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아침 한겨레신문 '삶의 창'에 실린 제 글입니다. 

'사이버 검열' 논란과 '사이버 망명'을 보다 보니 이런 글이 나왔습니다.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는 루이 알튀세르의 책 제목이 떠오릅니다.

훗날  부끄러워 할 일, 지금 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이버  검열과 ‘매운 고추’ 


경찰과 검찰이 사회관계망 서비스(SNS) 카카오톡과 모바일커뮤니티 서비스 ‘밴드’를 압수수색하고 사이버 대화를 ‘실시간 모니터링’ 할 거라니 자신도 사이버 사찰의 대상이 되지 않을까 걱정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새정치민주연합 우윤근 원내대표는 며칠 전 사이버 검열은 1980년대 신군부의 보도지침을 능가하는 ‘공안통치’라고 비난했는데, 1980년대나 오늘날이나 ‘검열’은 시민이 신뢰하지 않는 권력자가 시민들을 겁주어 제 불안을 쫓으려 취하는 조치입니다.

출판된 지 77년이 되었지만 여전히 중국 공부의 필독서로 꼽히는 <중국의 붉은 별>에 ‘그는 내가 쓴 글의 내용이나 촬영한 사진에 대해 전혀 검열하지 않았다’는 구절이 있습니다. 제가 이 구절을 잊지 못하는 건 1980년대 초 신문기자로서 신군부의 검열을 받아본 아픈 기억 때문입니다. 여기서 ‘그’는 훗날 중국 초대 국가주석이 된 마오쩌둥입니다.

국민당 군대를 피해 1934년 10월부터 일년 동안 ‘대장정’에 나섰던 마오는 1936년 여전히 게릴라 군대를 면치 못한 홍군의 지도자로서, 국민당 정부가 내건 어마어마한 액수의 현상금을 목에 건 채 이 책의 저자가 된 에드거 스노를 만났습니다. 누가 봐도 불안한 상황이었지만 마오는 ‘태평스럽게 다른 사람들과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녔다고 합니다.

마오가 ‘태평스럽게’ 나다니고 스노의 글을 검열하지 않았던 이유는 단순합니다. 자신이 이끄는 홍군의 사랑과 존경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병사들과 똑같이 생활했고 그들이 맨발일 때는 자신도 신을 신지 않았으며, 집회에서나 극장에서는 사람들 틈 아무 데나 끼어 앉았다고 합니다.

권력자들이 시민과 똑같이 생활하며 자나 깨나 시민의 복리를 생각하면 시민의 사랑을 받습니다. 그렇지 않아 사랑받지 못하는 권력자가 ‘검열’로 위협할 때 시민은 무엇을 해야 할까요? 두려움에 떨며 ‘사이버 망명’을 해야 할까요?

2011년 지진해일로 방사능에 오염된 일본 후쿠시마의 고철을 수입하는 나라, ‘절친’ 미국으로부터 ‘유사시’ 한반도에 핵무기를 사용하겠다는 말을 듣고도 가만히 있는 나라, 22조원을 들여 수자원을 오염시킨 사람들이 호의호식하는 나라, 이런 나라의 시민들이 왜 ‘사이버 검열’ 따위를 두려워해야 할까요? 두려움은 삶을 위축시킵니다. 두려움에 떠는 사람의 일년은 자유인의 하루보다 무가치합니다. 협박에 순응하는 시민은 시민이 아니고 노예입니다. 누가 뭐라든 할 말은 해야 합니다.

겁이 나서 카카오톡이나 다른 서비스를 이용할 수 없으면 스마트폰을 쓰는 대신 직접 만나서 대화하세요. 대화란 원래 ‘서로 마주앉아 이야기를 주고받는 것’이니 스마트폰이 없으면 더욱 의미 있는 대화가 가능하겠지요.

혹시 정부가 ‘세월호가 죽인 경제’를 살리려 이러는 거라면 다시 생각해보길 권합니다. 사이버 대화를 ‘실시간 모니터링’ 하려면 무수한 요원들을 고용해야 하고, ‘불온한’ 대화자를 모두 벌하려면 검경과 법관, 유치장과 교도소를 늘려야 하겠지만 이런 식의 ‘경제 살리기’는 ‘나라 죽이기’이니까요.

마오쩌둥은 ‘매운 고추’라는 민요를 좋아했다고 합니다. 노래의 주인공 고추는 먹히기를 기다리며 살아가는 채소의 나날을 혐오하다가 결국 채소들의 봉기를 이끕니다. 부당한 조치에 순응하는 사람은 먹히기를 기다리며 살아가는 채소와 다르지 않습니다. 권력을 갖지 못한 사람은 ‘소시민.’ 지금이야말로 소시민들이 ‘작은 고추’가 되어 ‘작은 고추의 매운맛’을 보여줄 때가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