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까마득한 옛날 이야기지만 일제 강점 직후부터 1970년까지 60여년간 마산형무소가 있었던 곳은 마산시 오동동 구)한국은행 마산지점이었습니다. 1990년 까지만 해도 경남에서 가장 큰 도시는 마산 이였습니다. 도청이 창원으로 이전하기 전 까지만 해도 모든 관공서는 마산에 집중되어 있었고, 금융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한국은행도 창원으로 이전하기 전 까지는 마산시 오동동에 위치했습니다.

 

 

                     (1920년도 마산 형무소 담장)

 

한국은행이 창원으로 이전하면서 도심 한가운데 방치된 땅을 주) 부영이 2003년 12월 창원지법으로부터 84억3000만원에 낙찰받자 시민단체는 도심공원으로 만들자고 제안을 하기도 했습니다. 한때는 마산시가 오동동 옛 한국은행 터를 도심 테마공원으로 만들려던 계획을 추진했지만 매입가 과다 의혹으로 중단되면서 무산이 되었습니다. 지금은 거대한 주차장이 되어 있습니다.

 

 

 

오래된 기록 가운데 목발 김형윤 선생의 ‘마산 야화’에서 일제시대 마산의 자랑거리 세 가지 가운데 하나로 마산형무소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목발선생은 시가지 중심가에 우뚝 솟은 붉은 담장의 형무소(구 한국은행 마산지점 자리)라고 했습니다. 아마도 당시는 큰 건물이 없다보니 거대한 담장이 하나의 볼 거리가 아니었나 생각 됩니다. 자료에 의하면 부산형무소 마산 분감(마산형무소)이 설치된 것은 총감부령 24호에 의한 1910년 7월 1일이었습니다.

 

1923년에 부산 형무소 마산 지소로 개칭되고, 1946년에 마산 형무소로 승격되었습니다. 1961년에 마산 교도소로 명칭이 변경되었고, 1970년 2/16일 마산 오동동에서 현재의 창원시 마산회원구 회성동 345번지로 옮겼습니다.

 

 

                  (1920년도 마산 형무소 )

 

당시 일제시대 부산형무소 마산분감을 세울 당시는 마산포에서 한참이나 떨어진 외곽지역이었습니다. 그래도 마산부 사람들은 오동동의 붉은 형무소 건물을 두고 조선인 밀집 지역에 일본인들이 고의로 음산한 건물을 지은 것이라며 이전을 요구하는 부민 대회(마산부 지역민들의 성토대회)를 열기도 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형무소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은 매한가지였습니다. 이는 당시 신문기사에서도 확인 할 수 있습니다

 

 

                  (허정도와 함께하는 도시이야기 얻음)

 

1935년 8/9일자 매일신보에 마산형무소 이전 요구와 관련한 기사입니다.‘舊馬山市街住民 刑務所移轉渴望(구마산시가주민 형무소이전갈망)’제하의 기사에서‘마산형무소는 구마산 시가의 중심지대에 있기 때문에 시가지의 발전상, 도시미관상, 자녀교육상 여러 가지 방면으로 그 영향됨이 많아 일반 부민은 이의 이전을 갈망하여 마지않던 중 최근에 와서 오동동주민 및 완월동 주민 등은 대표로 음재식 명도석씨 등을 선정하고 연서진정서를 제출한 후 당국에 이에 대한 대책을 심심히 주목하고 있다’고 보도했습니다.(허정도와 함께하는 도시이야기 인용)

 

마산교도소가 1970년 마산 회성동으로 이전하자 오동동 부지는 오랫동안 공터로 남아 있었습니다. 이곳에 1977년에 한국은행 마산지점이 새 건물을 지어 개점했다가 1993년 창원으로 다시 이전 하면서 공터로 남았습니다.

 

 

 

                   (주차장으로 바뀐  마산형무소 터)

 

오랫동안 공터로 남아 있은 이유는 도심지 한 가운데 있는 부지가 너무 커다보니 쉽사리 팔리지가 않았고, 형무소 자리라서 땅을 사려는 사람이 없었습니다.일제시대 마산형무소는 경남일원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투옥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1920년대 이후에, 밀양경찰서 투탄사건, 청산리승전보 배포사건, 반일문학그룹 독서회사건, 대한독립단 사건 관련자들이 옥고를 치렀습니다.

 

특히 경남의 대표적인 항일독립운동가인 죽헌 이교재 선생도 이곳에서 형을 살기도 했습니다. 창원출생인 이교재 선생은 대한민국 상해임시정부 경상남북도 상주대표를 지낸바 있습니다. 해방이후에는 마산과 창원지역 보도연맹원들이 이곳에 수용된 후 학살당했으며 5·16쿠데타 직후 교원노조사건으로 이봉규 마산중등위원장과 황낙구 초등위원장, 전국양민피학살자유족회 노현섭 회장 등이 역시 마산형무소를 거쳐 갔습니다.(경남도민일보 2002년 5/2일자 인용) 6.25 전후는 비극적인 일들도 많았습니다.

 

국회 양민학살사건진상조사특별위원회는 국회 속기록과 비밀이 해제된 미군 문서을 통해 1950년 6∼7월 마산형무소 재소자 1,681명이 집단학살 된 상황을 구체적으로 기술하고 있습니다.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지난 1950년 7월부터 9월까지 부산과 마산, 진주형무소에 갇힌 재소자와 민간인 3400여 명이 육군본부 정보국과 헌병대, 지역경찰, 교도관 등에 의해 희생됐으며, 그 가운데 576명의 신원을 확인했다고 2009년 3/3일 밝혔습니다.

 

형무소라는 곳이 인간의 자유를 일시적으로 제한하는 아주 가혹한 곳입니다. 나라를 위해, 타의에 의해서 이곳을 tm쳐간 수많은 사람들의 인생을 일순간이나가 저당 잡힌 곳이 형무소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