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나라가 정녕 입법, 행정, 사법부를 갖춘 나라일까요?  피해자에게 죽을 때까지 지울 수 없는 악몽과 상처를 남기는 성범죄, 그 범죄를 저지른 자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활보하는 나라, 나아가서는 호의호식하는 나라, 이 나라가 정녕 나라일까요?

 

공지영 씨의 소설 '도가니'가 영화화되어 사회 전체를 분노의 도가니로 밀어넣고 있습니다. 책이 나온 지는 2년이나 되었고 사건이 일어난 지는 더 오래되었는데 이제야 모두들 씩씩댑니다. 이제라도 공분화 되니 다행이라고 생각해야겠지요?

 

소설 '도가니'는 교직원들이 청각장애 학생들을 성폭행한 '광주 인화학교 성폭력 사건'을 토대로 쓰여진 것입니다. 영화는 원작을 충실히 반영했으나 성폭력을 묘사할 때만은 수위를 훨씬 낮췄다고 합니다. 그대로 화면에 담기엔 너무 끔찍하기 때문이지요. 공지영 씨는 이 사건을 어느 법정 스케치 기사에서 발견하고  "사건을 캐러 들어갔을 때 늪 속으로 빠져드는 것처럼, 무심히 한 발 디뎠는데 규모가 너무 엄청난 사건에 맞닥뜨린 기분이었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인화학교에서 2000년부터 5년간 학생들을 성폭행하거나 추행한 가해자는 교장 등 10명, 피해자는 12명인데 그 중 국가인권위원회가 고발한 가해자는 6명(은폐자 포함 9명), 법원에서 실형을 받은 사람은 단 2명, 그나마 징역 1년8개월~2년6개월(별건 2차례 선고형량 합산)을 받았다고 합니다. 수사와 재판이 진행될수록 처벌 대상과 형량이 줄어드는 가장 큰 이유는 성폭력이 친고죄여서 피해자가 고소를 해야만 처벌이 가능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가난하고 부모마저 장애인인 피해 아동들이 돈으로 회유당하고 협박당하면서 고소를 하지 않게 되는 것이지요. 인권위 조사로는 피해 아동 부모가 고소를 원하지 않아 처벌을 면한 교직원이 4명이었으며, 교장 등 2명은 항소심에서 피해자들이 고소를 취소해 집행유예로 풀려났다고 합니다. 또한 범인을 알면 1년 안에 고소를 해야 한다는 조항 때문에 처벌하지 못한 가해자도 2명이나 된다고 합니다.

2008년과 2010년 두 차례 법이 개정되어 19세 미만 아동ㆍ청소년 성범죄는 친고죄가 아니게 되었고,  범인을 안 이후 1년(지금은 2년) 내에 고소를 해야 한다는 고소기한도 19세 미만 대상 범죄에는 해당되지 않게 되었으니 불행 중 다행이지만, 공소시효 등의 문제는 여전히 살아있습니다.

 

더 놀라운 점은 인화학교  재단이 사건 이후에도 여전히 국고 지원을 받아왔다는 것입니다. 5명의 친인척과 지인들로 이뤄진 재단 이사진은 성폭행 사건을 고발한 교사를 해고하고, 공소기각 판결을 받은 가해자는 복직시켰다고 합니다. 또 사재는 한 푼도 출연하지 않고 매년 수십억원의 보조금을 받아왔다니, 이야말로 입법, 행정, 사법, 3부가 힘을 합쳐 범죄의 온상을 유지, 발전시켜준 셈이지요.

 

어제 저녁 KBS1에서 방영한 '의뢰인K'에는 의사로부터 성폭행과 성추행을 당한 환자들이 출연했습니다. 저도 피부염을 치료하러 유명한 ㅇ피부과에 갔다가 성추행을 당한 적이 있습니다.  그 일을 당한 지 여러 해가 흘렀지만 지금도 가끔 그 의사가 나오는 악몽을 꿉니다. 그를 해치러 그 병원 5번 방 --그 의사의 방--에 들어가는 꿈도 수도 없이 꾸었습니다.

 

한 번의 성추행이 이런 괴로움을 남기니 성폭행의 후유증은 얼마나 더 크겠습니까? 그런데 환자를 성폭행한 의사들 중 면허 취소를 당한 사람은 거의 없고 대부분은 사건이 가라앉은 후에 다시 환자를 '치료'한다고 합니다. 인화학교 사건과 같은 사건이 나라 이곳 저곳에서 계속 벌어지고 있는 것이지요.

 

섬범죄를 부추기는 문화를 고쳐야 하지만 문화를 바꾸는 건 법을 바꾸는 것보다 어려우니 우선 법을 바꿔야 합니다. 성범죄자에게 관대한 법을 강화해야 합니다. 명백한 성범죄자에겐 '이에는 이, 눈에는 눈' 하는 식의 강력한 법을 적용해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가끔 범죄자의 인권 운운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범죄자의 인권보다 더 중요한 것은 피해자의 인권입니다.

 

영화 '도가니'가 잠시 세상을 시끄럽게 하는 데 그치지 말고 법의 변화, 악의 징벌로 이어지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