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세100 이에 우리 조선은 독립국임을 만방에 선언하노라




백제 대통사지터  


친일파 김갑순 도로보데스(모두가 도둑놈들)”로 친일행적을 정당화

공주는 64년 동안 백제의 도읍지였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충청감영이 있었던 역사 깊은 곳입니다. 그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한 중학동에는 대통사지터가 있습니다. 그곳에서 세상의 모든 평화를 즐기고 있는 고양이. 사람에게 먼저 다가가는 친근한 고양이에게 마음의 모든 불안함이 한순간에 사라졌습니다. 우리가 누리는 이런 소소한 일상의 평화는 치열한 독립의 정신을 잊지 않고 이어온 덕분이 아닐까 합니다. 그런데 그 절터 건너편에 우리 민족을 말살하는데 앞장선 친일파의 집이 있습니다. 일제강점기 공주 갑부였고 친일 매국노 김갑순의 집입니다. 현재는 다른 사람이 집을 지어 살고 있습니다.

 


본명이 순갑이었으나 고종에게서 갑순이라는 이름을 하사받은 김갑순. 장터에서 국밥 장사를 하던 홀어머니와 함께 살던 그는 까막눈이었습니다. 20살이 넘어 충청감영의 요강을 씻는 군노였는데 찬 겨울에는 놋쇠요강을 품어 방에 가져다두는 재치가 있었습니다. 눈 내리는 새벽에는 감영마당을 쓸었고 윗사람들에게서 인정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렇게 인정을 받아 하급 공무원이 되었고 월급은 윗사람에게 상납을 하는 등 처세에 뛰어났다고 합니다.

 

어느 날 투전판의 노름꾼을 잡으러 가던 중 강간당할 위기에 처함 여성을 구해주었고 둘은 의남매가 되었습니다. 의붓 여동생은 충청도 관찰사의 소실로 들어갔고 김갑순은 1899년 관찰부의 아전이 되었습니다. 관직생활 중 스스로 글을 깨쳤습니다. 아전 생활 중 관찰사의 친구인 선비가 홀대를 받고 빈손으로 돌아가는 것을 보고 연유를 물었습니다. 과년한 딸을 시집보내지 못해 고민하던 그에게 김갑순이 피륙과 엽전을 보냈습니다. 1년 뒤, 그 선비는 탁지부(호조의 후신)의 고관으로 발탁되었고 김갑순을 경성으로 불러들입니다.

 

경성에서 총순으로 있다가 이용익의 눈에 들어 내장원의 봉세관으로 발탁되었습니다. 1902년 부여(석성) 군사, 노성, 임청, 공주, 김화, 아산 등 충남지역 6개 군수를 거쳤습니다. 노성(현재의 논산시 노성면) 봉세관을 겸하며 선희궁 소유의 궁장 터 수천 마지기를 매부 하치관에게 맡겼습니다. 매부는 논 마지기당 벼 한 섬씩의 소작료를 받아 착복했고 친위영 군대의 군량미를 조달하기 위한 농지의 마름도 착복하여 백성들의 원성이 자자했습니다.

 

수없이 많은 부정을 저질렀던 김갑순이 1910년 아산군수로 재직할 시 형사처벌 위기를 겪었지만, 한일합방이 되면서 흐지부지되어 버렸습니다. 1914년 충청남도 참사 1920년 충청남도 평의원, 1921년 중추원 참의에 3회 연속 재임됩니다. 공주읍회 회원 2, 충남도회의원 4, 충남도 농회 부회장, 우성수리조합장, 조선박람회 평의원을 겸하면서 친일행적이 날로 심해졌습니다.

 

1937년 중일전쟁 중 황국신민회운동의 앞잡이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결성 발기인으로 나섰고 1940년 국민총력조선연맹 평의원, 조선임전보국단 이사, 흥아보국단 준비위원회 충남대표를 맡았습니다.

 

단군을 숭배하는 금강대도 신도들을 밀고했고 단군성전을 밀어버리고 조선총독부 역대 총독들의 사진을 전시하는 열전각을 건립해 참배를 강요했습니다. 1920년에는 유성온천개발사업, 운수사업을 시작해 튼 돈을 벌었고 1932년 대전지역 유지들을 동원해 충남도청을 공주에서 대전으로 이전하면서 대전에 가지고 있던 땅의 보상금으로 거부의 대열에 들어섭니다. 당시 대전땅의 40%가 그의 소유였다고 합니다. 친일파 이규완, 윤치오, 이병길(이완용의 손자) 등과 사돈 관계를 사돈 관계를 맺었습니다. 1949 1월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체포되었지만 처벌을 받지 않았고 갖은 술수를 동원해 병보석으로 풀려납니다. 1950년 전쟁 중 조선인민군에게 체포되었으나 인민군 부대 장교와의 인연으로 다시 목숨을 유지합니다.

 


1961 89세로 사망할 때까지 도로보데스(다 도둑놈들)”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습니다. 죽을 때까지 자신의 친일행적을 정당화하고 비난을 면화기 위해 변명을 일삼았던 김갑순. 서울로 가려면 그의 땅을 밝고 가라고 했다는데, 그의 후손들은 땅을 되찾기 위해 혈안이 되어있으며 추호의 참회나 반성이 없습니다.





신간회 공주지회 활동의 터전 공주 청년 회관


대동사터와 바로 이웃해 있는 교회. 태극기가 꽂혀있고 대형 태극기가 걸려 있는 교회의 모습에서 이곳이 독립운동의 산 역사의 장소라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습니다.

 



이 자리는 1932년 공주 청년회관이 설립된 곳으로 일제강점기 국내 최대 항일당체인 신간회 공주지회가 활동한 근거지였습니다. 당시 공주제일교회 담임목회자들이 이 단체에 중요한 직책들을 맡아 수행하였고, 민중계몽과 강연회, 야학회, 토론회, 연극회, 체육회, 민립학교설립 추진 등 공주 지역의 근대 교육과 문화를 이끌던 뜻깊은 장소입니다.


 



공주제일교회는 1903년 미국 감리교 선교사인 맥길이 설립했습니다. 건물은 1931년 한국 초기 교회양식을 띠고 세워졌습니다. 한국전쟁 때 건물 상당 부분이 파손됐지만 신축을 하지 않고 복원함으로써 건립 당시의 시대상을 보여줍니다. 특히, 개축 당시의 종탑 일부의 타일 처리, 증축 당시 장식된 화가 이남규의 스테인드글라스 작품, 로마시대의 카타콤을 연상시키는 반지하층의 개인 기도실 등은 건축학적으로 중요한 가치가 있어 2011년 등록문화재 제472호로 지정됐습니다. 공주제일교회는 충청 지역의 선교 거점이었으며 독립운동을 지원한 곳으로 유관순 열사와 조병옥 박사가 이 교회를 다녔습니다. 또한, 이곳은 교회의 역할뿐만 아니라, 학교, 병원, 유치원 등을 운영하며 근대화의 선구적 역할을 했습니다.


 


샤프와 사애리시의 헌신

미국 북감리교회에서 파송된 샤프(R.A Sharp)와 사메리시(Alice. J. Hammond Sharp), 선교사 부부는 1904년 공주에서 그들의 사역을 시작하였습니다. 샤프는 공주 최초의 신교육기관인 명설학당(영명학교의 전신), 유관순의 양모이기도 했던 샤프의 아내 사애리시는 여성 최초의 교육기관인 명선여학당을 세웠습니다. 샤프 선교사는 논산 지방 선교를 다녀오는 중에 진눈깨비를 피해 상여집으로 들어가게 되었고, 거기서 장티푸스에 감염돼 34세에 순교했습니다. 사애리시는 유관순을 영명학교로 데려와 교육을 시켰으며 양녀로 삼아 서울 이화학교에서 학업을 지속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고 합니다.


 


이곳에는 신흥식 목사, 현석칠 목사, 김수철 목사, 김찬흥 목사, 안창호 목사, 김관회 교사, 김현경 교사, 유우석 학생, 유관순 학생, 양재순 학생, 윤봉균 학생, 강 윤 학생 등의 흔적들이 남아있는 역사적 장소입니다.

 


백년이 갈 아름다운 혼례식이 이뤄진 장소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박목월

기러기 울어 애는 하늘 구만리 바람이 싸늘 불어 가을은 깊었네...” 한국적 아름다움과 인간의 깊은 감성을 노래한 청록파 시인 박목월(1915~1978) 1935년 어느 날 기차 안에서 고요하고 단아한 아름다움을 지닌 한 여인과 나란히 앉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듬해, 맞선 자리에 나갔다가 또다시 그 여인과 만나게 됩니다. 여인은 공주 영명학교를 졸업한 독실한 기독교인 유익순! 이 둘은 바로 이 곳 공주제일교회 예배당에서 백년가약을 맺었습니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이상화

망국의 아픔을 달랠 수 없어, 시로 눈물 흘리던 이상화(1901~1943)는 바로 이곳 공주제일교회 맞은 편, 공주의 양가 댁 처녀 서온순과 혼례를 올렸습니다. 그녀의 집은 넓은 한옥이었고, 독립운동의 주요거점이자 공주 신간회, 국어연구회 등의 창립 장소로서, 그 모임들을 이끌던 서덕순(서온순의 오빠, 충남 초대 민선도지사)의 집이었습니다.


 


아이에게 독립한 나라를 선물하고 싶었다.”

일제 침략자를 놀라게 해서 그들을 섬나라로 되돌려 보낼 방법이 무엇인가를 곰곰이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곧 무력적인 응징입니다.”라고 외쳤던 안경신 선생. 임신한 몸으로 치마 속에 폭탄을 숨겨 평안남도청에 폭탄을 투척해 사형선고를 받고 생후 12일 된 아기와 함께 감옥에 투옥되었습니다. 극심한 영양실조로 아이는 시력을 잃었습니다.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대한애국부인회 본부의 군자금을 상해 임시정부에 전달하는 교통부원으로 활동하였습니다. 그러나 일경에게 발각되자 중국으로 피신했고 1920년 대한광복군 총영에 가담하여 활동했습니다.


 

신흥식 목사


신흥식 목사는 3.1 독립선언서에 민족대표 33인 중 기독교 대표로 서명을 했습니다. 옥고를 치르고 난 후에도 독립운동을 지속적으로 이어나갔던 독립운동가였습니다. 현석칠 담임목사는 1919 4 1일 오후 2시 공주 읍내 장터에서 만세운동을 지휘했습니다. 김수철 목사는 독립선언서를 인쇄해 배포한 혐의로 체포되었습니다.


 


또한, 유관순 열사와 오빠 유우석 열사가 출석했던 뜻깊은 장소입니다. 유우석 열사는 인력거를 타고 태극기를 흔들며 선언서를 나눠주던 중 칼을 맞고 체포됩니다.

 


애국, 민족, 도덕 등 인간의 가장 기본인 정신을 잃어버리고 친일을 일삼았던 친일파 김갑순. 그는 살아생전 모든 부와 영예를 누렸습니다. 구한말과 동학혁명, 일제강점기와 해방정국을 모두 겪었던 그의 집터와 3.1 독립운동과 구국과 애국을 위해 목숨까지도 버렸던 민족지사들의 활동지였던 공주제일교회가 이웃하고 있는 것도 참 아이러니합니다. 이곳을 찾는 이들이 우리에게 진정 소중한 가치는 무엇인가 진지하게 의문을 가지기를~ 만세운동의 정신이 영원토록 이어지기를 기원합니다.



<청춘예찬 이서경 부모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