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시대 최고의 목소리 김세원이 말하는 법정 스님과의 인연

 

 

나는 천주교 신자다. 하지만 종교를 초월해서 언제나 법정스님의 책을 통해 영혼의 산소를 공급 받았다. 법정 스님이라는 시대의 스승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큰 행복인가를 그 분의 책을 읽을 때마다 느꼈다. 특히 [무소유]를 읽을 때의 감동은 너무나 깊은 것이었다.

 

당시는 CD라는 것이 나오기도 전이어서 LP판을 쓰던 시절인데, 검고 커다란 LP판에 내 목소리로 그 책을 녹음해서 영원히 보존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존경과 오디오 북에 대한 소망을 안은 채 시간이 흘러 1993년이 되었다. 그해 MBC-TV에서는 우리는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가라는 법정스님의 다큐멘터리를 제작했고, 나는 해설자로 참여하게 되었다. 법정스님과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로부터 또 10년의 시간이 흘렀다. 2003년 여름, 이젠 정말 스님의 오디오 북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으로 길상사를 찾았다. 법정 스님은 김세원 씨가 한다면 해야지하시며 책을 여러 권 내어 주셨다. 막상 책을 받고 나니까 머리와 가슴이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잘해야 할텐데, 완벽해야 될텐데, 어떻게 하면 법정 스님을 존경하는 내 마음을 잘 담을 수 있을까.. CD가 나오는 데는 4년이 걸렸다. 녹음한 CD를 드렸을 때 법정 스님은 말씀하셨다. ‘수고하셨어요. 나는 생각도 못했는데 김세원 씨가 이렇게 다 해줘서 고맙고 기쁘네요. 앞으로도 계속해서 해 보세요.’ ‘계속해서 해 보세요하는 말씀에 나는 안도했다. 마음을 다해서 만들었으나 최선의 작품이 안나 오면 어쩌나 고심했던 이 CD가 스님께 그다지 맘에 안 드신 것은 아닌 작품으로 여겨졌다는 생각이 든다.

 

법정 스님이 클래식을 좋아하시기 때문에 배경 음악은 모두 귀에 익은 클래식으로 썼다. 4년 동안 다듬어진 마음이 CD 안에 잘 녹아서, 법정 스님이 전하시는 맑고 향기로운 말씀이 많은 사람들에게 퍼져 가기를 바란다. 연꽃 향기처럼...

 

1. 세상의 어머니들에게 [새들이 떠나간 숲은 적막하다.]

 

이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창조력을 지닌 이는 곧 어머니입니다. 생명을 가진 사람을 만들어 내기 때문입니다. 어머니는 우주의 생명력을 사랑으로 빚어 탄생시킵니다. 이런 창조의 능력을 지닌 어머니이므로 삶을 아름답게 가꾸는 일도 어머니들의 차지가 되어야 합니다.

 

가정의 중심은 더 말할 것도 없이 어머니이지요. 어머니가 계시지 않으면 집에 훈기가 없습니다. 집은 아버지가 가꾸지만 집안은 어머니가 다스립니다. 어머니는 당초부터 어머니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식을 낳아 기르는 과정에서 어머니가 됩니다. 한 사람의 어진 어머니는 백 사람의 교사에 견줄 만하다고 합니다. 그러니 인류 역사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치는 분들도 그 원천을 따져 보면 어머니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으로서 갖추어야 할 예절과 덕성을 길러 주고, 작은 일에서부터 책임감을 심어 주는 일이 긴요합니다. 작은 풀꽃의 아름다움에 눈길이 가도록, 그래서 자연의 신비에 마음이 열리도록 이끄는 것도 어머니들의 할 일입니다. 문제는 어떤 상황 아래서건 한 인간으로서, 대지의 어머니로서 자신의 영혼과 함께 성숙해지는 일입니다. 부처님 오신 날, 세상의 모든 어머니들께서 두루 복 받으십시오. 어머니들, 감사합니다.

 

2. 정직과 청빈 [새들이 떠나간 숲은 적막하다]

 

어떤 개인의 소유라 할 지라도 크게 보면 이 우주의 선물이다. 선물이란 감사히 받아 값있게 쓸 때 빛이 나고 묵혀 두면 썩게 마련이다. 그러나 그 선물을 욕심 사납게 독차지하거나 잘못 관리하면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당장 회수를 당한다. 이것이 우주 질서요 이 세상의 어김없는 도리다. 신이 존재하고 인과의 법칙이 엄연히 존재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대지는 그 누구에게도 소속될 수 없다.

 

땅은 수많은 생물들과 함께 우리 인류가 오랜 세월을 두고 땀 흘려 일 구고 가꾸고 거두어들이면서 의지해 온 삶의 터전이다. 그리고 우리가 살만큼 살다가 언젠가는 돌아가 묻힐 곳 또한 이 대지다. 우리는 이 대지 앞에서 항상 나그네로서 겸손함을 지녀야 한다.

3. 부드러움이 단단함을 이긴다 [홀로 사는 즐거움]

 

그토록 부드럽고 겸손하던 물이 어떻게 저리 사나울 수 있을까? 그 부드러움이 어떤 힘을 받으면 저토록 거세고 강해지는가? 약한 것이 강한 것을 이긴다는 그 뜻이 여기에 있구나 싶었다. 이 말을 뒤집어 보면 모성적인 부드러움과 온유함과 너그러움이 뭇 생명을 구원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병든 현대 문명도 결국은 모성적인 부드러움과 따뜻함으로써만 치유될 수 있다는 소식이다. 부드러움이 강한 것을 이긴다는 이 교훈은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의 길에도 깨우침이 될 것이다.

 

노자도 일찍이 말했다. `가장 착한 것은 물과 같다.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하면서도 다투지 않고 사람들이 싫어하는 곳에 처해 있다. 그러므로 물은 도에 가깝다.’

 

4. 시간 밖에서 살다 [오두막 편지]

 

사람이 시계를 발명한 이래 시간을 유용하게 활용하여 사회생활에 여러 가지로 보탬이 된 것은 지난 인간의 역사가 이를 증명해 주고 있다. 그러나 한편, 시계에 의존하면서부터 사람들은 늘 시간에 쫓기면서 살아야 하는 폐단도 있다. 시계가 가리키는 시간의 굴레에서 벗어나자 나는 비로소 자주적인 삶에 한 걸음 다가선 기분이었다. 돌이켜 보니 내가 그 동안 얼마나 많이 시간의 노예가 되어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부질없이 살았는가 싶은 생각도 들었다.

 

세상살이에 경험이 많은 지혜로운 노인은 어떤 어려운 일에 부딪칠 때마다 급히 서두르지 말고 좀 더 기다리라고 일러준다. 한 고비가 지나면 좋은 일이 됐건 언짢은 일이 됐건 안팎의 사정이 달라지는 수가 많다. 노인들은 풍진 세상을 살아오는 과정에서 시간의 비밀을 터득했기 때문이다.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일수록 조급히 해결해 버리려고 서두르지 말고, 한 걸음 물러서서 조용히 이모저모를 살펴보는 것이 지혜로운 해결책이 될 것이다. 시간 밖에서 우리 만날 수 있기를 바란다.

 

5. 산천초목에 가을이 내린다 [오두막 편지]

 

버릴 때는 미련 없이 버려야 한다. 언젠가는 이 몸뚱이를 버릴 거라고 생각하면 미련이나 애착이 생기지 않는다.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것이 인생살이 아닌가. 현재의 나에게 참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없어도 좋을 것이 무엇인지 스스로 물어 봐야 한다.

 

버리고 또 버리고 마지막으로 남는 것이 무엇이겠는가. 그것이 바로 그 인생의 내용이고 알맹이가 될 것이다.

 

나무들은 가을이면 걸쳤던 옷을 훨훨 벗어 버린다. 그래서 그 자리에 새 옷이 돋아난다. 이런 나무들처럼 너절한 허섭스레기들을 아낌없이 치워 버리고 나면 그 자리에, 텅 빈 그 자리에 비로소 맑은 기운이 감돈다. 이 맑은 기운이 오늘의 나를 새롭게 한다.

 

수행자는 한평생을 자기 자신을 변화시키는 데 바쳐야 한다.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그 삶에 변화가 없다면 그의 인생은 이미 녹슬어 있는 거나 다름이 없다. 계절의 변화는 우리 삶에도 변화를 가져올 수 있어 고맙다. 산천초목에 가을이 내리고 있다. 이 가을에 당신은 어떤 변화를 시도하고 있는가. 부디 좋은 이삭 거두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