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의 마지막 날입니다. 겨울을 재촉하는 비를 바라보다가 '살아가는 일'을 생각합니다.

삶은 어쩜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을 이해하기 위해 애쓰는 나날의 기록일지 모릅니다. 그 일은 자기 밖에서 일어날 때도 있고 자기 안의 일일 때도 있습니다.

 

지난 달에 나온 제 번역서 <필리파 페리 박사의 심리치료극장>은 자기도 모르게 절도를 하는 변호사가 심리상담가를 찾아가 삼당받는 과정을 만화형식으로 보여줍니다. 이 책을 읽는 사람은 때로는 변호사의 입장에서, 또 때로는 상담가의 입장에서 자신을 관찰하게 됩니다.

 

'자신을 바라보는 일'이 우리를 보다 나은 사람으로 만드는 첫걸음이라면 이 책을 읽고(보고) 자신을 바라보게 되는 독자가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책 말미에 실린 '역자 후기'를 옮겨둡니다.

  

 

누군가의 행동을 보고 ‘저 사람 왜 저러지? 왜 저런 짓을 하는 거야?’라는 생각을 해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겁니다. 폭력적인 사람, 거짓말하는 사람, 훔치는 사람... 사랑이 넘치는 사람, 남에게 칭찬받을 일만 골라 하는 사람... 사람의 종류는 얼굴의 수만큼 많고 그들이 하는 행동도 그만큼 다채롭습니다.

 

정보와 지식의 홍수 속에 상식이 사라지고, 집 안팎에서의 교육이 ‘사람의 도리’보다 ‘일등과 성공’을 지향하면서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행동하는 사람이 눈에 띄게 많아졌습니다. 2, 30년 전만 해도 숨어있는 학문이던 심리학이 갑작스럽게 각광을 받게 된 것은 바로 이 ‘이해할 수 없는’ 행동들의 급격한 증가 때문일 겁니다.

 

오스트리아의 정신과 의사이자 정신분석학의 창시자로 불리는 지그문트 프로이트나 스위스의 심리학자이며 정신과 의사인 칼 융이 꿈이나 무의식에 대해 쓴 책에 빠져드는 사람들이 많은데, 재미있는 건 심리학에 관련된 책을 읽거나 심리학 공부를 하는 이들이 자주 범하는 오류입니다. 자신의 심리학 지식으로 타인을 재단하고 분석하는 거지요. 제가 아는 이 중에도 프로이트의 사도라 할 만한 사람이 있습니다. 사소한 부부싸움 중에 ‘리비도’와 ‘콤플렉스’를 들먹이며 배우자를 ‘분석’하여 싸움을 키우곤 합니다.

 

좀 더 생각이 깊은 사람은 자신을 분석의 대상으로 삼습니다. ‘나는 왜 그때 그렇게 행동했을까?’ ‘그런 짓은 하지 말았어야 하는데.’ ‘그렇게 하는 대신 이렇게 했어야 하는데 왜 그런 상황에선 늘 그렇게 행동할까?’ 자신이 하는 말과 행동 중에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많아지면 어떤 이들은 정신과를 찾고 어떤 이는 상담실을 찾습니다. 자신으로 하여금 그렇게 행동 --말도 넓은 의미의 행동에 포함됩니다--하게 하는 요인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서입니다. 그런가 하면, 자신을 들여다보지 않으면서도 정신과나 상담실 안에서 어떤 일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궁금해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 책은 그 모든 사람들을 위한 ‘친절한’ 안내서입니다. 글만 있으면 이해하기 어려울 심리상태를 그림과 해설을 곁들여 설명해주니 친절합니다. 게다가 상담가와 내담자의 대화뿐만 아니라 각자의 머릿속에서 전개되는 생각까지 보여주어 두 사람의 입장을 이해하기 쉽게 해줍니다.

 

읽어보시면 아시겠지만 이 책은 한 번 이상 읽는 것이 좋습니다. 처음엔 그냥 ‘책’으로 읽고, 다음엔 등장인물에 자신을 투영시키며 읽어봅니다. 법을 집행하는 변호사이면서도 자신의 도벽은 어쩌지 못하는 제임스의 고민과 그가 살아온 역사를 읽다 보면 그가 왜 그렇게 되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자신을 제임스의 위치에 놓고 자신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자신이 무심코 했던 행동들, 특히 하고 나서 후회했던 행동들의 뿌리를 찾을 수 있습니다.

 

책에서 정보나 지식을 얻는 것은 최소한입니다. 좋은 책은 읽는 이가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게 도와줍니다. 이 책은 돌아보는 방법까지 알려주는 친절한 책입니다.

 

자신이 누구인지, 어디서 왔는지 모르면서 앞으로만 내닫는 사람들이 이 책을 읽고 ‘나는 누구인가’ 알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 책 덕에 정신과와 상담실을 찾는 사람의 수가 줄었다는 불평 아닌 불평을 듣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