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청당(1432)

대전의 초기 건축

[굿모닝충청 2017.6.2.이호영 기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건축물은 형태상으로는 당연히 월평동 대덕대로변의 선사유적지에 있는 ‘움집’이다. 하지만 이는 근래에 형태를 고증하기 위하여 교육전시용으로 지은 건물일 뿐, 실증적 기록을 보면 대덕구 계족로 574번길 51(중리동 71)에 있는 쌍청당(雙淸堂)이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건축물이다.

은진 송씨 중시조이며 고려 말부터 조선 초기에 부사정을 지낸 송유(宋愉, 1389-1446)가 회덕으로 낙향한 후 1432년(세종14)에 건립하여 거처하던 별당이다. 건물 이름은 송유의 호인 ‘쌍청(雙淸)’에서 따다 붙였는데 청풍과 명월의 맑은 기상을 마음에 담고자 한 뜻으로, 1524년(중종19)에 1차 중수를 거친 이래 총 7차례에 걸쳐 부분적인 중수를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특이사항으로, 궁궐도 사찰도 아닌 개인 별당을 이렇듯 곱게 단청을 한 것은 조정의 특별한 배려가 있는 경우를 빼 놓고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단독주택으로는 1929년에 세워진 중구 대흥동에 있는 ‘뾰족집(등록문화재 제377호)’이고, 그 다음해인 1930년에 세워진 선화동의 ‘성산교회 목사관(옛 대전전기(주) 사택, 등록문화재 제164호)’이었다. 하지만 2010년도에 뾰족집은 대흥동 재개발 구역 안에 있어 갈등을 겪다가 이축을 핑계로 해체되었고, 설상가상으로 다음해인 12월 19일 새벽 2시에 화재가 나서 완전히 사라졌고, 성산교회 목사관도 화재로 소실되어 현재는 둘 다 없다.

 

동춘당(보물 제209호)

1. 대한민국 보물 동춘당
유형문화재 중 가장 중요한 것을 보물로 지정하는데, 대전에서 유일하게 보물로 지정된 건물이 바로 대덕구 동춘당로 80(송촌동)에 있는 동춘당(보물 제209호)과 동춘 고택이다. 동춘당은 조선 시대 별당 건축의 표본이라 할 수 있는 이 건축물은 조선 효종 때 병조판서를 지낸 동춘당 송준길(宋浚吉, 1606-1672)이 관직에서 물러난 후 1653년 건립하여 살던 곳으로 그의 호를 따라 건물 이름을 지었다.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남향으로 배치되어 있으며, 구조는 자연석으로 쌓은 기단 위에 화강암 네모뿔 모양의 주춧돌을 놓고 기둥을 세웠다. 지붕은 팔작지붕으로 그 규모가 그리 크지 않지만 단아하고 간소한 조선 중기의 건축양식을 잘 보여준다.

동춘 고택은 동춘 송준길이 낙향하여 1643년 지은 조선의 전형적인 반가의 주거 공간이다. 인접해 있는 쌍청당, 별당으로 지어진 동춘당과 더불어 원래의 형태가 잘 보존되어 있는 역사문화의 가치를 지닌 건축물이다.

동춘 고택은 안채, 사랑채, 사당채, 별당채로 구성되어 있다. 안채와 사랑채가 살림을 위한 주거 공간이라면, 사당채는 ‘송씨가묘’로 조상들의 위패를 모신 추모 공간이며 별당채는 동춘당으로 교육과 강학의 공간이다.

 

 

 

남간정사(1683년)

2. 남간정사
대전 지역에 오랫동안 거주하여 내려온 토박이 가문을 보면 회덕을 중심으로 한 은진 송씨 문중, 식장산 앞 돌다리를 설치한 고성 남씨 문중과 보문산 남향받이에 살던 안동 권씨 문중, 연산 쪽의 광산 김씨 문중을 꼽을 수 있다. 그중 가장 많은 권세를 누리던 은진 송씨를 대표하던 노론의 거두인 우암 송시열(1607-1689)이 소제동에 거주하면서 후학을 가르치려고 1683년에 설립한 동구 가양동의 남간정사(南澗精舍)는 맑은 물을 이용한 선조들의 지혜가 돋보이는 건축물이다.

이 남간정사의 조경은 동쪽의 계곡에서 흘러들어오는 물이 연못 앞에서 조그만 낙수를 만들고 정사의 대청 밑을 거쳐 흘러온 물과 연못에서 합쳐진다. 흔치 않은 모습으로 낙수 주변은 대나무와 잘 어우러진 작은 숲이 있다. 한쪽에 둥근 섬을 만들어 왕버들을 심어 운치를 더해주어, 이웃에 함께 조성된 우암사적공원과 함께 대전을 대표하는 전통 문화유적으로 자리잡고 있다.

 

옥류각

3. 옥류각
전통 건축물 중 계곡에서 맑게 흐르는 물위에 세워진 유일한 집은 계족산 비래사 경내 입구에 있는 옥류각(玉溜閣, 대덕구 비래동)이다. 1639년에 세워진 이 2층의 누각은 조선 효종 때 병조판서를 지낸 동춘당 송준길(同春堂 宋浚吉, 1606-1672)이 우암 송시열과 시남 유계, 송애 김경여, 창주 김익희 등 당시의 석학들과 학문을 연마하고 가르치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이 각의 이름은 계곡에서 흐르는 윤수(潤水)가 사계절 옥(玉)과 같이 흘러 내려오고 있다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바위 사이로 흘러내리는 물이 누각 아래로 스치는 모습은 참으로 기이하다.

 

숭현서원(1995년)

4. 숭현서원
엑스포 과학공원에서 회덕으로 가는 갑천변 원촌삼거리의 서편에 자리한 숭현서원은 대전 지역에서 처음 세워지고 최초로 사액을 받은 서원이다. 이곳에는 조선 시대 명유인 정광필, 김정, 송인수, 김장생, 송준길, 송시열, 이시직, 송시영 등 8명이 배향되어 ‘팔현묘’라고도 하며, 대전광역시 기념물 제27호이다. 1583년 창건하였다 소실되었으나, 1995년부터 2001년까지 복원하였다.

원래 현재의 중구 용두동(회덕설도 있음)에 있었던 것으로 임진왜란 때에 소실되었는데, 1609년에 송남수가 주도하여 현 위치로 이건하고 ‘삼현서원’이라 하였다, 그해 이시직의 청액상소로 ‘숭현(崇賢)’이라 사액되었고, 이전에는 정광필, 김정, 송인수 등 3현인을 배향하여 ‘삼현서원’이라 하였다.

구성은 다른 서원과 마찬가지로 사당, 강당, 동재, 서재 등을 구비하고 있으며, 또한 문루로 영귀루(詠歸樓)가 있었다. 그러나 1868년 대원군의 서원철폐 정책에 의해 모두 헐리고 묘정비만 남았다. 향교는 요즘의 공립학교이고, 서원은 사립학교인 경우이다. 이러한 서원이 인근 회덕향교, 진잠향교와 함께 대전에 있다는 사실은 흔치 않은 경우다.

 

대전부르스의 탄생

대전의 발전과정을 보면 초기 건축은 도청과 대전역을 잇는 커다란 축을 중심으로 한 중앙통과 대전역에서 남북으로 가로질러 신탄진편의 삼성동과 옥천 방향의 원동, 인동의 가로변을 중심으로 하여 세 갈래의 축으로 건축물이 발전하여 나가기 시작하였다.

철도 부설과 함께 계획적으로 발달된 도시인 대전은 일제 강점시대에 회덕이 한국인들의 중심이던 축을 지금의 대전역으로 끌고 와서 대전역을 중심으로 산내 쪽을 향하는 남북축으로 계획되었으나, 충남도청이 세워지면서 현 중앙로를 중심축으로 발달하게 되었다.

 

1950~70년대 대전역 모습

5. 대전역사
대전역사는 1928년에는 현 위치에 양측에 두 개의 돔을 갖춘 서구식 건물(목조, 200평)로 낙성되었으나, 1950년 한국전쟁 때에 소실되어 환도 직후 남은 부분만 보수하여 임시 사용하다가, 당시 미국 정부의 전쟁복구기금으로 건축자재를 지원받아 1958년 착공하여 그 해 말 대전의 첫 현대건축물로 준공되었다.

‘대전부르스’의 여운이 담긴 대전역사는 대전 지역 현대건축의 시발점으로 5m×6m의 기본 모듈에 충실한 평면과 입면의 아름다운 조화로 극찬을 받았다. 대전역사를 설계한 건축가 이상순 씨는 국립 철도고등학교와 서울대학교에서 건축을 전공한 원로작가로 꼴라주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던 26세라는 젊음을 이곳에 바치며, 미국 Betel사의 방식대로 설계자가 직접 감리에 참여, 현장에 상주하면서 감리를 하였다.

특히 대합실의 넓은 벽면 상부에 PC 패널식으로 꼴랴주를 제작하여 내부에 설치하였으며, 시공은 아주토건에서 하였다. 그러나 2004년 봄 한국고속철도(KTX)가 개통되면서, 본 건물은 없어지고, 소제동 쪽으로 관통이 되어 지하차도가 뚫리게 된다.

 

충남도청(1932년)

6. 옛 충남도청
현존하는 근대 건축물을 살펴보면, 1950년 전시 작전 통수권을 미국에 넘겨주는 조약을 체결한 장소가 바로 한국전쟁 당시 임시 수도였던 대전의 충남도청 2층 회의실이다.

1932년 ‘스스끼 겐지로’가 설계한 충남도청과, 대흥동에 있는 충남도청 관사촌이 들어서면서 실질적으로 대전이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세계적으로 유행하던 동경제국호텔에까지 사용한 갈색 스크래치 외벽타일을 사용한 건물 중 남아있는 유일한 건물로 1930년 평양에 있는 평남도청과 유사한 평면으로 계획되었다.

당초 2층에서 제2공화국 시절에 넓은 창을 두른 3층을 증축하였다. 그 해엔 5개월이라는 짧은 공사기간으로 서양식 평면에 일본식 구조를 접합시킨 충남도청 관사촌이 세워졌으며, 한국전쟁 당시 대통령이 머물면서 숙소로 사용하였다.

 

거룩한 말씀의 수녀회 성당

7. 거룩한 말씀의 수녀회 성당
대전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로는 1921년 세워진 목동에 있는 ‘거룩한 말씀의 수녀회 성당’을 들 수 있다. 이 성당은 유럽 중세 성곽에서나 볼 수 있는 첨탑을 소유한 아름다운 자태를 하고 있는데, 한국전쟁 때는 인민군 치안본부로 쓰이면서 양민학살과 아일랜드 선교사 2명이 순교한 현장이기도 하다.

이 성당이 있는 목양마을은 낮지만 넓은 언덕으로, 대전천변 간이비행장과 목동형무소가 있는 채소밭 뒤 어덕마을로 통하는 길목이었다. 충남여고와 대성고등학교 사이인 이 언덕은 시내를 내려다보기에 좋은 전망을 지닌 은진송씨 문중 소유의 대지였다.

여기에 1921년 세운 대전 지역 최초의 성당인 거룩한 말씀의 수녀회 성당은 단순한 구조지만, 전형적인 중세의 건축양식인 고딕식으로 장방형 평면에 종탑 높이가 16.5m로 우뚝 솟아 본 건물과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고 있다. 그 우아한 자태는 건물 자체가 성모 마리아상을 보는 느낌이 든다.

 

대전 갤러리(옛 대전여중 강당-1937년)

8. 옛 대전여중 강당
대흥동 문화예술의 거리에 있는 대전여자중학교는 대전 여성교육의 산실이다. 점차 학생 수가 줄면서, 1988년에 본관동은 교정 반대쪽에 다시 지어졌고 강당만 남게 되었다. 당시 교육감의 배려로 ‘대전 갤러리’로 변신하는데, 이때 대전여중을 졸업한 일본인이 모교를 방문하였다가, 본관을 비롯한 다른 옛 건물은 헐렸으나 강당만이 남아있어 겨우 모교임을 확인하였다고 한다.

이 강당은 아르누보형식의 곡선 박공지붕이 특히 아름다운 입면을 구성하고, 처마 아래는 고전주의적 벽돌 치장쌓기로 처마선이 부드러움을 강조하고 있으며, 창문주변의 인방은 들인 콘크리트로 설치되었다. 측면 모서리는 벽돌을 일정하게 내어쌓는 효과를 내어 지붕과 잘 어울리는 모습이다. 이 입면의 지붕 모양은 남측 새 교사의 디자인에도 응용되었다.

당초에는 지붕은 마름모형의 망형 스레트로 파도치는 모습이 생동감 있게 보였으나, 1996년도 개보수를 하면서 녹색 아스팔트싱글로 바뀌었다. 2002년 대전광역시 지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옛 한국은행 대전지점(1952-2000년)

9. 옛 한국은행 대전지점
규모나 높이보다 더 의미가 있는 중요한 건축물로 꼽는다면, 거의가 최근에 사라진 건축물들이 많다. 우선 꼽을 수 있는 건축물이 1959년에 준공된 대전역사와 대흥동 중앙통에 있던 한국은행 대전지점(1953)과 한빛은행 대전지점(1957)이다. 이 건물들은 우리나라 건축계의 원로인 유원준의 작품이다. 한국전쟁 직후 우리나라의 최고급 건물은 한국은행이었으며, 대전지점은 한국전쟁 이전에 착공하여 휴전 후인 1953년에 준공하였다.

이 건물은 오랜 시절 동안 대전의 중앙을 지켜 온 건물이었으나, 2000년 12월에 어려운 경제사정을 못 이기고 세인의 무관심 속에서 도심을 잇는 지하철공사로 인하여 철거되고 말았는데, 당시 마지막 철거론이 대두되었을 때, 심의 과정에서는 지하역사로 개축하는 안으로 채택되었으나, 시공 측에서 안전을 이유로 철거하여 많은 아쉬움을 주고 있다.

 

대전창작센터(구 국립농수산물품질관리원 충청지원, 1958년)

10. 대전창작센터
대흥동성당 건너편에 있는 옛 ‘국립 농산물 품질관리원 충청지원’은 특이한 입면을 가진 건물로 대전 지역 1세대 건축가인 배한구 소장이 설계하고, 일성건설이 시공한 건물이다. 모임지붕에 조적조 2층 건물이지만 외향적인 건축요소가 많이 표현돼 있으며, 특히 서향창이 많이 설치되는 방향적인 불리한 여건을 조절 가능한 수직 날개벽을 설치하여 극복하였다.

이 건물이 지어지던 1950년대에는 대전 도심에 지은 건축물이 드물다. 모두가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기에 세워진 건물들로 지금은 거의 다 헐렸는데 오직 이 건물만 국가 등록문화재 100호(2004년)로 지정받아 새 단장을 하였다.

당초 지붕은 평슬라브로 계획되었으나, 그 해 여름 준공 일 년밖에 안 된 평지붕의 한일은행 대전지점과 안산부인과 의원이 누수하자가 발생하여 설계 변경하여 시멘트 기와를 얹혔는데, 외형상으로 잘 맞아 들어가 준공한 지가 50년도 채 안 된 건물이 문화재가 된 드문 경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