'이란다. 산 너머 바다라는 말인가, 바다 너머 산이라는 말인가. 이토록 지독하게 섬의 정체성과 일치하는 섬 이름이 또 있을까.
섬은 바다라는 자궁 안을 떠도는 별이다. 늘 그 어떤 '너머'를 꿈꾸지만 늘 그 안에 갇혀 사는 아련한 운명을 지니고 태어났다. 그래서 섬은 본능적으로 표류를 획책한다. 수평선 너머 어딘가를 하염없이 동경하는 월경(越境)의 슬픈 물매, 그것이 바로 섬이다.
▲ 구비구비 휘어진 일주도로가 지금은 흑산도 명물거리가되었지만 저 도로 아래동네 읍동은 중국사신 등이 묵어가던 관사가 있었던 국제 포구였다. ⓒ 이주빈
섬이 이도저도 다른 것들이 쉽게 만나 어울릴 수 있는 플랫폼 구실을 하는 까닭도 섬의 이 슬픈 본성 때문이다. 다른 섬과 마찬가지로 흑산도도 예나 지금이나 플랫폼 구실을 톡톡히 하고 있다. 특히 고대 해양항로에서 흑산도는 일본과 한반도 그리고 중국을 잇는 매우 중요한 '국제 해양플랫폼'이었다.
동북아시아 해양플랫폼으로서 흑산도가 제 이름을 달고 구체적으로 언급된 첫 문서는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다. 이 책은 일본 천태종 3대 좌주(座主) 가운데 한 명인 엔닌(圓仁) 스님이 847년에 쓴 것이다. 장보고 선단의 도움을 받아 당나라 유학을 마치고 일본으로 돌아가던 그에게 흑산도는 특별한 중간기항지였다.
"흑산도는 백제 삼왕자(세 번째 왕자)가 도망해서 피난한 곳이라 한다. 그곳엔 수백 호가 살고 있다고 한다."
18세기 중반에 씌여진 이중환의 <택리지(擇里志)>에도 국제 해양플랫폼으로서 흑산도의 위치가 언급돼 있다. 이중환은 흑산도-홍도-가거도를 거쳐 중국 닝보(寧波)까지 바람을 잘 만나면 사흘밖에 걸리지 않는다고 썼다.
"신라에서 당나라로 조공 갈 때 모두 이 고을(나주) 바닷가에서 배로 떠났다. 바닷길로 하루 가면 흑산도에 이르고, 흑산도에서 또 하루 가면 홍의도(홍도)에 이른다. 다시 하루를 더 가면 가거도에 이르며, 북동풍을 만나 3일을 가면 태주 영파부 정해현에 도착하게 되는데, 실제로 순풍을 만나기만 하면 하루만에도 도착할 수도 있다."
- 이중환 <택리지> '전라도 나주조(羅州條)' 중에서
흑산도와 홍도, 가거도 등 흑산군도(黑山群島)에 속하는 섬들엔 유독 중국과 연관된 전설들이 많다. 전설의 태반은 상하이에서 우는 닭소리가 들린다는 거다. 순풍을 타면 하루거리라는 중국 닝보 인근이 상하이. 흑산도 사람들에게 중국은, 닭 우는 소리 들리는 옆 동네였을 뿐이다.
▲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흑산도, 홍도, 가거도를 거쳐 사흘이면 중국 상하이 인근 닝보에 도착한다고 기록했다. 지도를 보면 순풍과 해류를 타면 흑산군도 중 하나인 가거도에서 닝보가 그리 멀지 않은 거리임을 절로 알 수 있다. ⓒ 구글 지도 갈무리
12세기 송나라 사신 서긍(徐兢)이 남긴 기록은 매우 구체적이고 생생하다. 그는 남방항로를 통해 고려 개경을 방문하면서 흑산도 이야기를 썼다.
"흑산은 처음 바라보면 극히 높고 험준하다. 가까이 다가서면 첩첩이 쌓인 산세를 볼 수 있다. 앞의 한 작은 봉우리는 가운데가 동굴같이 비어 있고 양쪽 사이가 만입(灣入)했는데, 배를 감출 정도이다. 옛날에는 바닷길에서 이곳은 사신의 배가 묵었던 곳이어서, 관사가 아직 남아 있다. 그런데 이번에는 여기서 더 이상 정박하지 않았다.
거기에는 주민들이 사는 마을이 있다. 고려에서 큰 죄인이지만 죽음을 면한 자들이 대부분은 이곳으로 유배되어 온다. 중국 사신의 배가 이르렀을 때 밤이 되면 산 정상에서 봉화를 밝히고 여러 산들이 차례로 서로 호응하여서 왕성(王城 , 개경)에까지 가는데, 그 일이 이 산에서부터 시작된다. 신시(오후 5시)가 다되어 배가 이곳을 지나갔다."
- 서긍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 중 '제35권 해도(海道) 2, 흑산(黑山)' 중에서
서긍의 기술을 통해 우리는 흑산도와 관련한 몇 가지 역사적 사실을 파악할 수 있다. 우선 당시 흑산도는 사신의 배가 묵을 정도로 고대 한·중 뱃길의 중요한 경유지였으며, 사신들이 묵을 수 있는 관사까지 남아 있었다는 것이다. 사신들의 행차는 당시 통신체계인 봉화를 통해 개경까지 곧바로 보고되었다는 것도 파악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당시 흑산도는 고려의 죄인 중에서도 죽음을 면한 중죄인들이 귀양을 오는 유배지였음을 알 수 있다.
서긍의 기술은 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원이 1999년 실시한 발굴 조사를 통해 사실로 확인되었다. 연구진은 흑산도 읍동 일명 '해내지골' 일대에서 관사지로 추정되는 곳을 발견했다. 그리고 '무심사선원'이라는 절터를 찾아냈다. 또한 해발 226미터 상라산 정상에서 제사터와 봉수터로 추정되는 곳을 확인하였고, 그 일대에서 철제마 등 제사 관련 유물도 발굴했다.
▲ 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원은 지난 1999년 흑산도 읍동 일대에서 사신이 묵어가던 관사지 터와 무심사 선원 터 등을 확인하였다. 무심사선원 터엔 석등과 석탑 등이 남아있다. ⓒ 이주빈
철마(鐵馬)는 이승에 사는 사람들의 소원과 기도를 하늘로 실어 나르는 역할을 한다. 고대 한·중·일 교역항로의 중간 기착지 역할을 했던 흑산도. 그때 흑산도 사람들은 철마에 어떤 기도를 실어 하늘로 보냈을까. 전설만큼이나 서러웠을 기도는 철마를 타고 파도처럼 아스라이 사라졌을 테다.
섬 하나 보이지 않던 먼바다를 한 시간 동안이나 출렁이며 건너던 여객선이 흑산도에 도착했다. 언제나처럼 가수 이미자가 부르는 <흑산도 아가씨>가 여객선터미널 스피커를 타고 푸르다 못해 검은 흑산바다로 흩어졌다. 흥이 더해진 여행객들이 노래를 따라 부르는 사이사이로 깊은 바다처럼 표정이 없는 얼굴을 한 흑산도 주민들이 여객선 플랫폼을 빠져나갔다. 훅 '짠내'가 밀려왔다.
▲ 먼바다를 건너온 쾌속여객선이 흑산도 예리항에서 고단한 몸을 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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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산도에는 왜 천주교 신자가 많을까? / 신안 흑산도 사리마을 옛담
15.12.15 16:25l최종 업데이트 15.12.15 16:25l 김정봉
초속 9m바람, 파고 2.5m. 바로 전 배는 결항됐다. 파고 3.5m까지만 배가 뜬다니 2.5m는 보통 높은 파고가 아니다. 3.5m정도는 숙련된 섬사람들만 다닐 수 있고 섬사람들조차 이런 날에는 안 움직인단다. 흑산도에서 처음 만난 '얼굴 검은' 섬사나이가 나에게 대견하다며 위로 아닌 위로 말을 건넸다.
흑산도 가는 길
▲ 흑산도 심리(지푸미) 바다 흑산도는 검은 섬. 상록수림이 우거져 검게 보인다는 건데 그보다는 보는 사람 마음에 달렸는지 모른다 ⓒ 김정봉
도초도 여객터미널에 흑산도행 쾌속선을 타려는 사람들이 나와 아내 빼고 한두 사람밖에 없었다. 터미널매표소에서 일하는 인상 좋은 도초도 아주머니는 집에서 따왔다며 검정비닐에서 단감을 주섬주섬 꺼내 권한다. 그러면서 혹시 멀미약 먹었냐며 이런 날씨에 흑산도에 갔다 고생한 얘기를 생생하게 들려주었다. 배 떠나기 5분 전에 들은 얘기라 어찌할 수도 없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했다. 그냥 몸으로 때우는 수밖에.
배 떠난 지 20분. 이때까지는 정신 차리고 배 리듬에 맞춰 내 몸도 움직여가며 겨우 겨우 참아냈으나 더 이상 참지 못했다. 배는 출렁, 내 배는 울렁거렸다. 배는 위에서 떨어지고 옆으로 휘어졌다. 반대쪽 창문은 바다가 창을 덮어 하늘이 보이지 않았다. 다산(茶山)이 말한 대로 이빨이 산과 같은 고래가 배를 삼켰다 뱉었다 하는 듯하였다.
이제 다 왔으니 참으라는 '멀미약 먹은' 아주머니 말이 야속하게 들렸다. 섬에 가까울수록 파고는 잔잔해진다고 위로하는 승무원 말은 내 귀에 들리지 않았다. 내 배는 내 몸이 아니었다. 뒤에 앉은 아주머니는 '오, 주여'라 외치더니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모든 것을 개워버렸다. 이게 신의 뜻인지 모르겠다. 한두 차례 개워내니 속이 편해지고 참을 만 해졌으니 말이다.
검은 섬, 흑산도
바다도, 하늘도, 산도 온통 검게 보인다는 흑산도. 상록수림이 많아 그렇게 보였다는 건데, 그보다는 보는 이의 마음에 달려있지는 않은지. 샛노랗게 질린 내 몸으로 보는 흑산도는 여지없이 검은 섬이요, '못 견디게 그리운 아득한 저 육지를 바라보다 검게 타버린, 검게 타버린' 이미자의 흑산도아가씨에게 흑산은 검은 섬이다.
나주 율정점에서 동생 다산과 헤어져, 살아서 밟지 못할 육지를 떠나는 정약전에게 흑산은 새까맣게 타들어가는 자신의 가슴 마냥 '숯검댕이' 섬으로 보였을 게다. 흑산 대신 자산(玆山)이라 불러본들 흑산이 백산될까마는 집안사람들에게 흑산이라 말하기 싫어한 약전이다.
▲ 상라산 고개에서 본 흑산 바다 흑산은 깊다. 논밭은 고사하고 흔한 갯벌도 없다. 흑산 삶은 밭 대신 바다에 의존해 살아야하는 바다인생이다 ⓒ 김정봉
한 뙈기 논밭도 귀한 흑산도, 개펄은커녕 갯벌도 없다. 섬사람들에게 바다는 그냥 바다다. 논밭 대신 바다다. 먼 바다에 아들, 남편 내보내고 애태우는 섬사람들에게 흑산도는 검은 섬이다.
신의 마을, 흑산도 진리
▲ 진리마을 정경 흑산면 면소재지로 흑산의 중심지다. 시대를 달리하며 여러 종교가 마을사람들과 함께 했다. 사진 오른쪽 흰 건물 뒤가 당산이다 ⓒ 김정봉
마음 졸이고 가슴 태우는 흑산 섬사람들에게 신앙은 삶이요, 일상이다. 토속신앙에서 불교와 천주교, 개신교까지 흑산도의 길목, 진리(鎭里)에 자연스레 뿌리내렸다. 진리 언덕에 흑산성당이 있고 진리 당산(堂山)에 진리당이 있으며 읍동마을 근처에 무심사터가 전한다. 교회도 한자리 차지하여 흑산성당 옆에 진리성결교회가 자리 잡았다.
▲ 흑산진리성결교회 흑산성당 옆에서 진리 앞바다를 바라다보며 서있다 ⓒ 김정봉
섬 마을에 교회는 유독 많다. 흑산도에 15개가 있고 흑산도 주변 섬까지 합하면 30개가 넘는다. 도초도에 11개, 비금도에는 23개나 있다. 마을마다 하나 이상 있는 셈. 당집이 사라진 것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당집이 스러지면서 교회가 들어섰다.
흑산성당 아래 양팔을 벌리고 서 있는 하얀 예수상이 눈길을 잡는다.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 있는 예수상을 닮았다. 1958년에 설립된 흑산성당 건립 50주년을 기념하여 브라질 예수상을 본떠 만든 것이라 들었다. 흑산도를 오가는 길손에 따스한 손길을 보내고 있다.
▲ 흑산성당 예수상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 코르코바도산 정상에 있는 예수상 닮았다. 양팔 벌려 먼 바다 오가는 뱃사람들을 위로하고 있다 ⓒ 김정봉
흑산에는 천주교인이 많다. 성당만 해도 흑산성당을 비롯하여 공소만 6개나 된다. 2013년 기준, 신자비율은 23.9%. 4587명 주민 가운데 신자수가 1097명이다. 2005년에는 훨씬 높았다. 주민 3204명, 신도수 1165명으로 36.4%였다.
2005년 대비 신도비율이 13%p 떨어진 이유는 2006년에 흑산면에 거주하는 주민들에게 운임지원책이 실시되어 전입인구가 갑자기 늘어났기 때문이다. 이를 감안하면 실질 신자비율은 30%를 웃돈다(연도별 주민, 신도수는 천주교광주대교구 자료 참조).
▲ 흑산성당 흑산천주교본당으로 1958년에 건립되었다 ⓒ 김정봉
▲ 사리공소 정약전이 유배된 사리마을에 1957년에 지어진 공소(公所)다. 공소라 신부가 상주하지 않는다 ⓒ 김정봉
천주교인이 많은 데는 정약전의 영향이 컸다. 비록 유배당시에는 배교자였지만 정약전의 유배로 천주교 터전이 마련된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이런 토양 위에 1951년 천주교가 흑산에 전파되기 시작하였다.
이때 가톨릭구제회(C.R.S)의 도움으로 집집마다 옥수수와 밀가루, 우유가 배급되고 60년대 들어서 중학교 무상교육과 무상급식이 실시되었다. 신앙은 곧 섬사람들의 일상이요, 삶이었다. 신앙과 일상, 삶이 하나로 연결되는 독특한 신앙문화가 형성되면서 천주교가 흑산에 깊고 폭 넓게 뿌리내리게 되었다.
섬사람들 마음에서 멀어져가고 있지만 토속신앙은 흑산 역사와 함께했다. 마을 언덕배미 당산(堂山)에는 당신(堂神)을 모신 당집, 진리당(鎭里堂)과 용신당(龍神堂)이 있다. 흑산도 15개, 흑산면 22개 당집의 본당 격이다. 솔숲, 노송아래에 있는 것이 상당(上堂), 진리당이고 솔숲 안쪽, 바다가 바로 내려다보이는 곳에 있는 것이 하당(下堂), 용신당이다.
▲ 진리당산, 진리당 당신(堂神)을 모신 진리마을 상당(上堂) 당집이다. 상당의 주신으로 당각시를 모신다 ⓒ 김정봉
▲ 용신당 진리당에서 150m떨어져 있다. 진리당의 하당(下堂)으로 총각화장이 좌정되어있다. ⓒ 김정봉
어둑한 저녁 무렵, 당각시와 총각화장(火匠, 배에서 밥 짓는 사람), 두 개의 당산신화가 더해져 용신당 가는 숲길은 음산하다. 먼 바다에 나간 남편이 풍랑 통에 죽자 산꼭대기 노송에 목맸다는 당각시 원혼과 옹기 팔러 진리에 왔다가 당각시의 사랑을 받은 나머지 떠나지 못하고 노송에 올라 솔피리만 애달피 불다 떨어져 죽었다는 총각화장의 원혼이 떠도는 듯하다.
총각원혼의 솔피리 소리가 구슬피 들리는 듯하고 용신당 아랫녘 숲속에서 자생하는 초령목(招靈木)은 영을 부르는 듯 부르르 떨어 스산하다. 노약자나 여성들은 일몰 후, 일출 전까지 혼자서 당산 숲을 다니지 말라는 주의문구는 나에게도 예사로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정월 초 마을사람들이 당각시와 총각화장, 두 원혼의 신체(神體)를 진리당과 용신당에 모셔놓고 혼을 달래며 당제를 지낸다니 괜찮을 거야. 속으로 마음을 다잡았다.
흑산의 중심, 진리에 당집과 성당, 교회가 있는데 절이 빠진다면 서운한 일이다. 흑산도에서 제일 오래된 진리 읍동마을 남쪽, 상라산 올라가는 길목에 무심사터가 있다. 오래된 팽나무 한그루와 삼층석탑, 석등만 전하나 최근 발굴작업으로 사세(寺勢)가 속속 확인되고 있다. 4동의 건물지가 확인되고 건물 규모 또한 상당하여 예사롭지 않았던 모양.
▲ 무심사터 흑산 최고의 마을, 읍동마을 근처에 있는 통일신라 절터로 삼층석탑과 석등만 남아있다. ⓒ 김정봉
흑산도는 통일신라에서 고려까지 한·중·일을 잇는 국제교역 기항지였다. 단순히 긴 뱃길에 한번 쉬어가는 징검다리 섬이 아니었다. 무심사는 국제적으로 활동하는 뱃사람들의 무사귀환과 안전 운항을 빌고 먼 바다에 나가는 두려움을 떨치는 안식처였다.
진리 앞바다를 보고 서있는 당집과 절, 성당, 교회는 먼 바다를 오가는 뱃사람들에게 소중한 존재들이다. 섬사람들에게 믿음은 종교를 넘어 그들의 삶이요, 일상이다. 크든 작든 시대를 달리하며 검게 탄 흑산 사람들의 마음을 달래고 다독여 왔다.
○ 편집ㅣ최은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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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리항 흑산도 관문 예리항의 항공 사진 ⓒ 이재언
▲ 사리에 있는 서당 정약전과 서당 ⓒ 이재언
▲ 상라산 일주도로 항공사진 ⓒ 이재언
▲ 해안일주도로준공기념비가 날개를 단 천사의 모습 25.4km의 흑산도 일주도로는 1984년 첫 삽을 뜬 이후 27년 만인 2010년 3월에야
비로소 개통되었다. ⓒ 이재언
▲ 부촌인 사리포구 전경 남쪽에 위치한 사라는 멸치잡이와 어선어업이 성행한다. ⓒ 이재언
▲ 천촌리 최익현 선생 비석 면암 최익현 기념비 ⓒ 이재언
▲ 흑산도 아가씨 비석 상라산 중턱에 있는 노래비석 ⓒ 이재언
흑산도를 떠나면서 / 13.09.07 10:19l 이재언
전통과 민속과 문화와 역사가 살아 숨쉬는 땅 흑산도, 유배와 절망의 땅이었던 흑산도는 바닷물도 푸르다 못해 검게 변한 곳이다. 이제 쾌속선이라는 문명이 들어와 전통과 현대가 함께 어울려져서 수많은 사람들이 흑산도를 찿고 있다. 파시로 오랫동안 흥청거리던 섬, 해변에 즐비하게 서 있는 생선가게, 식당, 술집. 선구점, 여관, 다방 등등 잡다한 점포들을 지나 흑산도를 떠나기 위해 부두로 나왔다. 지금은 한가롭기 그지없는 항구지만 파시로 흥청 거리던 오래된 항구답게 잔재들이 여기저기 널려있다. 조기와 고등어, 고래, 삼치, 홍어가 떠난 흑산도, 그들의 회유를 기다리며, 수천척의 어선들과 수백명의 술집, 다방 등의 종업원들이 다시 흑산도로 돌아오기를 기다리면서 뱃고동이 울어 대는 여객선을 향하여 발걸음을 제촉하였다. 조기가 떠난 자리에 관광객들이 드나들기 시작하여 다행이다. 앞으로 더욱 많은 관광객들이 이곳에 오기를 바라면서 흑산도를 떠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