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대, 한국전쟁이 끝나고 삶이 궁핍하여 여가(餘暇)를 즐길 마음의 여유(餘裕)도 없었던 시절, 그 무렵의 겨울이 되면, 내고향 시골마을에서는 논, 밭 농사의 가을걷이도 모두 마쳤고, 김장도 담궈 뒷켠 담장 밑 양지 쪽 텃밭에 묻어 두었으니 먹을 문제는 해결이 되었었다. 그리고 초가지붕도 이엉을 엮어 새로 이었고,  안방, 사랑방, 건너방의 미닫이, 여닫이, 드닫이 방문과 봉창(封窓)도 모두 창호지(窓戶紙)를 새로 바르고 문풍지도 붙여 외풍(外風)을 막았고, 나뭇간에는 콩대, 깻대를 비롯하여 솔잎깔비에 장작까지 겨울나기 땔감을 가득 쟁여놓아 추위에 떨 걱정도 덜었었다.


이렇게 월동준비(越冬準備)와 농삿일이 끝난 농한기(農閑期), 낮의 길이가 짧은 동지섣달, 우리들의 보통 엄마들은 길쌈이라 불리는 기나긴 공정(工程)을 시작하니, 목화 솜이나 가늘게 찢은 삼(大麻)껍질을, 물레에 돌려 실을 뽑고, 마당에 길게 메어 널어 풀 먹이고 말리기를 거듭한 뒤, 베틀에 걸고 삼베나 무명베를 짜셨다. 

그리고 우리들의 보통 아빠들은 사랑방 한켠에 놓인 가마니틀로 가마니를 짜시거나, 내외분이 함께 돗자리를 짜 모아, 닷세마다 열리는 장날에 내다 팔아 살림에 보태곤 하시었다.

그러나 전기도 없고 흑백TV도 없던 그 시절 어둠이 내리는 저녁이 되면, 엄마들은 침침한 석유등잔불 앞에서 양말을 기우거나 뜨게질도 하고, 혹은 "홀치기"라고 불렀던 농가부업도 하면서, 읍내 소리사에서 삐삐선으로 보내주는 유선방송 스피커의 라디오 연속극을 들으면서 동지섣달 긴긴밤을 보냈지만, 사랑방에 혼자서 무료(無聊)하게 새끼를 꼬고 계시던 우리의 아빠들은, 슬그머니 사거리 방앗간 옆 주막집을 찾아, 탁배기 한잔을 앞에 놓고 주모의 넉살을 들으며 치맛고름을 만지작거리거나, 담배연기 자욱한 봉놋방에서 화툿장을 붇잡고 구삥, 장땡을 찾으시니, 푼돈이 바닥나면 본전 생각이 간절하여, 주모에게 어음을 써주고 고리채(高利債)를 빌리니, 알곡을 맡겨놓고 받은 방앗간 전표는 하룻밤 사이에 주인이 바뀌기도 한다.  


가끔 읍내 장터 옆 공터에 써커스단이나 창극단(唱劇團)이 들어오면, 매일 바뀌는 레퍼토리를 다 보고 싶지만 "쩐"이 문제라, 겨우네 너댓번으로 만족하지만 약장수가 들어왔다 하면 입장료가 필요없는 무료입장이라, 매일같이 다니다가 간혹 공짜구경을 하는것이 미안하신 어르신들은, 효능도 믿지 못하는 환약(丸藥)이나 경옥고(瓊玉膏)를 한 두 가지 사시기도 하였었다.

그러다가  우시장 옆의 낡은 농협 창고에, 바닥에 가마니를 깐 가설극장이 들어와  "성춘향" 영화라도 틀게되면, 저녁상영시간 두세시간 전부터 우시장에는 강 건너고, 고개 넘어온 사람들로 북적이고, 이들을 바라보고 뻥튀기, 솜사탕 장수가 몰려들었고, 한켠에는 천막국밥집과  홍합, 오뎅을 파는 포장마차가 펼쳐지곤 하였었다.

다행이도 나의 고향, 경북 칠곡 왜관에는 "캠프케롤"이라는 미군부대가 56년부터 주둔하여, 다른 곳 보다 경기가 낳은 탓에 타지역보다는 조금 일찍 극장이 생겼으니, 전성기에는 읍내에 4개의 극장이 관객들을 불러 모았었다.

한국영화의 큰별 황정순과 신성일

50년대 중후반부터 시작된 한국영화의 요람기는, 김승호, 최무룡, 김진규, 신영균, 김석훈, 남궁원 등 멜로스타와, 박노식, 황해, 장동휘, 허장강, 독고성 등 액션스타들이, 최은희, 주증녀, 도금봉, 문정숙, 손미희자, 조미령등 미녀스타들과 함께 이끌었고,

60년대 부터 신성일이 등장하여 엄앵란, 김혜정, 최지희 등과 함께 관객몰이에 나섰으며, 그후 문희.남정임.고은아의 1차 트로이카 시대에서, 고은아가 일찍 합동영화사 곽정환 사장과 결혼을 하자 윤정희로 바뀌어 한국영화의 전성기를 연다.

<왼쪽부터 문희, 남정임, 윤정희>

보통사람들에겐 그림의 떡인 흑백TV를 부잣집 담 넘어로 보거나, 만화방에서 돈을 내고 김일의 레슬링이나 아폴로우주선의 달착륙 장면을 보던 시절에는, 정윤희.장미희.유지인의 2차 트로이카가 이끌던 멜로영화와, 임예진.이덕화.김승현.전영록 등이 주연한 하이틴영화가, 물 밀듯이 밀려오는 대작 헐리웃 영화속에서 선전을 하며 스크린을 지켰으나, 80년대 초, 컬러TV와 비디오 테잎에 밀려 한국영화는 혹독한 침체기를 맞는다. 



그럼에도 헐리웃의 대작들이 물 밀듯이 밀려 들어와 한국영화의 설 자리가 없어지자, 1985년 정부에서는, 스크린쿼터제라 불리든 "한국영화 의무상영제"를 고쳐, 연간 상영일수 1/3 이상에서 2/5 이상으로 하고, 인구 30만명 이상의 도시에서는 외국영화와 한국영화를 번갈아 상영하는것을 의무화 하였다.

90년대 말부터 한국영화는 서서히 일어나 100만관객을 넘어서고, 2000년대부터 생겨나는 멀티스크린 영화관에 힘입어 1000만 관객시대에 이르렀으니, 한미FTA 체결 때 미국의 압력으로  2006년에 고쳐진, 스크린쿼터제의 연간 한국영화 의무상영일수 1/5 이상 규정은 무색하게 되었으나, 오히려 특정 한국영화가 스크린 점령하여, 관람객의 선택의 폭이 좁아지는 역효과도 생겨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