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나갈 때 사천이 아니라 삼천포로 빠지면 좋다. 시군통합으로 삼천포가 사천시로 통합된 지 여러 해가 지났지만, 아직도 비릿하면서도 짭조름한 바다이야기를 할 때는 사천보다는 삼천포로 부르는 게 입에 착 감긴다. 옛 삼천포 도심 속의 공원, 노산공원. 옆에 있는 어시장에 들르면서도 그냥 그냥 지나친지 여러 번. 불과 십수 년 전에는 몇 번을 찾았는지 모르고 아주 어릴 적에는 팔각정에서 나들이 나선 고모들 사이로 아장아장 걸어 다녔던 빛바랜 흑백 사진의 추억도 있는 곳이다. 오늘은 어시장이 아니라 타는 가을 강(江)을 보러 바닷가에 자리 잡은 노산공원을 찾았다.

 

경남 진주에서 사천 삼천포항으로 가는 길은 옛 철길을 넓혀 만든 왕복 4차선 일반 국도를 따라가는 것도 좋지만, 시간을 딱히 정해 놓지 않았다면 조금 돌아가면 더 좋다. 왕복 4차선 도로를 내달리다 남양동 주민센터에서 동쪽으로 방향을 틀면 ‘실안 노을 길’ 너머의 아름다운 풍경을 만난다. 제주도 올레길이 부럽지 않은 이 길은 특히 해질 때 바닷가 일몰이 아름답기로 손꼽히는 곳이다. 해질녘 가을 강(江)으로 변하는 남해를 구경할 수 있다. 실안 노을 길 끝에는 우리 대한민국에서 아름다운 길로 뽑힌 3.4㎞에 걸친 삼천포·창선대교가 시원한 가을 하늘을 배경으로 우리를 반긴다. 오늘은 이 다리를 눈으로 구경하고 지나쳤다. 싱싱한 어시장도 그냥 지났다.

 

 

옛 삼천포 도심 속에 있는 노산공원은 어시장과 이웃하고 팔포매립지 횟집과 붙어 있어 접근이 쉽다.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데 옛길을 더듬어 올라가 첫사랑 연인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하면 어쩔까 하는 두려움보다는 어떻게 세월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 차라리 만나지 않았으면 하는 아쉬움이 먼저 들까 걱정스러웠다.

십수 년 만에 다시 찾은 노산공원은 올라가는 계단 수만큼이나 아직도 내게는 가쁜 숨을 몰아쉬게 한다. 노산공원 입구에 붙은 선간판은 노산공원 호연재와 박재삼문학관이라고 적혀 있다. 십수 년 전에는 없던 이름이고 건물들이다. 계단을 끝자락은 숲이다. 한적한 숲길에 저만치 넉넉한 사람들이 걷고 있다. 어찌 올라왔는지 유모차도 보인다.

 

 

 

깊은 나무 아래 흔들 그네가 있고 그 앞에 박재삼 동상이 벤치에 앉아 있다. 마치 사위 조용한 곳에서 책을 읽는 모양으로. 잠시 숲 속에 들어온 착각 속에 박재삼 동상 옆에 앉아 준비한 커피 한 모금 마셨다. 주위를 둘러보니 옛 팔각정을 사라지고 그 자리에 박재삼 문학관과 호연재라는 신식 서당이 들어서 있다.

 

 

 

호연재는 조선 영조 46년(1770년)에 건립된 이 고장의 대표적인 학당(서재)이었다가 1906년 일본 경찰에 의해 강제철거되었다가 2008년 복원했다고 한다. 호연재를 잠시 둘러보면서 ‘호연지기(浩然之氣)’를 떠올린다. ‘호연지기의 기상이란 무엇이냐?’고 묻던 고교 시절 시험 문제가 떠올랐다. 흔들리지 않는 굳센 기상으로 간단하게 요약해도 될지 모를 호연지기를 나는 배운 바를 실천하고 있는지 나에게 물으면 나는 뭐라 답해야할까 이리저리 머리만 굴렸다.

 

호연재를 둘러보고 바로 앞에 있는 박재삼 문학관으로 향했다. 박재삼. 삼천포가 배출한 한국의 대표적인 서정시인. 시인의 아들 박상하 씨는 ‘삼천포 촌사람으로 속정 깊은 사람’이라고 말했던 시인의 발자취를 살펴보러 안으로 들어갔다. 흉상과 그의 일대기가 먼저 반긴다.

시인이 생전에 사용했던 만년필 따위를 재현한 서재도 보이지만 가장 눈에 띈 것은 박재삼 시인이 말하는 시 잘 쓰는 비법이었다. 시인은 “시(時) 창작의 비법은 없다!”고 결론 내렸다. 비법 없다고 아쉬워하기는 이르다. 비법은 없지만, 시를 잘 쓰는 나름의 길은 있었다. “다만, 많은 문학체험과 꾸준한 연습, 반복된 수정이 중요하다고 하였으며, 깊고 풍부하 사고능력과 사물을 따뜻하면서도 날카롭게 볼 줄 아는 능력을 키워야 한다”고 말한 시인은 “생명의 근원지인 자연에서 그 방법을 배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시인은 좋은 시를 창작하기 위한 비법은 없지만, 다양한 노력을 통해 본인만의 방법을 찾아가는 과정이 중요하다고 말하고 있다. 문학관 안에는 노래방 기계처럼 생긴 시인의 시를 낭송하는 체험 장비가 있어 음치라 걱정할 일 없이 마이크를 잡고 시를 선택해 낭송했다.

 

 

 

울음이 타는 가을 강(江)

/ 박재삼

 

마음도 한자리 못 앉아 있는 마음일 때,

친구의 서러운 사랑 이야기를

가을 햇볕으로나 동무상이 따라가면,

어느 새 등성이에 이르러 눈물나고나,

 

제삿날 큰집에 모이는 불빛도 불빛이지만

해질녘 울음이 타는 가을 강(江)을 보것네.

 

저것 봐, 저것 봐,

네보담도 내보담도

그 기쁜 첫사랑 산골 물 소리가 사라지고

그 다음 사랑 끝에 생긴 울음까지 녹아나고,

이제는 미칠 일 하나로 바다에 다 와 가는,

소리 죽은 가을 강을 처음 보것네.

 

 

 

3층 전망대에서 삼천포항 주변을 바라보았다. 오른편으로 싱싱한 횟감을 비롯해 건어물 등을 파는 용궁수산시장이 있고 왼편으로 바다를 매워 만든 횟집 단지가 보인다. 저너머 다도해를 품은 바다에는 푸른 빛 하늘과 만나 철썩인다.

눈이 시리도록 푸른 하늘과 바다를 전망대에서 구경하고 내려와 바닷가로 걸었다.

 

 

 

비 내리는 삼천포에 부산배는 떠나간다

어린 나를 울려넣고 떠나가는 내 님이여

이제가면 오실날짜 일 년이요 이 년이요

돌아와요 녜 돌아외요 녜 삼천포 내 고향으로

 

1960년대 은방울자매가 불렀던 〈삼천포 아가씨> 노래가 파도소리와 함께 밀려오고 아가씨를 형상화한 조각상이 보인다. 삼천포 아가씨 조각상 옆으로는 사천를 대표하는 볼락과 도미·상괭이·전어를 형상화한 물고기상이 있다. 이 조각상은 114m 길이의 해안 목재데크로드로 편안하게 걸으면서 만날 수 있다. 이 편안한 너머에 갯바위에서 노점의 횟감을 잡아 친구들과 먹는 과거가 숨어 있었다는 아쉬움은 어쩔 수 없다. 근처 어시장과 횟집에서 회를 안주 삼아 이야기로 바다를 메운 뒤 찾았던 노산공원. 낭만도 시간이 지나면 추억이 되는지 모르지만 해 질 녘 타는 가을 강을 바라보는 즐거움으로 아쉬움을 달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