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친구들과 송년모임을 합니다. 나이도 다르고 살림규모도 다르고 종교도 다르고 지지하는 정당도 다릅니다. 지금은 다 자란 아이들이 중학생일 때 어머니 모임에서 만난 친구들은 어른 되어 친해진 사람들이 으레 그렇듯 예의를 갖추고 서로의 다름을 부각시키는 종교나 정치 얘긴 하지 않습니다. 무심코 그런 얘기를 했다가 서먹했던 경험이 있어 더욱 조심하는 중이지만 오늘만은 다릅니다. 저의 왼발 때문입니다. 아니 오세훈 시장 덕이라고 하는 게 옳을 겁니다.

날짜까지 바꿔가며 참석을 종용하니 안 갈 수가 없어 왼발을 절며 가니 “왜 그랬어요?” “어디서 그랬어요?” 동정어린 인사가 이어집니다. 하는 수 없이 엉망으로 놓인 보도블록 위에서 넘어져 발의 인대가 늘어났다고 이실직고합니다. “서울시 때문이에요. 사람들이 다니는 길을 다닐 만하게 만들어야 하는데 그런 일은 일한 티가 안 나니까 안하고, 티 나는 일만 하려고 하니까!” 한 친구가 날카롭게 지적합니다. 모두 한 목소리로 제게 서울시를 상대로 행정소송을 하라며 서울시에 대한 불만을 쏟아냅니다.

“저 광화문 망쳐놓은 것 좀 봐요! 궁전에 계셔야 할 왕을 길바닥에 앉혀 놓질 않나, 칼 찬 장군이 대왕에게 등을 보이고 서 있게 하지를 않나.” “어디 스케이트 타고 스노우보드 탈 곳이 없어서 차도 한 복판에다 얼음판을 만든대요?” “스노우보드대회 끝나자마자 ‘서울 빛 축제’라나 뭐라나 한다는데 오 시장이 유독 빛과 분수에 집착하는 이유가 뭐에요?”

어떤 친구는 청계천식으로 복원된 홍제천 옆 산기슭의 전광판(시티비전) 때문에 홍제천변을 걷기가 싫어졌다고 합니다. 풍광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전광판을 2억 7천만 원이나 들여 달아둔 이유가 무엇일까 볼멘소리를 하는데, 동네에 있는 작은 다리에 수십 개의 막대 형광등이 설치되어 밤 풍경이 어수선해졌다고 다른 친구가 툴툴거립니다.

친구들의 얘기를 듣다보니 웃음이 나옵니다. 오세훈 시장의 블로그에서 “불치이치(不治而治) 무위지치(無爲之治), 일하지 않는 것처럼 조용히 일하는 것, 그것이 훌륭한 행정이다.”라는 말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오 시장이 “조용히 일하”지 못하는 자신을 경계하기 위해 이 말을 블로그 문패로 삼은 걸까요? 아니면 무엇이 “훌륭한 행정”인지는 알지만 그것을 실천하지 못하는 것일까요?

오 시장은 지난 10일 ‘광화문광장의 스노우보드와 서울브랜드마케팅’이라는 제목의 긴 글을 자신의 블로그에 올려, 광화문광장에서 스노우보드월드컵 대회를 개최하기로 한 것은 이 대회를 도심 한복판에서 개최한 유례가 없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유례가 없는 일은 ‘뉴스’가 되는 법”이라 서울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 “고심 끝”에 내린 결정이라고 했습니다. ‘유례없는 일’을 해서 ‘뉴스’가 되면 좋은 건지 고개를 갸웃하게 됩니다.

오 시장은 서울이 글로벌경쟁력을 가지려면 ‘서울’이라는 브랜드를 전 세계에 널리 알려야 하기 때문에, 2007년을 ‘서울 브랜드마케팅의 원년’으로 선포하고 그때부터 다양한 홍보를 해왔다고 합니다. 해외에서 CF를 방송하고, 뉴욕 타임스퀘어에 광고를 내걸고, 파리와 도쿄 거리를 다니는 버스에 서울 홍보물을 입혔다고 합니다. 자신이 서울시 브랜드마케팅에 “미쳐” 노력한 덕에 2006년 44위이던 서울의 도시브랜드가 2008년에 33위로 뛰어올랐다고 합니다. 맨체스터유나이티드 축구팬들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2008년 14%였던 서울에 대한 인지도가 올해 38%까지 상승한 것도 자신의 브랜드마케팅 덕이라니, 박지성 선수가 들으면 뭐라고 할지 궁금합니다.

오 시장은 이런 성과들이 서울의 관광객 유치로 이어져 올해 처음으로 관광수지 흑자를 기록했다며, 자신이 2006년 7월 시장으로 취임하기 전 602만 명이던 관광객이 올해는 780만 명 정도로 증가할 거라고 했습니다. 세간에서는 환율 특수 때문이라고 하지만 자신은 서울시의 투자와 홍보마케팅 덕분이라고 확신한다며, 자신이 6개월 앞으로 다가온 시장 선거에 재출마하겠다고 했기 때문에 모든 일이 표를 의식한 행보로 비판을 받는다고, “그래서 지금은 재선을 포기하고 싶을 만큼의 답답한 심정”이라고 했습니다.

오 시장이 블로그에 글을 올리고 난 사흘 후 한나라당 원희룡 의원이 자신의 블로그에 반박문 비슷한 것을 올렸습니다. 두 사람이 시장 자리를 두고 싸울 후보자들이라는 점을 감안하고 원 의원의 글을 읽어봅니다. “스노우보드대회는 오세훈 시장의 전시행정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었습니다..‘서울을 세계에 알리겠다’는 걸 반대하는 것이 아닙니다..그런데 왜 개최장소가 광화문광장이어야 합니까..도심 한복판에 가설무대가 설치되고 철거되는 동안 서울시민은 극심한 교통 불편을 감수해야 합니다..광장의 주인은 시민입니다..그러나 지금의 광화문광장은 서울시가 철저히 통제합니다..서울시가 주인 노릇을 합니다..그러다보니 광화문광장은 서울시 홍보만을 위한 가설무대가 되어버렸습니다..”

원 의원이 왜 마침표를 두 개씩 찍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원 의원의 글엔 주변에서 들리는 얘기가 많이 담겨 있습니다. 오 시장은 역대 어느 시장보다 많은 홍보예산을 썼지만 홍보비 많이 쓰고, 요란한 행사 많이 연다고 관광객이 몰려오는 건 아니다, 브랜드마케팅도 중요하지만 그것은 서울시 살림의 ‘극히 일부’일 뿐이다, 서울시장이 디자인과 마케팅에 빠져 민생을 소홀히 하면 서울시민의 삶은 날로 어려워진다, 등의 주장입니다.

원 의원이 열거한 통계를 보면 서울시민의 삶이 어려워지는 건 분명합니다. “서울의 실업률은 4.8%로 전국에서 가장 높습니다..출산율은 1.06명으로 두 번째로 낮습니다..집값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올라 41년을 저축해야 서울에서 집장만이 가능합니다..3년 전에 비해 평균 10.7년이 늘어난 것입니다..소규모 점포는 종업원 인건비도 못 낼 정도로 어렵습니다..재래시장에 손님 발길이 끊긴지도 오랩니다..세계적 경제위기 한파가 도시 서민의 삶을 더욱 옥죄고 있습니다..”

원 의원은 지금 서울이 당면한 최대의 문제는 시장이 디자인과 마케팅에 ‘미쳐’ 있는 것이라며, 서울시 디자인위원회는 올 한해에만 회의를 76번이나 했지만 민원조정위원회나 분쟁조정위원회는 3년간 단 한 차례도 열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오 시장은 그동안 갈등의 현장을 회피해왔습니다..이명박 시장시절 지정된 뉴타운은 거의 진척이 없습니다..반면 본인이 발표한 개발지역은 무리하게 속도를 내고 있습니다..그 결과가 용산참사로 이어졌습니다..용산참사가 벌어진지 1년이 다 되도록..오 시장은 장례식도 치루지 못한 유족들과 어떤 합의도 이뤄내지 못했습니다..왜 용산참사 현장에 가서 문제를 해결하지 않았냐고 비판했더니..오 시장은 ‘참사 당일 현장에 갔다’며 증거사진도 있다고 되받아 치더군요..‘문제해결을 위해 직접 나서지 않았다’는 비판에 동문서답을 하고 있습니다..용산참사 한 건을 두고 오 시장을 싸잡아 비판하는 것이 아닙니다..제가 국회의원으로 있는 양천구의 쓰레기 소각장 분쟁, 지하상가 운영권 분쟁 등등..오 시장은 갈등이 있는 곳은 철저히 회피하는 시정을 해왔습니다..”

원 의원은 이명박 시장 재임시절 줄었던 서울시의 부채가 오 시장 재임기간 중 2조4천억 원으로 두 배 이상 늘었는데도 연말과 새해 초에 1조6천억 원의 채권을 더 발행하려 한다며, 이러면서도 4억 원 넘는 돈을 들여 만든 광화문광장의 플라워카펫을 두 달 만에 뒤집고 17억 원이 넘는 돈을 들여 스노우보드 점프대를 만드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고 합니다.

지금 원 의원의 주장에 동의하는 사람 모두가 내년 선거에서 원 후보에게 표를 줄지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저 분이 시장을 한 번 더 하면 우리 서울시는 시민의 삶과 거꾸로 가는 거대한 이벤트 공연장이 될 것 같아 참으로 걱정”이라고 생각하는 시민이 많은 것은 사실입니다.

6개월은 짧은 시간이 아닙니다. 오 시장이 남은 임기 동안 자신의 노력과 성취를 몰라주는 사람들에 대해 서운해 하는 대신, 그들의 비난 속에서 자신에게 도움이 될 것들을 끄집어내기 바랍니다. 두 발로 걸어 다니다가 한 발을 절룩이게 되니 평소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입니다. 서민이 아닌 사람이 서민의 삶을 알고 철거민이 아닌 사람이 철거민의 상황을 알기는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니 시장 재선은 물론 언젠가 대권에 도전할 꿈까지 꾸고 있는 사람이라면, 자신이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들을 일깨워주는 이들에게 오히려 감사하며 경청해야 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제 친구들과 제가 오랜만에 다름을 극복하고 완벽한 합의에 이룰 수 있게 해준 오 시장에게 감사합니다.

*올 일 년 동안 ‘동행’해주신 독자 여러분께 깊이 감사드리며, 새해에도 많은 기쁨과 보람 거두시길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