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 현, 드디어 수면위로 오르다
겨울내내 비가 주룩주룩내리는 밴쿠버를 벗어나 멕시코 푸에르토 바에타에 있는 리조트로 일주일간 휴가를 떠났다. 하지만 그 일주일동안 잠을 제대로 잔 날은 거의 없다. 바로 호주 오픈의 경기를 생방송으로 보았기 때문!
현지 시간으로 새벽 2시경부터 주요 경기가 시작하기 때문에 3-4시간 잠간 눈을 붙였다가 알람소리에 깨어 눈을 부릅뜨고 경기를 보고, 만일 경기가 오래되면 새벽 6시나 되야 다시 눈을 붙인다. 하긴 휴가인데 출근시간 걱정도 없고 무슨 상관이랴.
정말 중요한 경기만 봐야지 생각하고 갔었는데, 우리 정 현선수가 선전하는 바람에(!) 더더군다나 잠을 잘 수가 없었다. 한국 미디어에서 지난 한 주동안 엄청나게 보도된 바와 같이 한국 테니스 선수가 메이져 그랜드 슬램에서 4강진출을 이루었다. 그것도 아직 스물살초반의 선수가 말이다.
한국의 언론에선 그가 죠코비치를 이긴 것을 가장 중요한 것처럼 다루지만, 개인적으로 독일의 알렉산더 즈베레프 (랭킹 4위)를 5세트접전끝에 이긴 것이 가장 의미가 있다고 본다. 그는 모두가 공인하는 차세대 챔피언감이고, 정현보다 한살 어리지만 지난 11월 밀란에서 열린 Next Gen 에 참가하지 않았다. 자신은 그런 수준의 대회에 나가서 스스로를 증명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거다.
그 대회에서 정현이 우승했을 때, 알렉산더 즈베레프가 참가했다면 정현이 그를 물리치고 우승할 수 있었을까, 그랬다면 정현이 테니스 세계에서 더 인정받을 수 있었을 텐데... 하면서 솔직히 좀 아쉬웠었다. 그런데 불과 몇 개월후에 그를 물리칠 기회를 가졌던 거다. 정현 스스로에게 자신감을 준 아주 결정적인 경기가 아니었나 싶다.
스포츠를 하는데 있어서 자신감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다시 한번 깨닫게 된다.
물론 그랜드 슬램 4강 진출도 믿을 수 없는 성과이지만, 현실적으로 그가 프랑스 오픈에서 또 4강을 한다는 예상을 하는 건 무리가 있다. 하지만, 그가 실력있는 선수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좋은 경기를 보여줄 수 있는 실력으로 향상되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게 훨씬 더 중요한 점이다.
이번 준결 페더러와의 매치에서 그가 부상으로 기권한 것은 안타까왔지만, 그가 이길 것이란 생각보단 그와 경기를 한번 끝까지 해봤더라면 아주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마음에서 더 아쉬었다. 엘리트 선수들과 더 많은 경기를 해 볼수록 정현의 실력은 좋아질 수 밖에 없으니까 말이다. 지금 정현은 스포츠 선수로서 다른 선수들의 좋은 점, 배울 점을 스폰지같이 쏙쏙 빨아들여서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는 상태에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의 실력이 지난 해보다, 아니 지난 11월보다 훨씬 나아진 것은 눈에 보일 정도이다. 특히, 예전보다 훨씬 공격적인 경기를 하고 서브,발리나 샷 메이킹이 훨씬 좋아졌다. 무엇보다도 부담갖기 보다는 경기를 하는 것 자체를 아주 즐기는 태도가 좋아보였다. 하지만 넷트 플레이를 비롯한 경기운영에 있어서 아직 경험이 부족한 느낌을 주고, 여전히 랠리를 너무 오래하면서 상대의 실수를 기다리는 수비위주의 경기를 자주 보여준다. 페더러와 경기를 좀 더 했다면 그런 점을 보완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것을 더 배울 수 있었을 텐데...
새로 코치로 영입한 네빌 고드윈 (Neville Godwin)에 대한 기대도 크다. 세계적인 프로 선수가 되려면 필요한 순서였다고 본다.
그동안 이 블로그를 통해 정 현선수에 대해 몇번 글을 올린 적이 있는데, 지난 한 주 동안 조회수가 약 일만회에 달했다. 사람들의 테니스에 대한 관심이 하늘을 찌르는 듯 했다. 하루아침에 김연아, 박세리, 박지성과 이름을 나란히 하게된 한국의 청년 정 현. 그 자체가 대단한 성취다.
문제는 앞으로 십년동안 그가 지금 이룬 수준을 계속할 수 있을지 인데, 물론 본인의 정신력도 중요하지만, 한국 대중과 미디어의 특유한 극성(?)때문에 혹시 영향을 받아서 초심이 흔들리지나 않을까 살짝 걱정이 된다. 본인이 대중의 인기나 반응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거기서 기운을 받는 것도 같지만, 너무 지나치지 않기를 바랄 뿐. 제발 자기 일을 제대로 하게 내버려둡시다!
그리고 몇 가지 주목할 점들
그밖의 뉴스로는 36살 (한국나이론 38살)의 페더러가 20번째 그랜드 슬램 우승을 이루었다는 것일게다. 정말 또다시 이런 기록이 나올 수 있을까. 다른 선수들은 게임 몇 번 더 했다고 발에 물집이 생겨 뛰지도 못하고, 더위가 너무 심해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는데, 무슨 황소 체력을 가졌길래 삼십대 중반이 넘어간 사람이 또 그랜드 슬램을 이긴단 말인가. 나달도 그만큼 대단하려고 열심히 뛰었지만, 결국 부상으로 기권하고 말았는데 말이다. 정말 대단하긴 하다.
페더러나 나달만큼 이루었으면, 힘든 훈련 그만 두고 그동안 벌어들인 부를 즐기면서 살면 될 텐데, 얼마나 엄청난 동기 부여를 하고, 이 스포츠를 얼마나 사랑하면 그럴 수 있는 건지 참, 상상이 안된다. 대충 여기서 그만 두고 어린 후배들에게 기회의 문을 열어주는 건 어떨지도 생각해본다.
또 한 가지 흐믓한 것은 덴마크의 캐롤라인 우즈니아키가 드디어 그랜드 슬램을 우승해냈다는 거다. 그녀가 갓 스물이던 2010, 2011년 이미 랭킹 1위를 이루었던 그녀는 랭킹만 1위지 그랜드 슬램을 한번도 우승하지 못한 희한한 케이스로 손꼽혔었다. 그 당시 세레나 윌리암스가 투어에 덜 참가하는 바람에 그녀가 랭킹 1위를 차지하게 된 거고, 세레나가 참가하는 그랜드 슬램만 나가면 맥을 못 춘다고 여겨졌었다. 실제로 2009년 2014년 US 오픈 결승전에 오르긴 했지만, 각각 킴 크라이스터와 세레나 윌리암스에게 패배한 바 있다. 또 프로골퍼 로리 맥클로이와 약혼까지 했다가 파혼)(당)하는 아픔도 겪었고, 지난해 말 프로 농구선수 (샌 안토니오 스퍼스) 데이비드 리와 약혼했다. 이번엔 성사되기를...
상위 랭킹을 기록했던 많은 여자 선수들이 그 이후엔 사라지거나 아주 형편없는 성적을 내는 데 반해서, 우즈니아키는 이제 은퇴할 거라는 수근거림속에서 꾸준히 자신을 목표를 위해 노력해서 이번 우승을 이룬 경우라 특별하다. 솔직히 로마니아의 할렙과 대결한 이번 결승전을 보고 많이 놀랐다. 여자 결승전이 아니라 남자 결승전이라고 해도 될만큼 수준이 높았고, 예전에 보았던 우즈니아키와 비교하면 약 5배는 더 실력이 향상된 것 같았다. 특히 코트에서의 움직임이 아주 빠르고 샷 메이킹이 매섭고 정확했다. 정말 열심히 훈련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아직도 27세로 젊은 나이의 우즈니아키, 이번 대회만큼 계속 선전할 수 있다면 그녀를 이길 수 있는 선수는 별로 없지 않을까 싶다.
모든 스포츠가 그렇겠지만, 테니스는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선수 본인이 얼마나 승리를 원하느냐, 얼마나 정신적으로 강인할 수 있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진다는 것을 새삼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