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담이 ‘자유(liberty)’보다는 ‘안전(security)’이라는 용어를 선호한 이유는 무엇인가? 가장 단순한 이유는 벤담이 자유가 기존의 자연법 개념에 근거해 해석되고 규정되는 것을 꺼렸다는 것이다. 안전은 기존에 외교, 국방, 소유권 등과 관련해 폭넓게 사용된 법적 용어인데, 벤담은 안전을 주로 시민의 자유와 관련지은 것이다. 행위 결과를 예측하는 합리적 계산 능력 발휘 없이는 개인은 시민으로서 선택의 자유를 누릴 수 없다. 이렇게 생각한 벤담은 시민의 자유를 개인의 자유와 정치적 자유로 분류하고, 그러한 자유를 보호하는 법적 장치를 ‘안전’이라 불렀던 것이다. 개인에게 영향을 미치는 피해를 차단하는 안전 장치, 정치적 억압으로부터 개인을 보호하는 안전 장치를 마련하는 것은 법제의 우선적 목적이다. 이 점에서 벤담은 자유라는 용어 사용을 자제했어도 법에 우선하는 자유를 인정한 것이다. 다만 그가 그렇게 인정한 이유는 자연법이나 자연법에 따른 도덕적 원리에 근거한 것이 아니다. 누구나 다른 사람의 방해를 받지 않기를 원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방해하지 않는 선택과 행위는 법적으로 보장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개인들의 관심사를 고려하는 통치 세력과 법제만이 시민 사회에서 정당성을 갖는다는 벤담의 입장이 반영되어 있다.
벤담에게 법에 우선하는 혹은 법의 목적이 되는 것은 자기 보존 및 합리적 계산 능력 발휘에 필요한 최소한의 자유이다. 벤담은 그러한 최소한의 자유를 법제에서 행복 추구의 조건들로 해석 가능한 것으로 여겼다. 그러한 조건들을 규정한 것이 안전이라면, 법제에서 굳이 자유라는 용어를 사용할 필요가 없다. 자기 보존 및 합리적 계산 능력 발휘에 필요한 최소한의 자유는 벤담에게 합의의 대상이 아니라 다수의 행복 추구에 전제된 것이다. 이 점에서 자유는 행복의 일부이다. 하지만 이에 대한 역은 벤담에게는 성립하지 않는다. 이 점은 벤담의 쾌락 공리주의에서는 당연한 결과이다. 쾌락 혹은 고통 부재의 상태로 행복을 규정하는 쾌락 공리주의에서 행복은 최고의 선 혹은 목적이이기 때문에, 행복 외의 다른 가치들은 행복이라는 목적 달성의 수단이다.
자연법 및 자연법에 따른 도덕적 권리들에 근거한 기존 법제가 사회 개선을 가로 막는다는 벤담의 확신이 가장 잘 드러나 있는 작업 중 하나는 사망 후 1843년에 출판된 <입법 문제에서 시간과 장소의 영향에 관하여(Of the Influence of Time and Place in Matters of Legislation)> 제 5장이다. 그곳에서 벤담은 자연법 및 자연법에 따른 권리들에 근거한 기존 법제로는 불확실한 미래에 대처할 수 없다고 강조한다. 합리적 판단 능력을 행위의 결과 예측과 관련시킨 벤담에게 그러한 법제는 기존 사회 질서를 고착화시키려는 세력의 권력 유지 수단으로 전략하여 다수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이다. 미래 지향적인 인간의 합리적 계산 능력을 심각히 고려하지 않는 이론적 틀은 시민 사회에 적합한 법제를 마련하는 데 무기력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벤담에게 추상적인 자연법이나 자연법에 따른 도덕적 권리들이 법제의 도덕적 기반이 될 수 없음은 분명해진다. 도덕에 대한 벤담의 이해 방식에 따르면, 윤리란 가급적 다수의 행복이 산출되도록 사람들의 행위를 유도하는 기예이다. 벤담은 최대 다수의 행복이란 공리주의의 원리를 법제의 도덕적 기반이자 의사 결정 과정의 효용 원리로 여겼던 것이다. 더욱이 그는 그 원리가 당시 자연 과학에 의해 뒷받침 가능하다고 확신했다. 이 때문에, 벤담은 법제에 경험적 검증 및 반증의 대상이 될 수 없는 형이상학적 요소나 다의적으로 해석 가능한 은유 및 상징어가 끼어드는 것을 혐오했다.
자연 상태, 자연법, 자연법에 따른 도덕적 권리, 자연 상태에서 시민 사회 상태로 이행 과정의 사회 계약 등은 한때 중세의 전통이나 기존 질서를 부정하는 논리에 사용되었다. 사회가 더욱 복잡해지고, 교회의 권위의 약화와함께 사회가 좀 더 세속화되고, 산업의 발전으로 중산층이 형성되어 계층 간 격차가 계급 갈등으로 번질 조짐이 18세기 중엽에 이르러 가시화되자, 그러한 것들조차 사회 개선을 가로막는 뱅해물로 여기는 입장이 형성되었다. 흄처럼 일부는 그러한 것들의 추상성을 들어 그러한 것들에 대해 인식론적 비판을 가했다면, 벤담은 언어적 비판을 가했다. 벤담에게 자연 상태, 자연법, 사회 계약 등은 언어적으로 구성된 ‘법적 허구(legal fiction)’이다. 벤담에게 사회 개선을 촉진시킬 수 있는 법제는 가급적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용어로 구성되어야 한다. 의사소통 및 이론 구성의 경제성으로 인해 법제에 기술적 용어(technical term)들을 허용하더라도, 그러한 기술적 용어들은 일상어로 풀어 해석 가능하며 경험적 의미를 담고 있어야 한다. 만약 그러한 기술적 용어들에 어떤 상징성을 부여하는 은유를 도입하고 그러한 은유를 사용하여 법제를 정당화하는 경우, 법제는 사회 유지 및 개선에 효과적일 수 없다. 벤담에게 그러한 은유는 법적 허구를 대표한다. 특히 은유를 사용하여 법제를 정당화하는 세력이 기존 질서의 기득권을 쥐고 있을 때, 법제는 다수에게 접근 불가능하거나 다수의 비판적 능력을 약화시켜 기득권 세력 유지의 수단으로 기능한다는 것이 벤담의 입장이다. 벤담은 자연 상태, 자연법, 사회 계약 등을 사회 개선을 가로막는 법적 허구로 간주한 만큼 그러한 것들과 밀접히 맞물려 있던 용어 사용을 기피했던 것이다. 벤담이 법제를 둘러싼 논의에서 자유 대신 용어 ‘안전’을 선호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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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sen, F.(1987), “Bentham and Mill on Liberty and Justice” in Feaver, G. & Rosen, F.(Eds.), Lives, Liberties and the Public Good: New Essays in Political Theory for Maurice Cranston, Macmill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