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조혜능의 법을 계승하여 중국 선종(禪宗)의 황금시대를 펼친 마조도일(馬祖道一)과 석두희천(石頭希遷) 문하의 법은 다만 분별에서 벗어난 불이중도(不二中道)를 말할 뿐, 어떤 수행도 하라고 말하지 않는다. 즉, 중국 선종은 돈오무수(頓悟無修)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선 마조 문하인 홍주종(洪州宗)을 대표하는 마조․백장․황벽․임제의 말을 통하여 그들이 깨달음과 수행을 어떻게 말하는지 살펴보자.
(1) 마조도일
①돈오(頓悟)
“만약 재질이 뛰어난 중생이라면 문득 선지식의 가르침을 만나 말을 듣고서 곧장 깨달아, 다시는 계급과 지위를 거치지 않고 즉시 본성을 깨닫는다.”
말을 듣고서 곧장 깨달아 절차를 거치지 않고 불이법(不二法)인 본성을 본다. 깨달음은 말을 듣고서 곧장 통하는 돈오(頓悟)이다.
②무수(無修)
어떤 스님이 물었다.
“어떤 것이 도(道)를 닦는 것입니까?”
마조가 답했다.
“도는 닦는 것에 속하지 않는다. 만약 닦아서 이룬다고 하면, 닦아서 이루어지는 것은 다시 부서지니 곧 성문(聲聞)과 같을 것이다. 만약 닦지 않는다고 하면, 곧 범부(凡夫)
와 같을 것이다.”
“어떤 견해(見解)를 내어야 도에 통달할 수 있습니까?”
“자성은 본래부터 완전하여 모자람이 없다. 그러므로 다만 선이니 악이니 하는 일에 머물지 않기만 하면, 도 닦는 사람이라고 일컬을 것이다. 선에 머물고 악을 제거하며, 공(空)을 관(觀)하고 선정(禪定)에 들어가는 것 등은 곧 조작(造作)에 속한다.
만약 다시 밖으로 치달려 구한다면, 더욱더 멀어질 뿐이다. 그러므로 다만 삼계(三界)를 헤아리는 마음이 없도록만 하여라.” 도는 수행에 속하지 않는다. 다만 분별에서 벗어나 불이법에 통할 뿐이다. 수행을 해서 깨달음에 이른다고 하면 이것은 분별하여 조작하는 것이니 중생의 망상이다. 분별망상에 오염되지 않으면 본래 아무런 문제가 없다.
(2) 백장회해
①돈오(頓悟)
물었다.
“어떤 것이 대승(大乘)에서 도(道)에 들어가 문득 깨닫는 법[돈오법(頓悟法)]입니까?”
백장이 답했다.
“그대는 먼저 모든 인연을 버리고 온갖 일을 쉬어라. 좋은 것이든 좋지 않은 것이든 세간의 온갖 것들을 전부 내려놓아라. 기억하지도 말고, 생각하지도
말고, 몸과 마음을 내버리고 자재(自在)하게 되어라. 마음이 나무나 돌과 같으면, 입은 말이 없고 마음은 행하는 것이 없다. 마음이 허공과 같으면 지혜의 태양이 저절로 나타나니, 마치 구름이 열리고 해가 나타나는 것과 같다.
모든 얽매임 을 모두 쉬어서 탐냄․성냄․좋아함․집착함․더러움․깨끗함 등의 분별심 이 사라지고, 오욕(五欲)과 팔풍(八風)을 만나도 보고․듣고․느끼고․알고에 묶이지 않고, 온갖 경계에 정신을 빼앗기지 않는 신통묘용(神通妙用)이 저절로 갖추어지니, 곧 해탈한 사람이다.”
대승불교에서 도(道)에 들어가는 돈오법(頓悟法)이란, 분별에서 벗어나 불이법(不二法)에 통하여 분별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어서 어디에도 걸림이 없이 자유로운 것이다. 돈오법은 곧 모든 분별에서 벗어난 불이법이고 공(空)임을 밝히고 있다.
②무수(無修)
“닦아서 깨달음을 얻는다.” “닦음도 있고 깨달음도 있다.” “이 마음이 곧 부처다.” “지금의 마음 그대로가 부처다.”라고 말한다면, 이것은 부처님의 말씀이지만, 불료의교(不了義敎)의 말씀이고, 차어(遮語)가 아니고, 총어(總語)이고, 한 되를 짊어지는 말이고, 더러운 법 쪽을 선택한 말이고, 순유(順喩)이고, 죽은 말이고, 범부 앞에서 하는 말이다.
“닦아서 깨닫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닦음도 없고 깨달음도 없다.”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다.”라고 말한다면, 이 역시 부처님의 말씀이지만, 요의교(了義敎)의 말이고, 차어(遮語)이고, 별어(別語)이고, 백 섬을 짊어지는 말이고, 삼승(三乘)의 가르침 밖의 말이고, 역유(逆喩)의 말이고, 깨끗한 법 쪽을 선택한 말이고, 살아 있는 말이고, 공부의 지위(地位)에 있는 사람 앞에서 하는 말이다.
선종(禪宗)의 돈오무수(頓悟無修)“수행하여 깨닫는다.”거나 “수행도 있고 깨달음도 있다.”는 말은 분별심에서 벗어나지 못한 범부에게 알맞은 죽은 말이고, “수행하여 깨닫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거나 “수행도 없고 깨달음도 없다.”는 말은 공부하는 사람에게 하는 살아 있는 참된 말이다.
“수행하여 깨닫는다.”거나 “수행도 있고 깨달음도 있다.”는 말은 수행과 깨달음이라는 분별을 인정하는 말이고, “수행하여 깨닫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거나 “수행도 없고 깨달음도 없다.”는 말은 수행과 깨달음이라는 분별을 인정하지 않는 말이다.
살아 있는 말이란 수행과 깨달음이라는 분별을 인정하지 않는 말일 뿐만 아니라, 어떤 분별도 절차도 인정하지 않는 말이다. 이것이 견성(見性)이고 불이법이다. 그러므로 모든 분별에서 벗어나는 것이 참된 수행이다.다만 모든 소리와 색깔을 벗어나고 또 벗어남에도 머물지 않고 또 머물지 않는다는 생각에도 머물지 않으면, 이것이 수행이다.
이렇게 모든 분별에서 벗어나 한 생각에도 머물지 않는 것은 곧 불이중도(不二中道)의 깨달음이다. 결국 참된 수행이란 다만 불이중도의 깨달음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일 뿐이니, 깨달음 밖에 따로 수행은 없다.
(3) 황벽희운
①돈오(頓悟)
“다만 곧장 자기의 마음이 본래 부처임을 문득 깨달아, 얻을 법이 하나도 없고 닦을 수행이 하나도 없으면, 이것이 위없는 깨달음이고 참되고 변함 없는 부처이다.” “즉각 마음이 없으면 곧장 본래의 법이다. 마치 힘센 역사(力士)가 이마에 박힌 구슬을 잃어버리고 밖에서 찾아다니며 온 세계를 두루 다녔으나 마침내 찾지 못했는데, 지혜로운 사람이 가리켜 주니 그 순간 본래의 구슬이 그대로 있음을 스스로 보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따라서 도를 배우는 사람이 자기의 본래 마음을 잃고 자기의 본래 마음이 부처임을 알지 못하고, 밖에서 찾고 구하며 애써 노력하여 순차적으로 깨달으려 한다면, 무한한 세월을 애써 구하더라도 영원히 깨달음을 이루지 못할 것이니, 당장 마음이 없음만 못하다.”
마음을 깨닫는 것이 깨달음인데, 마음은 본래부터 언제나 완전히 갖추어져 있으므로 즉각 깨달을 수 있고 단계적으로 찾아가는 것은 아니다. 마치 자기 머리를 찾는 것과 같아서, 마음이 마음 스스로를 깨닫는 것이므로 깨달음은 언제나 돈오(頓悟)이다. 언제나 분별이 망상이므로 분별에서 벗어나 마음이 둘이 아니어서 찾을 마음이 따로 없다면 즉각 깨달음이다.
②무수(無修)
견해의 장애에 가로막히기 때문에 조사께선 모든 중생의 본래 마음의 본바탕이 본래 부처로서 닦음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점차적인 단계에 속하는 것도 아니고 밝음도 어둠도 아님을 곧장 가리키셨다.” “오직 이 한 개 마음 뿐, 얻을 수 있는 법은 티끌만큼도 없다.
바로 이 마음이 부처이다. 오늘날 도를 배우는 사람들은 이 마음의 본바탕을 깨닫지는 못하고 곧장 마음 위에서 마음을 내니, 밖에서 부처를 구하는 것이고 모습을 붙잡고 수행하는 것이므로, 모두가 악법(惡法)이고 깨달음이 아니다.”
“이 마음은 곧 마음 없는 마음이니, 모든 모습을 벗어나 중생과 부처가 전혀 차별이 없다. 다만 마음이 없기만 하면 곧장 마지막 깨달음이다. 도를 배우는 사람이 만약 당장 마음이 없지 못하다면, 아무리 오랜 세월 수행(修行)하더라도 마침내 깨달을 수 없으니, 삼승(三乘)에 매여서 해탈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설사 무한한 세월 동안 정진수행하고 모든 지위를 거치더라도, 한 순간 깨달을 때에 이르러서는 다만 원래의 자기 부처를 깨달을 뿐, 그 위에 다시 한 물건도 더할 수 없다. 깨달았을 때에 오랫동안 행해 온 노력을 돌이켜 보면 모두가 꿈속의 허망한 짓일 뿐이다.” 수행은 모습을 분별하는 것이므로 깨달음이 아니다. 수행하면 깨달음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당장 모든 분별에서 벗어나 마음이라는 분별조차도 없으면 깨달음이니, 마음조차 없어진 깨달음에서 다시 수행할 일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대가 한순간 마음에서 의심하는 곳이 곧 부처와 마귀이다. 그대가 만약 온갖 법은 생겨나지 않으며 마음이 환상처럼 조화를 부린다는 것을 밝게 깨달으면, 다시는 하나의 경계도 없고 하나의 법도 없어서 곳곳이 모두 깨끗할 것이니, 이것이 바로 부처이다. 그러나 부처와 마귀는 더럽거나 깨끗한 두 가지 경계이다.
내가 보기에는 부처도 없고, 중생도 없고, 옛날도 없고, 지금도 없다. 깨닫는 자는 곧장 깨달을 뿐,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닦음도 없고, 깨달음도 없고, 얻음도 없고, 잃음도 없고, 언제든 또 다른 법이 없다. 설사 이것을 넘어서는 하나의 법이 있다고 하더라도, 나는 그것이 꿈과 같고 환상과 같다고 말한다.”
곧장 깨달으면 모든 분별경계는 사라지니, 깨달음도 없고 수행도 없고, 부처도 없고 마귀도 없다.
“그대들은 곳곳에서 ‘도(道)에는 닦을 것도 있고 깨달을 것도 있다.’라고 말들 하지만, 착각하지 마라. 설사 닦아서 얻는 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모두가 삶과 죽음을 떠돌아다닐 업(業)이다. 그대들은 또 ‘육바라밀을 고루 닦는다.’라고 말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모두가 업을 짓는 일이다. 부처를 구하고 법을 구하는 것은 곧 지옥 갈 업을 짓는 것이고, 보살을 구하는 것 역시 업을 짓는 일이며, 경전을 보고 가르침을 살피는 것 역시 업을 짓는 일이다.
부처와 조사는 일 없는 사람이다.” “어떤 부류의 눈먼 중들은 배불리 밥을 먹고는 곧 좌선관행(坐禪觀行)을 하며, 흘러나오는 생각을 꽉 붙잡고서 일어나지 못하게 하고, 시끄러움을 싫어하고 고요함을 찾으나 이것은 외도(外道)의 법이다. 조사(祖師)가 말했다.
‘그대가 만약 마음을 머물러 고요함을 살펴보고,
마음을 들어 밖으로 비추어보고,
마음을 거두어 안으로 깨끗이 하며,
마음을 모아서 정(定)에 든다면,
이와 같은 것들은 모두가 조작하는 짓이다.’
그대는 지금 이렇게 법을 듣는 사람인데, 이 사람을 어떻게 닦겠으며, 이 사람을 어떻게 깨닫겠으며, 이 사람을 어떻게 꾸미겠는가? 이 사람은 닦을 수 있는 것이 아니며, 꾸밀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스님들이여! 여러 곳에서는, ‘닦아야 할 도(道)가 있고, 깨달아야 할 법(法)이 있다.’고 말들을 하는데, 그대들은 무슨 법을 깨닫고 무슨 도를 닦는다고 말하는가?
그대들이 지금 작용하는 곳에 무엇이 부족하길래, 어느 곳을 닦아서 보충하겠다는 것인가? … 그러므로 말한다.
‘만약 사람이 도를 닦으면 도는 행해지지 않고,
만가지 삿된 경계가 다투어 나타난다.
지혜의 칼을 빼면 한 물건도 없으니,
밝음이 나타나지 않았는데도 어둠이 밝아진다.’ 그러므로 옛 사람은, ‘평소의 마음이 바로 도이다.’ 라고 말했던 것이다.” 수행이란 마음을 가지고 마음을 닦는 것이니 헛된 망상이고 엉터리 조작일 뿐이다. 오직 분별에서 벗어나 불이중도에 통달하여 한 물건도 없고 아무 일도 없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