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가 여물기 전까지 아버지랑 삼춘이랑 마을어른들은 그저 '수매가'가 높게 책정되길 바랬다.

여느때와 달리 벼포기도 튼실했고, 탐스러웠다. 어린 나는 뭔소린지 몰랐지만, 골목 어귀나 논 길을 지나다 뵙기라도 하면 내가 공손하게 인사하는 어르신들이 말씀하시는 소리였다.

누에가 마지막 잠을 자고 일어나 왕성하게 식탐을 자랑하던 때,

숟가락 들 힘이 있는 이라면 누구나 뽕잎을 따고나르며,

누에에 뽕잎을 주고 뽕줄기와 누에 똥을 갈아주고 또 뽕잎을 주던 24시간 비상체제도 그 해 유난히 튼실했던 벼포기 얘기를 들으며

누에고추 수매해서 외지에 있는 누구에겐 뭐해 주고, '할매, 할배'는 뭐해주고...

'너는 뭐해주까?' 소리가 집집마다 밤새 들리던 나날이었다.

우리동네는 모두 논농사를 지었고, 면사무소가 있는 동네로 늘 출퇴근하는 2집은 누에를 안했다.

 

논물도 충분하고, 논에 물대기하느라 서로 다툼도 거의 없었던 그 해,,,

여름방학 시작한지 얼마 안 된 8월초부터 비가 안왔다.

비도 안왔다. 좔좔좔 흐르던 또랑 물도 졸졸졸 흐르더니 이젠 할짝할짝 흘렀다.

아무리 퍼다써도 끝없이 나오던 마을샴도 물동이로 뜰 수 있을만큼 차려면 한나절은 기다려야 했다.

 

또랑물로 마르고 마을샴도 마르니 집집마다 빨래줄에 옷이 걸리지 않았다.

집에 우물이 있던 2집에서 사람들이 먹을 물을 가져오느라 2집으로 가는 길이 빤닥빤닥해졌다.

 

여름방학 숙제로 '꼴 해오기'를 하고 오던 길. 길 양 옆에 있는 논이 갈라져 있는 걸 봤다.

할짝할짝 흐르던 또랑물이라도 제논에 대려고 밤을 새웠다.

면직원도, 군직원도 자주 왔다갔다.

무슨 ~지원자금인가 하는 얘기가 나오더니, 군청에서 관정을 팠다.

다들 자기 논 근처 관정에서 물이 나오길 빌었다.

 

우여곡절, 우리집 논 근처 관정에서 수맥이 있다는 진단을 받고

무슨 펌프를 달았다.

 

펌프는 전기로 작동한댄다. 마을 2집에 있는 우물에서는 마중물만 붓고 손으로 펌프질을 하면 됐는데...

어쨌든 우리집 두꺼비집 근방에서 전기를 따와서 펌프를 돌렸다.

전봇대가 있는 큰 길가에 옆에 있는 다른 집 논에는 전봇대에서 바로 전기를 따왔다.

가끔 물이 안 올라오는 때도 있었다.

이 때 면직원인가 하는 사람이 전선을 따라 펌프까지 주욱가다가 어디를 손보거나 하면 다시 펌프가 돌아가기도 했다.

"여기하고 저기를 가끔씩 살펴보고 잘 눌러놔라"고 했다.

 

지금 생각하니 접촉불량인 듯 했다.

몇십년만의 가뭄이라고 했고, 쌀 증산에 '국가적 노력'을 하던때라

많고 많은 농촌에 관정을 파고 펌프를 설치하고 전기줄이 들어갔을테니

온전하게 설치한데가 어디 있었을까.

 

"불끄고 다녀라, '전기세' 많이 나온다" 소리가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터라 내심 전기요금이 궁금했다.

그래도 아버지는 전기요금 걱정은 한마디도 안했다.

지금 생각하니 커버나이프 스위치 1차에 전선을 물렸을 것이다.

펌프를 설치한 이도, 전기줄을 가져와 연결해준 이도

'식량 증산'을 위해 그냥 그렇게 했을 것이다.

 

그 해 몇십년만의 가뭄을 극복하기 위해 펌프를 설치한 집이 아주 많았는데,

전기요금 많이 나왔다는 얘기를 들은 기억이 없다.

아니, 몇십년만의 가뭄으로 쌀 소출량이 적어 그런 얘기를 할 정신이 없었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