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병수 교수님 정년퇴임 회고전에 대한 소고...

 

 

 

서양화 1980학번 한창현

 

칼라시대는 흑백필름으로 되돌아갔었다. 자유의 박탈로 인해 벙어리 냉가슴으로 서로의 눈치를 살피는 암울하고 절망의 회색 빛으로 물들인 1980년 봄에 교수님을 처음 만났다. 군사정권 부 도덕성에 학생들은 성난 군중으로 변해 연일 시위와 최류탄으로 인해 고약한 눈물과 함께 일그러진 작은 민중의 얼굴로 숨쉬어야 했었다. 그해 1980학번으로 120명의 젊은 학생들은 새내기 대학생으로 계명대학교 미술대학에 입학하여 교수님과 인연으로 연결되었다. "인연-불교: 천생연분, 희랍어: 자기인생의 절반." 이라고 성현께서 정의하고 있다. 교수님과 인연은 전형적인 386의 일세대로 출발되었다고 감히 말할 수 있으며, 그 인연의 뿌리는 제자들의 예술관과 생활관까지 영향을 주었으며, 오늘날 까지 끈끈한 정으로 이어져 계명대학 미술대학 선 후배와 대구화단에 아름다운 미담으로 자리 잡았다.

 

 

입학당시를 회상 해 보면 석고데생으로 실기시험으로 행하던 방법을 탈피하여 모험과 도전 정신으로 전국 처음으로 인체데생을 실기로 하여 과별모집이 아닌 계열모집으로 학생들을 평가하였고, 또한 남자와 여자의 성 비율을 배려하지 않고 실기력을 우선하여 학생들을 모집한 것으로 기억된다. 그 결과 타 학번에 비해 특별하고 개성 강한 기인 기질을 가지고 있는 남학생들이 유독 많이 입학하여 캠퍼스를 혼돈의 숲으로 바꾸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필자도 시골에서 그림을 잘 그린다는 주위의 소리를 듣고, 미술대학을 지원한 수험생 이었지만, 합격 이 후 그 상황을 조합해보면 실기력보다는 시험 당일 바이오리듬이 좋은날이라 평상시 보다 그림의 완성도가 좋게 나온것으로 생각되었다. 얼마나 가볍고 도토리 키 재는 일 이었던가 하여 그때 입학을 허락 받은 사실이 천만다행 한 일 이었다고 위안을 삼는다. 인체데생 실기실에 모델로 앉은 분이 지금은 대구예술대학교 미술대학 서양화과에 재직 중인 조용일 님이였다. 그리고 입학 이후 그분을 만나 뵙고 피안대소로 웃었던 일들이 지금도 묘한 감정에 사로 잡힌다.

 

 

1980학번 동기생의 추억의 앨범을 한번 펼쳐보자.

당시 340점 만점에 306점을 얻고도 캠퍼스와 계명대학교 비사 장학금을 탐내고 입학한 자. 재수생과 삼수생 그리고 사수, 오수생들은 기본이었고, 군 복무를 마치고 입학한 자. 그리고 키 작은 모습을 가지고 작은 거인으로 나이 30살에 입학한 형님도 계셨다. 우리 동기들의 암울한 역사는 여기서 부터 출발되었고, 소수의 여학생들은 감성과 끼를 억제하며 소리를 죽였고, 남학생들의 기질과 용맹성으로 피해자로 남아야 했었다. 이러한 사유로 인해 전국을 연고로하여 만났기에 서울 말과 충청도 말, 그리고 목청 큰 보리문둥이 말들이 난무하면서 미술대학 건물 내에는 바람 잘 날이 없었고, 교수님들께서도 한편으로는 그 믿음성에 감복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매일매일 행복한 근심으로 우리를 지도하신 것으로 생각된다.

 

 

유병수 교수님께서 지도교수님으로서 1980학번 실기 첫 수업 시간이 지금도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간다. 학생들의 신상기록부를 파악한 후 난감해 하면서 번민으로 우리 학번을 내려다보는 눈빛은 지금도 본인과 동기생들은 스스로도 민망해 할 것이다. "여러분들이 다소 부담되더라도 유화재료와 캠바스는 20호 이상으로 준비 해주면 좋을 것 같다....."-끝내 차시 수업에 대한 말을 끝까지 잇지 못하시고 난색을 표명했던 사건들이 거짓말처럼 현실로 진행되었다. 돌이켜 보면 우리 학번은 전국에서 모였고, 그리고 시골 농사꾼 출신이 많은 관계로 대다수 고향을 떠나 유학개념으로 자취생들로 구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선생님께서는 말씀을 끝까지 이어가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도 동기들은 염치 있는 제자들로 구성되었고, 첫 수업시간에 경쟁이라도 하듯 직접 나무를 구입하여 만든 모양은 이상하고 볼품은 없었지만 100호 이상 대작을 그리기 위해 땀을 흘렸다. 이러한 사건과 열정을 파악하신 후 선생님께서는 준비물에 대한 언금은 더 이상하시지 않았다. 또한 시사성은 떨어지지만 호텔이 아닌 민박집, 그리고 고물버스에 짐짝처럼 대접받고도 낄낄거리며 내일의 평화를 모색하였다. 속리산 스케치 사건, 지리산 스케치 사건과 사건, 그 당시 선생님께서도 우리 학번과 함께 할 때에는 무척 힘겨워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그 역사가 있었기에 타 대학과 타 학번에 비교해도 결코 뒤 떨이지지 않는 제자들을 배출했던 것이다.

 

 

1980학번 서양화 전공 제자들의 활동을 조용히 열거 해 볼까 한다. "대한민국 미술대전 대상 1명, 그리고 대한민국 미술대전 특선 4명, 입선 다수, 대구미술대전, 경북미술대전, 신조미술대상전 대상 3명과 신라미술대전 최우수상 4명, 기타 공모전 다수, 한국화랑 미술제 작가 6명, 개인전 3회 이상 발표한 작가도 10여명이나 된다. 그리고 경운대학교 외 교수 2명, 미술평론 1명, 미국 프랑스 유학 2명, 언론기관(MBC 방송국-서울)2명, 대학강사 및 전업작가 7명, 미술교사 9명, 미술학원 및 기타종사자가 다수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1980학번 동기생은 다음과 같다. "이병헌, 한창현, 김강록, 박일룡, 이해묵, 이화상, 이동림, 이옥희, 이윤경, 전옥희, 박희대, 이동철, 이경운, 윤해규, 홍종환, 전인선, 홍준화, 류해일, 유덕용, 박흥묵, 신창범, 김용진, 이우철, 정재순, 이명일, 신화수, 이건훈, 이재용, 임환재, 박병구, 윤현태....." 그들이 모여 1990년 "회화80회 展" 이란 타이틀로 창립전을 개최하여 제12회 전시회까지 연결되어 오늘까지 온 것이 사실이였다.

2002년 정기모임은 가창 정대 큰바위 식당에서 모임을 가지고 교수님의 안부를 여쭙는 것이 1980학번의 저력과 매력인 것이다. 미술대학에서 그림을 공부하고 졸업했지만, 상위와 같이 물감을 가지고 물감 속에서 생업에 종사하는 집단은 건국이래 계명대학교 1980학번 출신이 기록으로 남을 것을 감히 기록합니다.

 

 

어제는 돈독한 정을 나누는 선배 장이규 선생의 전화를 받고 유병수 교수님의 정년기념회고전에 대한 글감을 제의 받고 작게 난감했지만, 선생님의 은혜에 미력한 힘이지만 필자의 감회를 일기쓰는 마음으로 글을 적게 되었습니다. 처음 선생님을 만났을 때 선생께서도 필자와 같이 볼혹위 나이 이였고, 불같은 정열과 애정을 소유했는데 벌써 선생님께서 정년을 앞두고 있습니다. 제가 제자된 도리로써 유병수교수님의 삶의 여정을 회상하면서 부끄러운 글을 삼가 올려보았습니다. 선생님 그동안 노고에 대해서 머리 숙여 저를 비롯한 1980동기 학번들이 그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교수님 건강하십시오

 

 

 

2002년 6월 서양화가, 시인 한창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