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규


   사무실에 쥐가 들었다.

   우리 사무실은 지은 지 십오년쯤 된 6층짜리 건물 4층에 있다. 그 정도 나이이면 낡은 건물에 속한다. 지하층이 모두 식당이기도 해서 놈들이 그곳 어디든 숨어있을 게 뻔하긴 했다. 그렇더라도 4층까지 기어올라와 휘젓고 다니리란 상상은 못했다. 저 살 터전으로 탐나는 장소가 아닌 것이다.

   우리 사무실은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실이다. 집기라고 해봐야 책상과 의자들이 대부분이다. 작년 여름 한쪽 벽면에 수도를 놓고 수도꼭지 밑에 작은 싱크대를 갖다놓기는 했다. 아니 하나 더, 냉장고도 있다. 그리하여 간이 부엌처럼 설치 된 곳에서 점심식사를 위한 취사를 하기는 한다. 그러나 청결유지를 소홀히 하지는 않았다.

   사무실에는 나 말고 동료가 두 명 더 있는데, 모두 여자들이다. 깨끗하기로는 여자들이 앞선다. 나 역시 너저분한 건 싫어 취사 끝난 자리를 그냥 방치하지는 않았다. 그런 곳을 놈이 난데없이 침입한 것이다.

   쥐가 잠입했음을 안 것은 싱크대를 닦는 비누를 본 후였다. 뚜껑이 열려 있는 비눗갑 속의 비누에 뭔가에 의해 긁힌 자국을 발견한 사람은 김 선생이었다. 이상하게 여긴 김 선생이 박 시인을 불렀고 박 시인은 나를 불렀지만, '쥐가 들었구나'하고 즉시 눈치를 챈 건 아니었다. 나는 "저렇게 닳는 비누도 있나?" 했을 뿐이었다. 그러다가 냉장고 주변에서 조그만 쥐똥을 몇 개 발견한 것이다.

   사람들은 싫어하는 짐승을 꼽을 때 쥐 얘기를 제일 많이 한다. 생활 방식이 전혀 다르기도 하지만 해로움만 주기 때문에, 근처에 얼마든지 있어 낯이 익어도 배척을 당하는 것이다. 그리고... 쥐는 특히 여자들이 질색을 하는 짐승이기도 하다. 정작 모습은 드러내지 않았는데도, 작은 쥐똥 몇 개만 보고도 놀라는 두 여자동료의 겁 먹은 표정이라니... 냉장고 주변뿐만 아니라 창문을 빙 둘러 따라간 교실 전체에서 쥐똥은 더 발견되었다. 그럴 때마다 변하는 얼굴들이 볼만 했다. 장난삼아 구경할 일로는 그들의 표정이 너무 심각해 보였다.

   이튿날 저녁. 우리는 쥐덫과 끈끈이판을 놓았다. 왜 쥐똥이 발견된 날 당장 놓지 않았느냐고? 거기에는 나의 그럴듯한 논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쥐똥을 발견한 그날, 근무를 마친 우리는 사무실(교실) 전체에 대한 점검을 했다. 처음에는 쥐똥을 보고 놀라기만 했지만, 이번에는 쥐가 들어왔음직한 틈을 찾아내는 일을 했다. 그 결과, 창문 한 귀퉁이에서 놈이 만들어낸 것으로 생각되는 구멍을 발견했다. 에어컨 옆면과 창문이 만나는 곳에 제법 틈이 벌어져 테이프로 막아놓았는데, 그 부분이 뚫려있었다.

   이 구멍을 놓고 우리는 의견을 나누었다. 당연히 두 동료는 구멍을 다시 막고 쥐덫을 놓자고 했다. 그러나 내 의견은 좀 달랐다. 만약 지금 저걸 막는다면, 물론 쥐덫에 걸릴 수도 있다. 그렇지만 좀더 영리한 쥐라면 그게 덫인줄 알고 접근하지 않을 것이다. 요즘 쥐가 얼마나 머리를 쓰는 줄 아느냐. 따라서 먹을 것도 못 찾고, 구멍이 없어 나갈 수도 없는 놈으로서는 밤마다 뭐든지 헤집고 다닐 것이다. 그러다가 낮엔 어느 구석에 꽁꽁 숨어 나오지 않을 것인데, 그건 무엇을 뜻하는가. 못 먹어 죽은 쥐를 상상할 수 있지 않느냐. 그렇게 죽은 쥐가 안에서 부패하고 있다는 생각을 해보라. 죽은 쥐 하나 찾아내자고 소파니 교재니 책을 전부 뒤질 수도 없고.(교실에는 책도 수천 권 책꽂이에 꽂혀있다.)

   그러므로, 모처럼 한 번 방문해 봤던 놈으로서는 이곳이 알맞은 터가 아닌 줄 알았을 테니, 저 구멍으로 미련없이 나가게 해야 한다는 것이 나의 주장이었는데, 미심쩍어하면서도 이 주장에 두 사람이 설득을 당했던 것이다.

   그러나 나의 이런 논리는 먹혀들지 않았다. 이튿날 와 보니 쥐똥이 또 있었다. 먼저 것은 치우고, 놈이 다녔음직한 길까지 락스로 닦아냈는데도 그랬던 것이다.

   왜 아니겠수,뻔한 거지, 싶은 얼굴이 된 박 시인이 아예 출근 하면서 사들고 온 쥐덫과, 근무가 끝난 다음 달려가 사 온 끈끈이판을 곳곳에 깔고 나서, 우리는 한참 동안 쥐 얘기를 했다. 얘기 중에는 이런 내용도 있었다.

   "어느 곳에서 쥐가 얼마나 오래 사는지를 실험했답니다. 한 끼도 안 먹이고 굶어죽는 날짜를 계산해보는 실험이었지요. 그리하여 조그만 방에 큰 쥐 한 마리를 가두었던 거예요. 물론 물 한 방울도 주지 않았지요. 드디어 한 동안 지난 뒤 문제의 방을 열어 본 결과... 자, 어떻게 되었을까요."

   "죽었겠지..."

   뻔한 뒷얘기 같아서 성의없이 얼른 대답했더니, 박 시인은 갑자기 슬픈 얼굴을 지어보였다.

   "그 쥐가 글쎄, 새끼를 다섯 마리나 낳고..."

죽어있더란 것이다. 물론 새끼 쥐들도 몽땅 죽었고.

   그랬을 것이란 추측은 했지만. 새끼 쥐까지 등장하자 김 선생과 나도 입을 다물고 숙연해졌다.

   싫은 것, 무서운 것, 그런 대상이 생명과 연관된다면 생각은 달라진다. 큰 쥐야 늘 사람에게 적이 돼 왔지만, 그레서 놈들을 소탕해야 안심이 되었더라도, 갓 태어난 생명을 보는 시각은 미물이건 뭐건 다른 것이다.

   참으로 오묘한 것은, 세상에는 절대시 되는 것과 상대시 되는 것들이 양립하는데, 이 둘 중 어느 쪽도 자동소멸하거나 한쪽으로 기우는 법은 없다.

   자아를 '절대'라고 한다면 '상대'는 더불어 살아가기에 알맞은 모든 대상이다. 그리하여 이런 대상을 '절대'쪽으로 은근히 끌어들이거나 '상대'쪽으로 '절대'를 기울여주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쥐처럼 실은 대상, 징그러운 대상, 그래서 어울릴 수 없는 대상도 주변에는 얼마든지 있다. 절대와 상대를 적절히 수용한 쪽에서는 수용할 수 없는 또 다른 상대를 만나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지만, 그런 것들을 구태여 만나게 하는 세상의 뜻이 오묘한 것이다.

   절대와 상대란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인데. 세상의 주인공을 사람이 아닌 쥐로 놓고 본다면, 쥐가 가장 적대시하는 존재 중에는 분명 '사람'이 들어있을 것이다. 이 쥐가 탈출구라고는 전혀 없이 사람(적)이 만든 함정 속에서 굶어죽었다,는 사건은 얼마나 슬픈가. 우리 세 사람이 그런 기분이 되거나 숙연해지거나 한 이유는 쥐든 사람이든 다 버리고, 무릇 생명에 대한 그 어떤 움직일 수 없는 관념이 깨어진 데서 생겨난 것이라 해야겠다. 게다가 박 시인이 얘기한 쥐는 뱃속에 새끼들이 있었으며, 그 새끼들까지 죽었기 때문에 더 큰 연민이 작용했을 터이다.

   싫은 것, 적이 되는 모든 대상은 그저 소리없이 없어지기를 바랄뿐이지, 그 끝을 애써 확인해보고 싶어하지는 않는다. 그 끝이 끔찍한 형상일 때는 더욱 그러한 느낌을 받기때문에라도,사람은 생태계에서 주인공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것이다.

   덫도 놓고 끈끈이판도 놓았지만, 그래서 쥐가 잡혀죽기를 기대했지만, 박 시인과 김 선생 역시 '죽은 쥐'를 보려하지 않았다. 박 시인은 "어떻게 됐어요? 잡혔어요?'하고, 출근을 첫 번째로 하는 나에게 전화로 확인한 다음 출근을 했다. 그 다음에 출근을 하는 김 선생은 사무실 문을 빼꼼히 열고, 안심해도 된다는 우리 표정을 살핀 다음에야 들어왔는데, 그 눈에는 아직도 의심스러운 빛이 역력했다.

   각자 그런 식으로 출근한 지 사흘째 되는 아침, 나는 드디어 잡힌 쥐를 보았다. 들었던 구멍도 막고 먹을 것이 됨직한 것들을 모두 치웠으니 배가 고팠던 '영리한'(나는 쥐가 영리하다고 생각한다)쥐로서도 어쩔 수 없나 보다. 끈끈이판 가운데에 올려놓은 먹이를 채가려다 걸려 죽었는데, 그 현장은 과연 볼 만한 것이 못 되었다.

   나는 그 현장이 어떠했노라는 설명을 늦게 출근한 두 동료에게 자세히 늘어놓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