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뿌리민주주의, 정치의 고정 관념을뒤집다


글·하승우 풀뿌리자치연구소 이음 운영위원/
anar00hanmail.net


최근‘풀뿌리민주주의’라는 말을 궁금해 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 영어로는 Grassroots Democracy, 한국에서는 민초민주주의(民草民主主義)로 쓰기도 하는 풀뿌리민주주의는 무엇을 가리키는 말일까? 흔히 풀뿌리민주주의는 지역공동체에서 실현되는 직접민주주의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곤 한다. 그러다보니 풀뿌리민주주의가 직접민주주의, 참여민주주의와 구별되지 못하거나 작은 공동체에서나 가능한 일로 여겨지곤 한다. 사실 풀뿌리의 의미도 다양한데 정당의 지역기반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기도 하고 권력에서 소외된 사람들을 지칭하는 말로 사용되기도 한다. 하지만 내가 볼 때 풀뿌리의 의미는 함석헌 선생이 얘기했던‘ ’의 뜻과 가깝다.‘ 나무의 뿌리, 잎 같은 것이요, 몸의 발 같은 것’인 은역사를 만들어 온 민중이요, 현재의 부조리한 사회를 지탱해온 민중이다. 그래서 풀뿌리민주주의는‘함께 나서 함께 자라 함께 썩어 함께 부활하는 풀’이라는 함석헌 선생의 말을 따른다. 즉 권력을 가진 자들을 따르며 함께 썩어가는 자도 풀뿌리이고 썩어버린 정치를 갈아엎고 희망의 씨앗을 심는 자도 풀 뿌리이다. 그런 의미에서 함석헌 선생은 이렇게 말한다.‘ 앓는 자에게 묻지 않고 약을 지을 수는 없다. 고치는 것은 의사가 아니라
앓는 자 자신이다.’ 풀뿌리민주주의는 부패한 세상에 눈감아 왔지만 그런 자신의 모습을 반성하며 조금씩 자신을 변화시키려 하는 지금도 병을 앓고 있는 평범한 사람들의 민주주의이다.

누가 왜 풀뿌리민주주의를 이야기하나?


우리 시대에 민주주의라는 말은 좀 식상하다. 시간이 흐를수록 센 놈만 살아남고 센 놈이 모든 걸 다 가지는‘승자독식의 경쟁사
회’에서 민주주의가 식상해지는 건 당연한 일이다.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사회인 한국사회는 사회구조를 탓하는 건 힘 없는 자의 비겁한 변명이니 능력 없는 자신을 탓하라며 약자들을 몰아세운다. 입바른 소리를 좀 하려들면 말 많은 놈은 빨갱이이거나 베짱이라며 입을 틀어막고 본보기삼아 가혹하게 처벌한다. 그러니 부조리한 걸 몰라서가 아니라 내 한 몸, 우리 가족을 건사하려면 참아야 한다는 걸 몸으로 느끼고 눈으로 보며 배워온 사람들에게 민주주의는 참으로 당혹스러운 정당함이다. 민주주의가 뭔지 몰라서가 아니라 민주적으로 살면 살아남을 수 없다는 점을 알기 때문에 사람들은 민주주의를 배반한다.“ 괜찮다”,“ 이번 한 번만”,“ 다들 이렇게 사는데, 뭘”,“ 애들 생각해서”, 날이 갈수록 핑계는 늘어나고 삶의 무게도 무거워진다. 때로는 부조리한 사회를 걱정하기도 하지만 다른 대안이 없다며 자신을 위안한다. 한국사회는 풀뿌리들을 이렇게 비굴하고 모순된 존재로 만들어 왔다. 선거 때면 머슴을 자처하며 굽신대는 정치인들이 눈에 띄지만 선거가 끝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돌아선다. 고위 공직자를 검증하는 인사청문회에서는 부동산 투기는 물론 온갖 범죄들이 난무한다. 그런 모습을 보며 분노하기는커녕 사람들은 냉소한다. 대의민주주의가 우리의 뜻을 전혀 대변하지 않아도, 정치인과 재벌이 결탁해 사회의 부를 독식해도 술집의 안주거리가 될지언정 현실의 정치의제는 되지 못하는 사회에 우리는 살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어려서부터 이런‘현실’을 체계적으로 배운다. 일제 식민지 시기부터 흔들림 없이 지속된 우리의 교육제도는, 교육을 위해서라 면 폭력을 사용해도 좋다는 우리의 학교는, 학벌을 위해서 사랑과 우정을 미루거나 버리라고 강요하는 우리의 입시제도는 그 어떤 논리를 갖다 붙이더라도 비민주적이다. 한국의 교육은 민주시민이 아니라 순종하는 신민을 만들어 왔다. 이런 교육은 우리에게 권력이 있다는‘진실’을 스스로 부정하도록 교육시킨다. 지금 우리가 풀뿌리민주주의를 말하는 건 떳떳한 인간으로, 올바른 시민으로 다시 살기 위해서이다. 풀뿌리민주주의는 진실된 삶을 살기 위해 거짓된 삶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용기를 내어 그 삶을 거부하자는 결심을 뜻한다. 그것은 한 방에 강자를 쓰러뜨리지는 못하겠지만 악착같이 괴롭혀서 우리를 만만하게 보지 못하게 하자는 적극적인 노력이다.



풀뿌리민주주의는 변화의 과정이면서 그 자체가 목적

풀뿌리민주주의는 단순히 아래로부터 변화의 씨앗을 만들자는‘운동의전략’이 아니다. 오히려 풀뿌리민주주의는 우리의 삶이 단단하게 이 땅에 뿌리를 내려서 권력이 우리를 밀어내고 갈아엎으려 해도 잡초처럼 끈질기게 버텨보자는 그리고 서로의 뿌리를 단단히 얽어서 함께 살아보자는‘생활의 전략’이다. 운동의 가치에 동의하는 사람들의 수가 늘어나야 하지만 그 가치가 생활로 단단히 묶이지 않으면 그래서 운동의 가치와 삶이 단단히 서로를 부둥켜안고 받쳐주지 않으면 변화는 지속되기 어렵다. 풀뿌리민주주의는 변화의 과정이면서 그 자체가 변화의 목표이다. 민주주의라는 말이 민중의 지배를 가리킴에도 풀뿌리라는 수식어가 붙어야 하는 이유는 스스로의 힘을 자각한 새로운 정치주체들의 등장을 위해서이다. 고 대에서 여성과 외국인, 아이들이 정치에서 배제되었다면, 근대에서도 여성과 빈민, 이주노동자, 아이들이 정치에서 배제되고 있다. 풀뿌리민주주의는 이미 시민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니라 시민권을 획득하지 못한 사람들이, 공적인 장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내지 못했던 사람들이 시민권을 가지고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그 조건을 마련하려 한다. 그래서 풀뿌리민주주의는 언제나 힘의 정점이 아니라 그 힘의 바닥을 본다.

한국의 풀뿌리민주주의

우리의 민주화운동 역사에서도 풀뿌리민주주의의 싹을 찾을 수 있다. 1960년대 이후의 주민운동, 빈민운동 등이 지역운동의 뿌리가 되었고 95년도에 지방자치제도가 전면적으로 실시된 후에는 풀뿌리민주주의가 제도정치와도 접목되고 있다. 물론 풀뿌리민주주의가 자연스럽게 실현되지는 않는다. 그것을 위해 노력하는 다양한 단체들이 있다. <시민의신문>과 <한국청년연합회 (KYC)>가 엮은『도시 속 희망공동체 11곳 - 풀뿌리가 희망이다』(시금치, 2005)는 <광명YMCA>를 비롯한 11곳을 대표적인 풀뿌리운동의 사례로 소개한다. 그리고 김기현의『우리 시대의 커뮤빌더』(이매진, 2007)는 <부천YMCA>의 녹색가게, <광명YMCA>의 등대생협, 부산의 <희망세상>, 안성의 <안성의료생협>, 네 곳을 풀뿌리운동의 사례로 소개한다. 또한 <풀뿌리자치연구소 이음>의『달팽이가 달리기를 시작한 까닭은?』(이음, 2008)은 <광명YMCA>의 등대생협, 서울 강북구의 <녹색삶을 위한 여성 들의 모임>, <대전여민회>의 중촌마을어린이도서관 짜장, 천안의 <복지세상을 열어가는 시민모임>, 충청북도 옥천군의 <안남 어머니학교>, <안성의료생활협동조합>, 원주의 <협동조합운동협의회>, 강원도 철암의 <철암어린이도서관>, 부산의 <희망세상> 등 9곳을 풀뿌리운동의 대표적인 사례로 소개한다. 운동의제의 측면에서 보면, 도서관운동, 보육운동, 학교급식운동 등 다양한 생활상의 이슈들이 풀뿌리민주주의의 의제로 등장하고 있다. 도서관 이나 보육, 학교급식과 관련된 운동은 그 사안을 해결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사안을 해결하는 과정에 주민·시민이 참여하며 의식을 확장하고 정치주체로 성장하도록 디딤돌을 마련한다는 점에서 풀뿌리민주주의와 맞닿아 있다. 도서관이나 놀이터, 공부방, 방과후학교 등이 일정한 물리적인 공간을 중심으로 민주주의의 관계망을 구성한다면 보육이나 학교급식 등은 지역사회 내의 다양한 사람들을 조직화하면서 민주주의를 실험하는 장이 되고 있다.행정이 주도하는 주민자치센터나 주민자치위원회를 민주적인 공간으로 바꾸려는 노력들도 점점 많이 등장하고 있다. 최근에는 도시계획이나 재개발, 주거권에 개입하려는 운동도 조금씩 활성화되고‘미래의 시민’인 청소년들을 지역사회의 주체로 구성하는 운동도 활발해지고 있다. 또한 천안의 풀뿌리희망재단처럼 지역재단을 설립하는 운동도 추진되고 있다. 이런 다양한 흐름들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특징은 이런 운동이 주민들의 성장에 필요한 여유를 마련하고 과정을 제공했다는 점이다. 오랜 세월 동안 자신의 목소리를 내지 못했기 때문에 주민들이 곧바로 능동적인 정치주체로 변신하기는 어렵다. 그런 점에서 풀뿌리운동 은 주체들이 성장할‘과정’과‘여유’를 마련한다. 이런 과정과 여유는 소외된 주민이 자신의‘시민됨’을 자각하고 능 동적인 정치적 의지를 회복하도록 돕는다. 그리고 이런 과정은 직접 참여하고 실천하며 몸과 마음으로 느끼고
배우게 한다. 성공적인 사례로 거론되는 지역들은 바로 이런 과정을 만드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삶의 터전을 실제로 변화시키는 것은 활동가가 아니라 주민이고 활동가는 주민이 세계를 이해하고 변화시킬 수 있도록 지원하 는 역할을 맡을 뿐이다.
그런 점에서 풀뿌리민주주의는 권위적이지 않고 수평적으로 의견을 나누고 토론하며 결정하는 정치조직, 민중을 정치의 대상으로 소외시키지 않고 그들을 주체로 단련시키는 정치조직, 민중이 정치주체로 성장하도록 지원하는 정치조직을 추구한다. 허나 아직은 그 뿌리가 튼튼하지 않기에 한국의 풀뿌리민주주의를 낙관적으로만 바라볼 수는 없다. 중앙정부로 집중된 권력, 중앙에서 지역으로 끈끈하게 연결된 부패의 고리, 학연·지연·혈연으로 대변되는 연고주의, 심각한 사회적 양극화와 청년실업 등은 민주주의의 기반을 갉아먹고 있다. 비민주적인 학교와 공장, 사무실, 군대 등이 민주주의를 가로막고 있다. 역설적이지만 풀뿌리민주주의가 지역을 넘어 한국사회로 확장 되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가정과 공장의 벽을 넘어, 정치와 경제의 벽을 넘어 우리 삶을 총체적으로 바꿔야 민주적으로 살 수 있다. 그래도 풀뿌리민주주의가 희망이려면 나부터 꿈을 꾸고 그 꿈이 서로 의 관계를 타고 퍼지며 힘을 구성해야 한다. 내가 바뀌지 않으면 세상은 변하지 않고 풀뿌리민주주의 없이 민주주의는 실현되지 못한다.

‘미래세대소송’‘, 도룡뇽소송’이우리사회에 던진 화두

의사결정권에서 제도적으로 소외된 사람들, 아직 태어나지 않은 미래 세대, 그리고 인간 이외 다른 생명 존재들의 필요와 요구들을 민주주의적 으로 반영시키기 위한 생태학적 도전들이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이미 우리나라에서도 대규모 국책형 개발사업을 둘러싼 갈등 속에서 이런 현 상들이 포착되고 있다. 따라서 새롭게 나타나는 변화와 도전들을 생태민 주주의 측면에서 진단, 해석하고 이론적으로 체계화해서 구체적인 실천 과제로 풀어내는 일이 과제로 던져졌다. 먼저, 방폐장 부지 선정과 관련하여 실시된‘주민투표’제도를 생태민 주주의 측면에서 살펴보도록 하자. 사실 원자력 발전에서 나오는 방사성 폐기물의 처리 문제는 국내외를 막론하고 항상 뜨거운 논란거리였다. 특 히 좁은 국토에 원자력 발전 의존도가 높은 우리나라의 경우 더욱 그렇 다. 우리나라는 1986년에 정부가 방폐장 사업에 착수한 이래 20여 년 간 지역갈등 등으로 9차례나 부지 선정에 실패 했었다. 안전성을 핵심으로 하는 방사성폐기물의 보관 및 처리 문제가 해당 지역은 물론 인근 지역과 미래세대에 미치는 부담이 상당하기 때 문이다. 이런 가운데 정부는 주민투표 방식을 통해 방폐장을 경주로 최종 확정 했다. 그리고 이런 결정방식을 대의민주 주의의 한계를 보완하는 획기적이고 의 미 있는 시도로 홍보 했다. 하지만 주민투표를 통한 의사결정 방 식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생태적으로 민 감한 안전성 문제에 대한 충분한 검토와 주민합의 과정이 생략된 채 파격적인 경 제적 지원책이 의사결정 과정을 지배했 음을 알 수 있다. 그 결과 경주로 확정되 었던 방폐장 사업이 안전성과 보상 문제 를 둘러싼 갈등으로 다시 표류하는 사태 를 맞게 되었다. 결국 이 사례는 의사결 정 과정의 개방이 민주주의 측면에서 바 람직한 과제임에도 불구하고 생태가치 가 여전히 비주류인 현실적 조건을 고려 할 때 보다 신중하고 섬세한 접근이 필요함을 말해주고 있다. 민주주의에 대한 생태학적 도전은 새만금 개발 사업에 대한‘미래세대 소송’에서도 확인된다. 새만금 간척사업은 총연장 33.4km의 세계 최장 의 방조제 축조와 엄청난 면적의 갯벌과 바다를 매립하는 사상 최대 규모 의 개발 사업이었다. 그 만큼 이 사업으로 인한 생태학적 부작용을 우려 하는 목소리도 높을 수밖에 없었다. 새만금 미래세대 소송도 그 중 하나 다. 전국의 만 18세 미만 어린이 및 청소년 200여 명으로 구성된‘미래세 대 소송인단’이 정부를 상대로 새만금에 대한 사업 중지 및 취소를 청구 한 것이다. 하지만 우리나라 최초로 미래세대가 국가를 상대로 제기한 이 소송은 법원으로부터 원고 부적합 결정을 받아 각하 되었다. 그렇지만 이 사례는 현세대가 지구의‘마지막 주인’이 아닌 만큼 미래 세대를 위해 자연자원을 현명하게 이용하고 물려줄 책임과 의무가 있음 을 사회적으로 환기시켜 주었다는 점에서 생태민주주의 측면에서 의미 가 크다. 한편, 건국 이후 최대 국책사업이라 불리는 경부고속철도 건설사업과 관련하여 2차 구간(대구-경주-부산)인 천성산 터널 공사를 둘러싸고 발생 된‘도룡뇽 소송’역시 생태민주주의 측면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천성 산 관통 반대 대책위원회는 2003년 10월 천성산에 서식하는 도롱뇽을 원 고로 하고 자신들을‘도롱뇽의 친구들’이란 이름의 대리인으로 해서 사 업시행 주체인 한국고속철도건설공단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하지 만 이 역시 동물은 소송 수행 능력이 없다는 이유로 소송 자격 자체를 인 정받지 못한 채 기각 되었다. 도룡뇽 소송 역시 인간 중심적인 법과 제도 적 틀 속에서 생태적 가치를 어떻게 민주적으로 실현할 것인가에 대한 심 각한 물음을 우리 사회에 던져 주었다. 이러한 사례들은 민주주의의 절차적 합리성과 생태적 가치를 고려한 실체적 합리성을 서로 균형 있게 결합시키는 차원에서 생태민주주의의 역할이 갈수록 중요해지고 있음을 말해준다. 기후변화와 식량 및 에너지 자원 고갈 등 생태학적 위기가 현실화 되고 있는 상황에서 기존의 의사결 정 체계와 민주주의 제도에 대한 생태학적 도전은 다양한 영역에서 앞으 로도 계속 일어날 전망이다. 따라서 인간중심적인 권리에 기반한 지금의 의사결정 체계를 시공간적으로 확장시켜 미래세대와 기타 생물 종까지 고려하는 생태적으로 민감한 민주주의를 만들어나갈 필요가 있다. 생태 위기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민주주의의 창조적 진화는 피할 수 없는 과제로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