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中國)의 고대국가(古代國家)

- 은(殷)나라, 주(周)나라,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 -

은(殷)나라와 주(周)나라의 세력 범위

중국의 역사 기원전 1600 ~ 기원전 206

기원전 1600 ~ 기원전 1046

상()은()

기원전 1046 ~ 기원전 256

주()

서주(西周)

동주(東周)/춘추전국(春秋戰國)

춘추(春秋)

전국(戰國)

기원전 221 ~ 기원전 206

진()
후초(後楚)

 


(商) 왕조를 건립한 성탕(成湯) 임금의 초상화

(), ()나라에 대하여...


중국(中國) (, 기원전 1600년경~기원전 1046년경)나라는 역사적(歷史的)으로 실제로 존재했다고 여겨지는 최초(最初)

중국 왕조(中國王朝)랍니다. 지금부터 약 100년 전 '안양(安陽)'이라는 곳을 발굴(發掘)한 결과 문자(文字)가 새겨진 수많은

갑골(甲骨)< 거북 등껍질(甲)과 짐승의 뼈(骨)>, 질 좋은 청동기(靑銅器), 아름다운 토기(土器), 일반인들의 집터, 무덤(),

궁궐(宮闕)의 모습이 차례로 드러나게 되면서 전설(傳說)로만 전해지던 상()나리의 역사(歷史)가 실제(實際)

존재(存在)했음이 증명(證明)되었답니다. 


()나라의 제19대 왕() 반경(盤庚, 재위: 약 기원전 1300~기원전 1277년 추정)이 옮긴 마지막 도읍(都邑)이 은()이기 때문에,

()나라라고도 부른답니다. ()나라의 시조(始祖)에 대한 의견은 분분(紛紛)한데, 기록에 의하면 중국(中國)

국가 형성(國家形成)과 관련된 신화(神話)에 나타나는 삼황오제(三皇五帝) 가운데 하나인 황제(黃帝, ?~?)의 후손(後孫)

성탕(, ?~기원전 1588년?) 왕(王)이 세웠다고 전해진답니다 

 

(, 기원전 2070~기원전 1600)나라 마지막 천자(天子)인 걸왕(桀王, ?~?)이 왕조(王朝)를 망()

직접 원인(直接原因)은 여느 정권과 마찬가지로 미녀(美女)와 간신배(奸臣輩)때문이었답니다.

그는 조량(趙梁)이라는 간신(奸臣)의 말만 믿고 어질고 현명(賢明)한 신하(臣下)들을 모조리 처형(處刑)했답니다.

걸왕(桀王)원수(怨讐)유시씨(有施氏)를 정벌(征伐)하려 하자 유시씨(有施氏)가 그의 딸 말희(末喜)를 바쳤는데,

미색(美色)이 매우 뛰어나 걸왕(桀王)말희(末喜)라는 미녀(美女)에 현혹(眩惑)되어 밤낮 음란(淫亂)함에 빠졌고 연락(宴樂)으로

세월(歲月) 가는 줄 몰랐고, 그녀의 말이라면 모든 것을 다 들어주었답니다.

걸왕(桀王)은 말희(末喜)를 기쁘게 해주기 위하여 대궐(大闕) 안에 경궁요대(瓊宮瑤臺)를 짓고 대대적인 조경용(造景用)

토목공사(土木工事)를 일으켜 백성(百姓)들을 강제 동원(强制動員)했답니다. 그렇게 만든 정원(庭園)에 연못을 파고

오색영롱(五色玲瓏)한 봉황(鳳凰)모양의 화방(畵舫)을 띄워 뱃놀이를 즐겼답니다.

천자(天子)가 이처럼 백성(百姓)을 돌보지 않고 사치(奢侈)와 음란(淫亂)에 빠지자 민초(民草)들의 삶은 극도로 피폐(疲弊)해졌고

아사자(餓死者)자가 속출했답니다. 이러고도 나라가 무사(無事)할 리 없었답니다.

이때 하남성(
河南省)에 근거지를 두고 은인자중(隱忍自重)하면서 힘을 길러오던 제후(諸侯)가 한 사람이 있었으니

성탕(成湯, ?~기원전 1588년 추정)이었답니다.

그는 민심(民心)이 이미 걸왕(桀王)에게서 멀리 떠났음을 알고 15000의 군대(軍隊)를 이끌고 대궐(大闕)로 쳐들어가 걸왕(桀王)

기습(奇襲)했다. 대궐(大闕) 안팎에는 수천 명의 친위대(親衛隊)가 지키고 있었지만 이들도 이미 충성심(忠誠心)이 이반(離反)

있었으므로 목숨을 걸고 천자(天子)를 지키려는 자가 없었답니다. 수비대(守備隊)가 허무(虛無)하게 무너지자 걸왕(桀王))

비참(悲慘)한 최후(最後)를 맞았으니 450여년 이어왔던 하왕조(夏王朝)가 멸망(滅亡)하는 순간이었답니다.


이렇게 하여 탕왕(湯王)은 하(, 기원전 2070~기원전 1600)나라의 마지막 왕()이자 폭군(暴君)

걸왕(桀王, ?~?)쿠데타(Coup dEtat)를 일으켜 무찌르고 상()나라를 개국(開國)하였답니다 


()나라 마지막 임금인 주(紂) 석상

()나라의 마지막 왕()인 제 31주왕(紂王)의 폭정(暴政)과 멸망(滅亡) 


그러나 상()나라의 마지막 왕()인 제 31주왕(紂王, ?~기원전 1046)도 역시 향락(享樂)을 좋아고 여색(女色)밝혔고 급기야  애첩(愛妾)인 달기(妲己, ?~?))에 빠져 달기(妲己)와 함께 국민(國民)을 잔혹(殘酷)하게 다룬 폭군(暴君)으로서,

()나라의 마지막 왕()인 걸()과 함께 폭군(暴君)전형(Type, 典型)이 되어, (, 기원전 1046~기원전 256)나라

시조(始祖)인 서주(西周, 기원전 1046~기원전 771) 무왕(武王, ?~기원전 1043?)이 일으킨 쿠데타(coup dEtat)

멸망(滅亡)하였답니다. 유가(儒家)에서는 위의 두 사건을 정당한 '혁명(革命)'쿠데타(coup dEtat)로 평가한답니다.

주왕(紂王)과 달기(妲己)

- () :

달기(妲己, ?~?), 중국(中國) (), 또는 () 왕조(王朝) 말기(기원전 11세기경)의 마지막 왕()인 주왕(紂王)의 총비(寵妃)였답니다.

(, 기원전 2070~기원전 1600) 왕조(王朝) 걸왕(桀王, ?~?)왕비(王妃) 중에서 하나인 말희(末喜, ?~)와 더불어 악녀(惡女)

대명사로서 알려져 있답니다.

사기(史記)》 「은본기(殷本紀)」의 기록(記錄)에 따르면 상()나라의 마지막 왕() 주왕(紂王, ?~기원전 1046)은 달기(妲己)를 몹시 총애(寵愛)하여

그녀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들어주었다고 한답니다. 이로 인해 강황후의 질투(嫉妬)를 받았고, 사이가 좋지 못했답니다. 어느 날 자객(刺客) 강환이

주왕(紂王)을 습격(襲擊)했고, 달기(妲己)는 이를 강황후에게 덮어씌웠다고 한답니다. 자백(自白)을 받기 위해 눈을 파내는 등 악행(惡行)을 저질렀고 결국

강황후는 사망(死亡)하게 된답니다.

악사(樂師) 사연(師涓)을 시켜서 음탕(淫蕩)한 음악(音樂)인 북도지무(北鄙之舞), 미미지악(靡靡之樂)을 만들었답니다.


무거운 세금(稅金)을 거두어 녹대(鹿臺)에 전()을 가득 채우고 거교(鉅橋)에는 곡식(穀食)을 가득 채운 채, 사냥개와 말, 진기한 물품들로 궁실(宮室)

가득 채웠답니다. 사구(沙丘)의 원대(苑臺)를 넓혀서 들짐승과 날짐승을 모아 그 안에 풀어 길렀으며, 귀신을 깔보고 사구(沙丘)에 많은 사람들을 모아

즐겨 놀았답니다. ()을 채운 연못에 고기를 걸어둔 숲인 주지육림(酒池肉林)을 만들어서 나체(裸體)의 남녀(男女)를 서로 뒤쫓게 하는 등 날마다

음탕(淫蕩)한 밤을 보냈답니다.

그 뒤 달기(妲己)()나라가 제후(諸侯)들을 규합(糾合)() 왕조(王朝)를 쳐서 멸망(滅亡)시킬 때 무왕(武王)에 의해 살해(殺害)되었답니다.  


《열녀전(列女傳)》 권7 잉첩전(嬖傳)의 은주달기(殷紂妲己)조에는 포락(炮烙)이라는 형벌(刑罰)을 보며 달기(妲己)가 웃었다고 한답니다.

재상(宰相) 비간(比干, ?~?) "선왕(先王)의 전법(典法)을 따르지 않고 아녀자의 말만 따르시니 재앙(災殃)이 가까울 날이 머지 않았습니다."라고

간언(諫言)하자, 달기(妲己)가 주왕(紂王)에게 "성인(聖人)심장(心臟)에는 일곱 개의 구멍이 있다고 들었습니다"고 답하면서 주왕(紂王)을 부추겨

비간(比干)의 심장(心臟)을 도려내서 감상(鑑賞)하였답니다. 주왕(紂王)이 자살(自殺)한 뒤, 달기(妲己)도 무왕(武王)에 의해 참수(斬首)되어 목이 작은

백기(白旗)에 걸렸고, "주왕(紂王)을 망친 것은 이 여자(女子)"라는 비난(非難)을 받았다고 한답니다.

한서(漢書)》 외척열전(外戚列傳)의 안사고(顔師古)의 주()에는 "변사(弁辭)를 즐겨서 간사한 것을 구하는 데 열중하였다. 그 말을 제신(諸臣)이 써서 백성(百姓)을 괴롭혔던 것이다."라고 하였답니다.

()나라의 제 31주왕(紂王) 술로 가득 채운 연못[酒池] 변의 나무를 비단(緋緞)으로 휘감은 뒤 고기<인육(人肉)

이라고도 함>를 매달아 놓고[肉林] 달기(妲己)와 함께 배를 타고 노닐면서 손이 가는 대로 고기를 따서 먹었다고 하는데,

"지육림(酒池肉林)"이라는 고사성어(古事成語)는 여기에서 유래(由來)한답니다.

또 학정(虐政)을 그치도록 간언(諫言)는 신(臣下)들로 여금 기름을 발라 숯불 위에 걸쳐 놓은 구리기둥 위를 걷게

포락지형(炮烙之刑)을 내려 미끄러져서 타 죽는 모습을 구경면서 즐거워였답니다.

특히 자신에게 충심으로 간언(諫言)였던 ()나라 28대 태정제(太丁帝)의 둘째 아들로서 주왕(紂王)의 숙부(叔父)

왕자(王子) 비간(比干, ?~?)을 죽였답니다.
7
년에 걸쳐 높이 180m, 둘레 800m의 호화궁전(
豪華宮殿) 녹대(鹿臺)를 짓느라 무거운 세금(稅金)을 부과여 백성(百姓)들의

원성(怨聲)이 극()에 달였답니다.

봉신연의(封神演義)의 비간(比干)

()나라 마지막 임금이자 폭군(暴君)의 대명사 주왕(紂王)의 횡포(橫暴)가 갈수록 심해지자 서백후(西伯侯) 희창(姬昌)<주 문왕( 文王)>은 자세를 낮추고 때를 기다리는 모략(謀略)을 선택(選擇)했답니다. 다른 제후국(諸侯國)들을 위해 주 임금에게 간청(懇請)하고, 자신의 서쪽 땅을 바쳐 많은 사람을 괴롭힌 혹형(酷刑) '포락지형(炮烙之刑)'을 폐지(廢止)시키기도 했답니다.

그럼에도 희창(姬昌)<주 문왕( 文王)>()나라의 마지막 왕()인 주왕(紂王)에 의해 유리성에 7년이나 강제(强制)납치감금(拉致監禁)당했답니다. 이 사이 큰아들이 가마솥에 삶기는 팽형(烹刑)을 당해 죽고, 문왕(文王)은 참으로 끔찍하게 이 사실을 까맣게 모른 채 첫째 아들을 넣고 끓인 인육탕(人肉湯)을 다 먹었다고 합니다. 주왕(紂王)주 문왕( 文王)이 아들의 인육탕(人肉湯)을 다 먹고 나자 사실(事實)을 알렸고, 주 문왕( 文王)은 그때까지 먹은 것을 다 토()했답니다. 극심(極甚)한 고통(苦痛) 속에서도 주 문왕( 文王) 8괘를 64괘로 풀이하여 『주역(周易)』을 짓는 놀라운 능력(能力)을 보여주었답니다.

희창(姬昌)<주 문왕( 文王)> 결국 큰 병()을 얻었고, 이 대업(大業)에 나설 수 없게 되자 죽기에 앞서 문왕(文王)은 둘째 아들 희발(姬發)<서주 무왕(西周 武王)>을 불러 다음 세 가지를 유언(遺言)으로 남겼답니다. 첫째, 좋은 일을 보면 게으름 부리지 말고 바로 달려가라. 둘째, 시기가 오면 머뭇거리지 말고 바로 달려가 잡아라. 셋째, 나쁜 일을 보면 빨리 그 자리를 피하고 가까이 가지 말아라. 모략(謀略)을 선택한  문왕(文王)의 진면목(眞面目)이 유언(遺言) 세 마디에 고스란히 녹아 있답니다.

희창(姬昌)<주 문왕( 文王) 강제(强制)로 납치감금(拉致監禁)당하여 결국 사망(死亡)하자, 희창(姬昌)의 둘째 아들 희발(姬發)

<서주 무왕(西周武王)>이 아버지()를 보복(報復)하기 위해서 아버지()주문왕(周文王)책사(策士)강태공(姜太公,

?~?) 등의 부하들과 함께 상()나라의 제 31대 주왕(紂王)에 반역(反逆)하여 쿠데타(coup dEtat)로 상(, 기원전 1600년경

~기원전 1046년경)나라를 멸망(滅亡)시켰는데, 기원전 1046년 무렵 ()나라의 마지막 왕() (紂王)이 하남성(河南省) '목야(牧野)의 결전(決戰)'에서 ()에 크게 패하고 자결(自決)하자, (紂王)의 왕자(王子)인 무경(武庚)은 부하들을 이끌고

투항(投降)하였답니다.


 

(周, 기원전 1046년~기원전 256년)나라에 대하여... 


서주(西周) 영역-기원전 1046~기원전 770년 존재했던 서주. 서쪽의 서안(西安)이 도읍지였다.


서주 무왕(西周 武王)


서주(西周, 기원전 1046~기원전 771년)에 대하여... 

- 서주 무왕(西周 武王)()나라를 건국(建國) -

희창(姬昌)의 둘째 아들인 희발(姬發)(, 기원전 1046~기원전 256)나라의 제1대 왕() 서주 무왕(西周 武王, 재위: 기원전 1046~기원전 1043)으로 왕위(王位)에 오르고, 아버지()인 서백후(西伯侯) 희창(姬昌)주 문왕( 文王, ?~기원전 1046)으로 추숭(追崇)하였답니다. 

지금의 시안(西安) 부근인 당시의 호경(鎬京)을 수도(首都)로 정하여 주()나라를 창건(創建)하고 아우<주 문왕( 文王)넷째 아들>인 주공(周公, 기원전 1100?~?)과 공신(功臣)인 군사전략가(軍事戰略家)강태공(姜太公, ?~?) 및 소공석(召公奭, ?~?) 등의 보필을 받아 나라의 기초(基礎)를 공고히 하였답니다.

()나라 무왕(武王)()나라가 멸망한 뒤 ()나라의 유민(遺民)들을 통제(統制)하기 위해 상()나라의 마지막 왕()인 제 31 '주왕(紂王)'의 아들인 무경(武庚)을 상()나라의 도읍(都邑)인 은(: 지금의 河南 安陽)에 제후(諸侯)로 봉()한 다음 그리고 무경(武庚)이 반란(反亂)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그 (周圍)서주 무왕(西周 武王) 자신의 세 동생(三同生), 즉 주공(周公)의 형()'관숙(管叔)'을 관(, 河南 鄭州)의 제후(諸侯)로 봉()했으며, 동생(同生)들인 '채숙(蔡叔)'은 채(, 지금의 河南 上蔡)의 제후로, '곽숙(霍叔)'은 곽(, 山西 霍州)의 제후로 봉하였답니다. 이들은 무경(武庚)()나라의 유민(遺民)들에 대한 감시(監視)를 맡았기에 ‘삼감(三監)‘이라고 불렸답니다

이와 같이 전국(全國)을 여러 지방으로 나누어 각 지방에 제후(諸侯)를 봉()하는 등 이른바 봉건 제도(封建制度)를 시행하였답니다. 후세(後世) 유가(儒家)로부터 이상적인 성천자(聖天子)로서 숭앙(崇仰)을 받았는데 문왕(文王)과 무왕(武王)의 덕()을 기리는 다수의 시()가 《시경(詩經)》에 수록되어 있답니다.

주공(周公)의 초상화

(周公)이 삼감(三監)의 난()을 평정(平定)

기원전 1043년 무렵, 무왕(武王)()나라를 건국(建國)한 지 3년 만에 병사(病死)하였고, 무왕(武王)의 태자(太子) 희송(姬誦)이 뒤를 이어 즉위(卽位)하였으니 그가 ()나라의 제2대 왕() 성왕(成王, 기원전 1042?~기원전 1021? 또는 기원전 1042~기원전 1006?)이랍니다. 그러나 성왕(成王)은 아직 나이가 어렸으므로 제국(帝國)의 경영(經營)을 맡길 수는 없어 무왕(武王)의 동생(同生)이며 책사(策士)(周公, 기원전 1100?~?))이 섭정(攝政)이 되었답니다.

- () :

주공(周公, 기원전 1100?~?)주 문왕( 文王)의 넷째 아들이자, () 나라를 개국한 서주 무왕(西周 武王, 재위: 기원전 1046~기원전 1043)의 동생(同生)이다. 문왕(文王)은 정비(正妃)인 태사와의 사이에서 모두 열 명(十名)의 아들을 얻었답니다. 이 열 명(十名)의 아들 가운데 주공(周公,)은 가장 탁월(卓越)한 능력(能力)과 비범(非凡)한 자질(資質)을 지니고 있었던 듯하답니다. 문왕(文王)이 강태공((姜太公, ?~?)이라는 책사(策士)를 얻어 상()나라의 마지막 왕() 주왕(紂王)의 마수(魔手)에서 벗어나 독립적(獨立的)인 세력(勢力)으로 발돋움할 수 있었던 것처럼, 무왕(武王)은 동생인 주공(周公)을 책사(策士)로 중용(重用)하여 비로소 상()나라를 멸망(滅亡)시키고 주()나라를 세울 수 있었기 때문이랍니다. 진시황제(秦始皇帝, 기원전 259~기원전 210 )의 생부(生父)로 알려져 있는 전국시대(戰國時代, 기원전 403~기원전 221) ()나라 여불위(呂不韋, 기원전 292~기원전 235)가 편찬한 『여씨춘추(呂氏春秋)』에 실려 있는 "주공(周公)은 형()이자 천자(天子)인 무왕(武王)의 스승 노릇을 했다"는 기록을 보더라도 그의 인품(人品)과 자질(資質)을 짐작해 볼 수 있다. ()만 한 동생(同生)이 없다는 속설(俗說)이 주공(周公)에게는 적용되지 않는 말이랍니다.

무왕(武王)의 형제(兄弟)들인 관숙(管叔)과 채숙(蔡叔), 곽숙(霍叔)은 이에 불만(不滿)을 품고 (周公)이 왕위(王位)를 빼앗을 것이라는 말을 사방(四方)이 퍼뜨렸고, 그리고 상()나라의 마지막 왕() '주왕(紂王)'의 왕자(王子)무경(武庚)과 연합하여 반란을 일으켰는데, 이를 ‘삼감(三監)의 난()’이라고 한답니다. (周公)은 제후(諸侯)들을 단속하며 반란(反亂)의 진압(鎭壓)에 나섰지만, 춘추시대(春秋時代, 기원전 770~기원전 403) 동쪽의 강소성(江蘇省)에 있던 부족(部族) 회이(淮夷)와 연합(聯合)()나라의 유민(遺民)들의 저항(抵抗)이 거세서 반란(反亂)을 진압(鎭壓)하는 데에는 3년이나 걸렸답니다. 무경(武庚)()나라의 군대(軍隊)에 사로잡힌 뒤 (誅殺)되었으며, (周公)의 형()인 관숙(管叔)도 처형(處刑)되었고, 채숙(蔡叔)은 멀리 유배(流配)되었으며, 곽숙(霍叔)은 모든 지위(地位)에서 물러나는 처벌(處罰)을 받았답니다.

성왕(成王)을 보좌하는 주공(周公)을 그린 벽돌 그림

(周公)7년 동안 주()나라를 정치적으로 안정시켜놓은 다음,

성왕(成王)에게 권력(勸力)을 넘겨주다.


만약에 주공(周公)의 섭정 기간(攝政期間), 주공(周公)의 친형제(親兄弟)이자 성왕(成王)의 친삼촌(親三寸)인 관숙(管叔)·

채숙(蔡叔)·곽숙(霍叔)이 멸망(滅亡)()나라 주왕(紂王)의 아들인 무경(武庚)과 손잡고 일으킨 반란(反亂) 만약

성공(成功)했다면, 성왕(成王)의 목숨은 물론 주()나라의 앞날도 어떻게 되었을지 모를 일이랍니다.
주공
(周公)이 신속하게 이 반란(反亂)을 진압(鎭壓)한 것을 보면, 그는 당시 군사력(軍事力)까지 좌지우지(左之右之)할 수 있는 막강(莫强)한 권력(勸力)을 손에 쥐고 있었다고 할 수 있고, 마음만 먹으면 주()나라를 자신의 천하(天下)로 만들 수 있었던 것이랍니다. 그러나 주공(周公)은 후대(後代)의 대다수 인물들이 어린 조카를 살해(殺害)하고 왕위(王位)를 빼앗은 것과는

 다른 길을 선택했답니다.)

주공(周公) 7년 동안 주()나라를 정치적으로 안정시켜놓은 다음, 성왕(成王)에게 권력(勸力)을 넘겨주었답니다.


이와 같은 행동은 권력(勸力)과 영토(領土)를 둘러싼 피비린내 나는 살육(殺戮)과 약탈(掠奪)이 횡행(橫行)

춘추시대(春秋時代, 기원전 770~기원전 403) 말기(末期)인 주공(周公)의 시대에서 약 500년이 지난 시대에 살았던

공자(孔子, 기원전 551~기원전 479)주공(周公)을 이상적(理想的)인 성인(聖人)으로서 꿈에서도 그를 보고 싶어할

정도로 경모(敬慕)하였답니다 

- () :

우리나라 조선(朝鮮)의 제7대 왕() 세조(世祖, 재위 1455~1468)<단종의 숙부>1453부터 1455까지 조카 제6() 단종(端宗, 재위 1452~1455) 대신(代身) 섭정(攝政)하다가 조선 왕조(朝鮮王朝)에서 최초(最初)반정(反正)을 일으켜 집권(執權)한 지도자(指導者)로 주공(周公)과는 정반대(正反對)의 인물(人物)로 평가(評價)되는 사례(史例)입니다.

주공(周公)은 재상(宰相)의 직()을 맡아 무왕(武王)을 보좌(補佐)하고 또 무왕(武王)의 사후(死後) 섭정(攝政)을 맡아 성왕(成王)을 대신해 나라를 다스리는 동안, 이제 막 시작한 주()나라를 반석(盤石) 위의 나라로 바꾸어놓는 '대 프로젝트( Project)''분봉제후제(分封諸侯制)와 종법제(宗法制)'를 시행했답니다. 주공(周公)이 설계하고 건설한 주()나라의 국가체제(國家體制)는 진시황제(秦始皇帝)가 천하통일(天下統一)하기 이전까지 1000여 년 동안 중국대륙(中國大陸)을 지배했답니다.

()나라의  봉건제도(封建制度)


()나라의 통치제도(統治制度)는 왕실 혈족(王室血族)이나 공신(功臣)을 제후(諸侯)로 임명(任命)

전국(全國)의 영토(領土)를 다스리게 한 '분봉제후제(分封諸侯制)와 종법제(宗法制)'


()나라 왕실(王室)중국 문화(中國文化)의 발상지(發祥地)인 황하(黃河) 중상류(中上流)의 남북 양안(南北兩岸) 지대(地帶)인 중원(中原)의 새로운 지배자(支配者)가 되어 점차 영토(領土)가 확대(擴大)되면서 주민(住民)을 효율적(效率的)으로 다스리는 방법(方法)을 고민(苦悶)하게 됐답니다. 제후(諸侯)들을 포섭(包攝)하고 통제(統制)하여 반란(反亂)에 쐐기를 박을 수 있는 중국 역사상 최초의 체계적인 통치제도(統治制度)봉건제도(封建制度)를 창안(創案)했답니다. 그리고 지배력(支配力)을 공고히 하기 위해 봉건제도(封建制度)에 혈연적(血緣的) 특색(特色)을 가미한 종법제도(宗法制度), 신분질서(身分秩序)도 만들었답니다.


종법제도(宗法制度)로 계약(契約)이라는 방식으로 맺어지는 서양(西洋)의 봉건제도(封建制度)와 구별되는 점이며, ()

제후(諸侯)는 단순히 정치적(政治的)인 군신(君臣)관계일 뿐 아니라 본가(本家)와 분가(分家)의 관계, 즉 공동(共同)의 조상(祖上)을 모시는 한 집안(一家)임이 강조되었답니다. ()은 제후(諸侯)들에게 군권(君權)을 상징하는 무기(武器)와 관복(冠服)을 제공하였고, 제사(祭祀)라는 신성(神聖)한 의식(儀式)에 함께 참여함으로써 군신 관계(君臣關係)를 확립했답니다.

()나라의  종법제도(宗法制度)

종법제도(宗法制度)는 엄격한 피라미드식(Pyramid ) 신분 질서(身分秩序)가 확립되고 독특한 예문화(禮文化)가 정착되는 데 기여하였답니다. 제후(諸侯)는 또 자신의 봉국(奉國) 안에서는 씨족(氏族) 등의 시조(始祖)로부터 맏아들로 이어져 내려오는 적장계(嫡長係)  대종(大宗)이 되는 것이며, 가정(家庭)으로 내려가도 마찬가지이랍니다. 철저(徹底)한 위계질서(位階秩序)가 사회 전반(社會全般)에 걸쳐 확립되는 것이랍니다.

이는 주례(周禮)라는 엄격하고 치밀한 예절규범(禮節規範)의 제정(制定)으로 강화되었답니다. 의식주(衣食住)를 비롯해 일거수일투족(一擧手一投足)에 이르기까지 모두 신분(身分)에 따라 정()해진 절차(節次)와 제약(制約)을 따르게 하는 독특(獨特)한 중국(中國)의 예문화(禮文化)가 만들어지게 된 것이랍니다. 이는 중국(中國)의 오랜 제국(帝國)들에 이어지고 중국인(中國人)들의 윤리(倫理)와 도덕(道德)으로 체계화(體系化)되어 중국적(中國的) 생활방식(生活方式)의 하나가 되었답니다.

주공(周公)과 강태공(姜太公)의 지략으로 일어난 주()나라는 다행히 군주(君主)들이 대대로 영명(英明)한데다 제후(諸侯)들의

충성(忠誠)도 극진(極盡)하여 300여 년간 무사태평(無事太平)을 누릴 수가 있었답니다.


 ()나라의 제10대 왕() 여왕(厲王)

백성들에게 쫓겨난 서주(西周)의 제10대 왕() 여왕(厲王)

 

그러나 ()나라의 제10대 왕() 여왕(厲王, 재위 : 기원전 877 혹은 기원전 855~기원전 842)이 간신(奸臣)

영이공(榮夷公)의 말만 듣고 무거운 세금(稅金)을 물리고 각종 혜택(惠澤)을 독점(獨占)하게 하여 사사로운 이익(利益)을 잔뜩

챙이기는 등 반항(反抗)을 진압(鎭壓)하기 위해 무거운 세금을 물리고 각종 특혜를 독점하게 하여 사사로운 이익을 잔뜩 챙무거운 세금을 물리고 각종 특혜를 독점하게 하여 사사로운 이익을 잔뜩 챙잔혹(殘酷)한 형벌(刑罰)을 가하는 푹군(暴君)으로 변했고, 기원전 841

백성(百姓)들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여왕(厲王)을 반대하는 대규모(大規模)의 폭동(暴動)을 일어 켰는데 역사상 이 폭동을

‘국인폭동(國人暴動)’이라고 하고 가담자에는 평민(平民)과 귀족(貴族)도 이었답니다. 왕궁(王宮)으로 쳐들어간 백성(百姓)들은

궁궐(宮闕)에 불을 지르고 구석구석을 뒤지며 여왕(厲王)을 찾았으나 허탕이었답니다.

그런데 여왕(厲王)의 아들 정()<선왕(宣王)> 목공(召穆公)의 집에 숨어 있다는 말을 듣고 그들은 달려가서 목공(召穆公)의 집을 포위(包圍)했답니다. 목공(召穆公)도 격분(激忿)한 국민(國民)들을 어쩔 수가 없었답니다.

하는 수 없이 그는 자신(自身)의 아들()을 왕자(王子) ()<선왕(宣王)>으로 가장(假裝)해 내놓았답니다.

목공(召穆公)은 이렇게 자기(自己) 자식(子息)의 생명(生命)으로 왕자(王子) ()<선왕(宣王)>을 살렸답니다.

여왕(厲王)이 달아난 후 조정(朝廷)에는 국왕(國王)이 없었다. 국민(國民)들은 대신 정공(周定公) 목공(召穆公)

옹립(擁立)하여 천자 대행(天子代行)으로 국정(國政)을 다스리게 했답니다. 역사상 이를 ‘공화행정(共和行政)’이라고 한답니다.

 

여왕(厲王)은 그 해부터 공화 14년까지 체()<현재의 산서성(西省) 곽주시(霍州市)>에 숨어서 돌아오지 못하다가 끝내

그곳에서 생()을 마쳤답니다.

 

()나라 제11대 왕() 선왕(宣王)

제후(諸侯)들이 등을 돌린 주()나라 제11대 왕() 선왕(宣王)

 

()나라 제11대 왕() 선왕(宣王, 재위: 기원전 827년∼기원전 782)은 아버지 여왕(厲王)백성(百姓)에게 쫓겨났을 때,

현신(賢臣) 목공(召穆公)의 보호를 받아 10여 년이나 자리를 비웠다가 즉위(卽位)하였답니다.

목공(召穆公) 정공(周定公)을 재상(宰相)으로 삼고, 조상인 문왕(文王)무왕(武王)의 유풍(遺風)을 이어받아

선정(善政)을 베풀어 국위(國位)를 회복(回復)하였으므로 제후(諸侯)는 다시 주()나라의 주권(主權)을 인정(認定)하였답니다.

그러나 만년(晩年)에는 정치(政治)를 게을리하여 천자(天子)가 가장 중히 여겨야 할 '임금이 친히 경작(耕作)하여 그 수확(收穫)

으로 신농씨(神農氏)·후직씨(后稷氏)를 제사(祭祀)지내던 토지(土地)적전(籍田)을 가는 일'도 하지 않았고,

북서(北西) 만족(蠻族)의 침입을 막아내지도 못하였으며, 남방(南陽 지방)에서 징집(徵集)해 온 군대(軍隊)를 잃고 다시

군병(軍兵)을 뽑아 백성(百姓)을 괴롭혔으므로 제후(諸侯)들이 등을 돌렸답니다. 이로 인해 나라는 쇠퇴(衰退)하게 되었답니다.


 애첩 '포사(褒姒)'에 빠져 나라 망친 유왕(幽王)

애첩 '포사(褒姒)'에 빠져 나라 망친 ()나라 12대 유왕(幽王)

 

서주(西周, 기원전 11세기~기원전 771)의 멸망(滅亡)에 관해서 전()해지는 이야기가 있답니다.

()나라 12() 유왕(幽王, 재위: 기원전 782~기원전 771?)이 제위(帝位)에 올라 경국지색(傾國之色) 포사(褒姒)에게

미쳐 향락(享樂)과 주색(酒色)에 빠져 정사(政事)를 돌보지 않았고 돌아가자 국운(國運)은 급속도(急速度)로 기울기 시작했다.

유왕(幽王)이 섬서성(陝西省) 포성(褒城) 남동쪽에 있는 포국(褒國)을 토벌(討伐)하였을 때 포인(褒人)이 바쳤으므로 포사(褒姒)라 하였답니다. 이 여자(女子)가 역사(歷史)에 요부(妖婦)로 기록된 절세(絶世)의 미녀(美女) 포사(褒似)였답니다. () 유왕(幽王)은 첫눈에 포사(褒姒)의 미모(美貌)에 빠져 본부인(本夫人) 신후(申后)에게는 비밀(秘密)로 한 채로 정사(政事)를 제쳐놓고 별궁(別宮)에서 포사(褒姒)와 놀아나게 된답니다. 포사(褒姒)에 푹 빠진 유왕(幽王)은 드디어 정궁(正宮)인 신후(申后)를 폐()하여 냉궁(冷宮)으로 내친 후에 신()나라로 보냈던 태자(太子) 의구(宜臼)도 폐서인(敗庶人)을 시키고 말았다.

그와 반대로 포사(褒姒)는 왕후(王侯)가 되고 그의 아들 백복(伯服)을 태자(太子)로 삼았답니다. 하지만 이상한 출생(出生)

전설(傳說)을 지닌 그녀는 한 번도 웃질 않았답니다. 유왕의 포사(褒姒)를 기쁘게 해주려고 별의별 일을 다 꾸며봤지만

그녀는 웃는 시늉조차 하지 않았던 것이랍니다.

포사(褒姒)가 비단(緋緞) 찢는 소리가 좋아하므로 왕은 매일같이 비단을 백 필씩 가져다가 팔 힘이 센 궁녀(宮女)를 시켜 찢게

하였답니다. 궁궐(宮闕)에서는 매일 산더미 같은 비단이 찢겨졌답니다.

궁중의 비단이 모두 없어지자 이제는 제후(諸侯)들과 백성(百姓)들에게서 징발(徵發)해 계속 찢었답니다. 궁궐에서는 매일 비단 찢는 소리만이 가득 찼답니다. 포사(褒姒)는 싫어하지는 않았지만 좀처럼 웃지 않았답니다.

이에 유왕(幽王)은 반드시 포사(褒姒)를 한번 웃게 하리라 마음먹고는 "능히 포후(褒后)를 한 번 웃게 하는 자는 천금(千金)주리라"라 하고 포고(布告)하였답니다.

봉화(烽火)

이에 어느 날 괵석보(虢石父)가 왕() 앞에 나가 봉화(烽火)를 올려 제후(諸侯)들이 몰려오는 것을 보면 포후(褒后)가 웃게 되리라 말하니 유왕(幽王)은 여궁(驪宮)으로 가 봉화(烽火)를 올리게 한답니다. 봉화(烽火)는 외적(外敵)이나 반란군(反亂軍)의 침입(侵入) 등 위급(危急)할 때 릴레이식(Rela)으로 올려 모든 군사(軍士)를 왕궁(王宮)으로 모이도록 하라는 신호(信號).

사면팔방(四面八方)에서 제후(諸侯)들이 여산(廬山)으로 몰려왔답니다. 물론 아무 일도 없었고, 하지만 몰려온 사람()과 말()이 뒤엉키고, 수레는 서로 부딪히고 앞서온 군사(軍士)들이 뒤에 온 군사(軍士)들에게 고함치는 등 아수라장(阿修羅場)벌어졌답니다.

제후(諸侯)들은 맥()이 빠져 자기들끼리 모여 수군거렸고 군사(軍士)들은 투구(鬪具)를 땅바닥에 집어 던지면서 흥분(興奮)하기도 하였답니다. 어떤 자들은 아예 길가에서 쓰러져 잠을 자기도 했고, 이러한 웃지 못할 광경이 한나절이나 계속되었던 것이랍니다.

이 때 결코 웃지 않았던 포사(褒姒)가 갑자기 단순호치(丹脣皓齒)를 드러내며 웃었답니다. 이에 유왕(幽王)은 웃는 포사(褒姒)의 얼굴은 너무도 아름답다며 괵석보(虢石父)의 공()을 인정(認定)해서 천금(千金)을 내렸답니다.

"천금(千金)으로 웃음을 산다(千金買笑)"는 고사(古事)가 여기에서 유래한 것이랍니다.

다음날부터 유왕(幽王)은 매일 봉화(烽火)를 올리게 했답니다. 처음에는 군사(軍士)들이 부리나케 달려왔고, 가쁜 숨을 몰아 쉬며 달려와 보면 왕궁(王宮)의 높은 다락 위에서는 유왕(幽王)과 포사(褒姒)가 내려보며 웃고 있었고 그런 일이 계속되자 나중에는 봉화(烽火)가 올라와도 움직이는 군사들이 없게 되었답니다.

신후(申后)의 친정(親庭)아버지인 신()나라 신후(申侯)는 이런 왕()을 간()하다 도리어 왕()의 노여움을 샀답니다. 게다가 왕비(王妃) 신후(申后)까지 폐()한 데 원한(怨恨)을 품은 그녀의 아버지 신후(申侯)는 기원전 771년에 지금의 섬서성(陝西省) 봉상현(鳳翔縣) 일대에 살았던 유목민(遊牧民)인 견융(犬戎)의 도움을 빌어 쳐들어 왔답니다.

신후(申侯)와 견융(犬戎)은 왕성(王城)을 독 안에 든 쥐처럼 포위(包圍)했답니다. 유왕(幽王)은 다급하여 봉화(烽火)를 올리라고 명령(命令)했지만 정작 봉화(烽火)가 올라와도 군사들은 모이지 않았답니다. 제후(諸侯)들이 포사(褒姒)를 웃기려는 장난쯤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랍니다.

유왕(幽王)과 포사(褒姒)는 궁정(宮庭)을 빠져나가 여궁(驪宮)으로 도피(逃避)하며 계속 봉화(烽火)를 올리며 구원(救援)을 요청(要請)했지만 역시 구원병(救援兵)은 오지 않았답니다. 여궁(驪宮)을 빠져 나와 도망쳤으나 얼마 가지 못하고 견융족(犬戎族)에게 여산(驪山) 기슭에서 잡혔답니다.

유왕(幽王)은 현장(現場)에서 단칼에 목이 베어졌으며 포사(褒姒)