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음 글은 관성 질량과 중력 질량의 등가성을 전제하고 쓴 것이다. 그 등가성은 뉴턴 이후 아직까지 풀리지 않은 상태이다.
킬로그램 재정의와 플랑크 상수
- 이론과 실용성 사이의 유대적 관계 발달의 관점에 따른 접근법-
최근 무게의 단위인 kg 재정의가 화제의 주제로 떠올랐다. 그 재정의 방식에는 플랑크 상수(Planck constant)가 등장한다. 무게의 단위인 kg의 재정의에 왜 플랑크 상수가 등장하는 것일까? 이 글의 목적은 그 이유를 가급적 이해하기 쉽게, 그리고 간략히 밝히는 것이다. 플랑크 상수를 이용해 무게와 질량을 재정의하는 방식을 다룬 국내외 논문들은 많은데, 이론 물리에 대한 지식을 갖고 있지 않은 사람이 그 논문들의 내용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또한 여러 물리 공식이 등장하는 그 논문들 내용이 논리적으로 구성되어 있지 않다고 느낀 것도 이 글을 작성하게 만든 이유 중 하나이다. 이 짧은 글의 목적은 측정에서 ‘이론과 실용성 사이의 유대적 관계’가 어떤 식으로 발달하는지를 킬로그램 재정의와 연관해 느껴보게 해 주는 것이다. 측정 과학의 역사는 그러한 유대적 관계의 발달 역사이기도 하다.
질량과 무게는 다르다. 무게는 경험할 수 있지만, 질량은 경험할 수 없다. 따라서 질량을 직접 측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질량을 직접 나타내는 측정 도구는 없기 때문에 질량은 간접 측정의 대상이다. 특정 물체의 무게를 알면, 그것의 질량을 계산할 수 있다. 무게는 ‘질량 곱하기 중력 가속도(mg)’로 표현되므로, 특정 물체의 무게를 중력 가속도(g)로 나누면 그 물체의 질량을 알 수 있다. 어떻게 무게의 기본 단위를 정할 것인가? 물리학 자체는 이 실용적 물음에 대한 정답을 제공해 주지 않는다. 특정 인공물 A를 1kg이라고 약속하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눈금 없는 용수철저울에 A를 올려놓으면 바늘이 움직일 것이다. 바늘이 가르치는 위치에 ‘1kg’라는 눈금자를 매기고, 그 눈금자를 기준으로 2kg, 3kg 등의 눈금자가 정해진다. 그리고 A와 동일한 무게의 물체들을 가지고 많은 용수철저울을 복제할 수 있다. 최근 많이 보도된 프랑스 ‘르그랑 K(Le Grand K) 원기’가 A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백금 90%와 이리듐 10%로 구성된 르그랑 K 원기는 1889년 만들어졌으며, 각국에 그 원기의 복제품이 있다. 그런데 르그랑 K 원기도 물질이기 때문에, 그것의 질량은 제아무리 잘 보관해도 세월이 지나면 미세하게 변화하게 마련이다. 그러한 미세한 변화는 무게와 관련하여 우리 일상생활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하지만 그러한 미세한 변화는 무게보다는 질량을 측정하는 물리 실험이나 정밀 가공에서는 문제가 된다. 여기서 다음과 같은 ‘샘플 의존성 문제’를 규정할 수 있다.
• 1kg은 질량을 가진 어떤 물체를 가지고 정의할 수 있다. 그러한 물체는 당연히 쉽게 변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한 물체를 ‘킬로그램 샘플’이라고 하자. 질량은 직접 경험할 수 없고 측정할 수도 없다. 무게를 통해 질량을 알 수 있다. 킬로그램 샘플이 쉽게 변하지 않는다고 해도,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그것의 질량도 결국 미세하게 변하게 마련이다. 무게를 통한 질량의 간접 측정의 정밀성도 떨어지게 된다.
플랑크 상수를 가지고 킬로그램을 재정의하려는 시도에는 위의 샘플 의존성 문제를 불식시키려는 의도가 깔려 있다. 그런데 그 시도에 왜 플랑크 상수가 등장하는 것일까? 이 물음에 답하려면 먼저, 플랑크가 고민했던 난제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19세기 당시 물리 이론에 따르면, 적외선 근처의, 즉 가시광선보다 파장이 짧고 진동수가 높은 영역의 전자기파 복사를 방출하는 어떤 물체들의 일량은 무한대가 되어야 한다. 이러한 일은 실제 세계에서나 실험실에서도 발생하지 않는다. 기존 이론의 예측은 현상과 반하기 때문에, 그 이론을 수정하거나 대체시키기 위한 새로운 가설이 필요하다. 플랑크는 주어진 진동수에서의 전자기파 복사는 일정한 양의 에너지만 방출한다는 가설을 세웠다. 전자기파 에너지 E는 진동수 ν에 비례하고, 그 둘 사이를 매개하는 상수가 플랑크 상수 h이다.
(1) E=hν
위 공식에 따르면, 제아무리 진동수가 높아도, 즉 에너지가 높아도 해당 진동수 에너지의 일량은 무한대가 될 수 없다. 플랑크 상수를 질량과 연관시켜 보려면, 또 다른 공식이 필요하다. 그것은 특수 상대성이론의 ‘에너지와 질량의 등가 원리’를 함축한 다음 공식이다.
(2) E=mc2 (m은 정지 질량, c는 빛의 속도)
(1)과 (2)의 에너지를 동일한 것으로 취급할 수 있다면, 질량과 플랑크 상수를 연관시킬 수 있다. 그런데 (1)의 에너지는 전자기파 복사의 맥락에서 의미를 갖는다. 이 때문에, 플랑크 상수 h의 단위는 단위당 열량(J/s)로 표현되는 것이다. 반면에 (2)의 에너지는 물체가 갖는 잠재 에너지를 뜻한다. 따라서 다음과 같은 문제가 발생한다.
• (1)과 (2)의 사용 맥락은 서로 다르다. 그렇다면 어떻게 (1)과 (2)의 양들을 동일한 것으로 취급할 수 있을까?
위 물음에 답하지 않고 ‘hν=mc2’을 주장하는 것은 논리적 비약이다. ‘hν=mc2’을 주장할 수 있도록 해주는 근거가 있어야 한다. 그 근거는 헬름홀츠의 에너지 보존 법칙이다. 헬름홀츠의 에너지 보존 법칙에 따르면, 에너지는 다양한 형태로 서로 변환 가능하며 그러한 변환 중에 보존된다. 따라서 전자기파 복사 에너지는 물체의 잠재적 에너지로 혹은 물체의 잠재적 에너지는 복사 에너지로 변환 가능하며, 하나의 에너지 형태가 다른 에너지로 완전히 변환되는 것을 가정할 수 있다. 이러한 가정 아래 ‘hν=mc2’을 주장할 수 있게 되면, 다음 공식을 얻게 된다.
(3) m=hν/c2
(3)은 질량을 플랑크 상수와 연관해 정의할 수 있음을 보여 준다. 그런데 그러한 연관성은 단지 이론적으로 그러할 뿐이다. 이 번에 1kg을 재정의하겠다는 것은 단순히 질량과 플랑크 상수의 이론적 연관성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다음을 뜻한다.
• 플랑크 상수를 사용하여 1kg을 실용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재정의할 수 있다면, 질량 측정에서 기존의 샘플 의존성 문제를 피할 수 있다.
(3)은 질량 측정에서 실용적으로 사용할 수 없는 공식이다. (3)에서 전자기파 진동수 ν는 변수이며, 전자기파 혹은 빛의 파장이나 진동수를 임의로 조작하기 힘들다는 점에 주의하라. 이 점은 (3)을 가지고 측정 및 정밀 가공에서 반복적으로 사용 가능한 측정 장치를 만들기 힘들다는 사실을 함축한다. 현재 기술 수준에 비추어 이상적인 경우는 쉽게 조작 가능한 물리량들을 가지고 플랑크 상수 h를 반복적으로 표현해 줄 수 있는 측정 장치를 만드는 것이다. 그러한 측정 장치를 만드는 것은 20세기에 들어와 실현 가능한 것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조지프슨 상수(Josephson constant)와 클리칭 상수(Klitzing constant)의 발견이 그러한 실현 가능성을 열어 주었기 때문이다. 조지프슨 상수는 ‘Kj=2e/h’이며, 클리칭 상수는 ‘Rk=h/e2’이다. 두 상수에서 e는 전자 하나가 가지고 있는 전하량이다.
조지프슨 상수와 클리칭 상수에는 변수가 들어가 있지 않기 때문에, 그것들은 상수로 불리는 것이다. 조지프슨 상수와 클리칭 상수와 관련된 이론에서 질량은 (3)에서 더 나아가 전압이나 저항 및 속도 등 물리량들로 정의가능해진다. (3)의 ν가 그러한 물리량들로 대체되기 때문이다. 전압, 저항, 속도 등은 현재 기술로 조작 가능한 물리량들이며, 관련 조작 도구들도 많다. 따라서 전압, 저항, 속도 등을 가지고 Kj와 Rk를 표현해 주는 측정 장치를 고안해 볼 가능성이 열린다. 그러한 장치는 반복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 더욱이 그러한 장치를 마치 저울처럼 만들 수 있다면, 1kg이라는 무게를 샘플 의존성 문제와 무관하게 정의할 수 있고, 또 플랑크 상수와 연관해 좀 더 정확한 질량 측정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현재 그러한 장치는 키블 저울과 실리콘 구 실험 기술로 실현 가능하다. 이에 대해서는 한국표준과학연구원 소속 연구자들의 다음 논문을 참조하라.
김동민, 김명헌, 우병철, 이광철(2018), <킬로그램의 재정의>, 물리학과 첨단기술 March.
http://webzine.kps.or.kr/contents/data/webzine/webzine/15271464051.pdf
지금까지의 논의는 이론과 실용성의 유대적 관계 발달의 접근법에 따라 구성된 것이다. 맥락 의존성을 갖는 물리학 이론들에 등장하는 공식들을 무조건 동일시할 수 없다. 이 점은 킬로그램 재정의를 다룬 전문적 논문들에서도 간과한 것이기도 하다. 이 짧은 글을 통해 질량과 플랑크 상수를 이론적으로 연관시키는 방법 및 전제 조건들을 살펴보았다. 또한 플랑크 상수를 가지고 킬로그램을 실현시키는 것, 즉 킬로그램 재정의는 단순히 질량과 플랑크 상수의 이론적 연관성으로부터 직접적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님을 살펴보았다. 그것은 질량과 플랑크 상수의 연관성을 보여 주는 핵심 공식을 현재 기술 수준에 비추어 쉽게 조작 가능한 물리량들의 관계로 변환시키는 과정을 요구한다. 더욱이 질량과 플랑크 상수의 이론적 연관성을 확보하는 데에는 소위 ‘관성 질량’과 ‘중력 질량’을 동일시하는 것이 전제되어 있는데, 그렇게 동일시해 주는 완벽한 이론은 아직 없는 상태이다. 질량과 에너지의 등가성과 관련된 공식 (2)의 경우에도 엄밀히 말하면 에너지와 mc2사이에는 근사치 관계가 성립한다. 따라서 킬로그램의 재정의가 물질 세계에 관한 완벽한 이론에 근거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러한 이론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가려면 정밀한 측정은 계속되어야 한다. 이 짧은 글에서 보았듯이, 측정 과학은 단순히 기존 이론을 응용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이론과 실용성 사이의 유대적 관계 발달의 역사 속에서 정착되었으며, 또 발달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