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적 타성 타파
20160318
본문 / 요한계시록 3:14~22
14.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이르시되
15.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16.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
17.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18.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19.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21.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22.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영적 타성에 젖는 것은 신앙생활에서 가장 무서운 적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라오디게아교회에 대한 이야기가 이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라오디게아교회에 대한 이야기는 그 중에서 제일 마지막에 나옵니다.
현대 교회는 라오디게아교회의 모습과 많이 닮았습니다. 라오디게아교회의 모습은 오늘날 우리의 모습, 한국 교회의 모습과 흡사합니다.
라오디게아교회의 모습을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는 영적 타성에 젖지 말라는 것입니다. 매너리즘(mannerism)에 빠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영적 타성에 젖는 이유는 습관적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습관적으로 반복하다 보면, 껍데기만 남고 내용은 희미해집니다.
한때 한국 교회는 굉장히 뜨거웠습니다. 어느 순간부터 서서히 식어져가는 것을 봅니다. 영적 타성은 갑자기 찾아오는 것이 아닙니다. 서서히 오기 때문에 우리가 인식하지 못합니다. 그것이 문제입니다.
우리가 바쁘게 살다 보면, 영적 타성에 젖게 됩니다. 바쁘게 운전하다 보면, 자동차에 기름이 얼마나 남았는지 확인할 여유가 없습니다.
그러다가 기름이 바닥나면, 차가 멈춰버립니다. 차가 전혀 움직이지 않습니다. 아무리 멋진 차라도 기름이 바닥나면 어쩔 수 없습니다.
초신자에게는 영적 타성이 찾아오지 않습니다. 신앙생활을 어느 정도 한 사람에게 영적 타성이 찾아옵니다.
예수님을 믿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은혜 받고 변화되어 모든 것이 좋은 분들은 오늘 설교를 이해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10년 이상 하신 분들은 정신 바짝 차리고 설교를 들으셔야 합니다.
첫사랑은 대단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에베소교회를 향해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계 2: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을 처음 만났을 때, 처음으로 은혜 받았을 때를 회상하시기 바랍니다. 주님과의 첫 사랑을 기억하시는 분들은 그때를 떠올리시기 바랍니다. 그때와 지금의 차이를 확인해보시기 바랍니다.
첫사랑 당시에는 정신없습니다. 너무 좋습니다. 미칠 것 같습니다. 교회가 좋고, 예배가 좋고, 찬송이 좋고, 모든 것이 좋습니다. 마치 불덩어리 같습니다.
다른 것은 이야기하고 싶지 않습니다. 세상의 일은 이야기하고 싶지 않습니다. 사람을 만나면 전도하고, 다른 것은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이전에 좋아하던 것을 모두 버립니다.
어디를 가든 성경을 챙깁니다. 무엇을 먹든지 신경 쓰지 않습니다. 교회 근처에만 와도 가슴이 뜁니다. 모든 예배에 빠지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좋아집니다. 그것이 첫사랑입니다.
첫사랑에게는 아끼는 것이 없습니다. 모든 것을 주고 싶습니다. 방화자가 됩니다. 그래서 만나는 사람마다 불을 받습니다. 너무 뜨거워서 만나는 사람도 덩달아 뜨거워집니다.
그런데 어느 시점이 되면 식기 시작합니다. 방화자였던 사람이 소방수가 됩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산전수전을 겪은 것입니다. 배울 것을 다 배웠습니다. 경험할 것을 다 경험했습니다. 맛볼 것은 다 맛보았습니다.
그래서 배우는 것에 더 이상 관심이 없어집니다. 사람들을 평가하려 합니다. 그렇게 되면 신앙이 잠들기 쉽습니다. 병들기 쉽습니다.
에베소교회는 처음 사랑을 버렸습니다. 처음 사랑을 버렸다는 것은 김빠진 콜라와 같습니다. 아무 맛이 없습니다.
사데교회를 향해 예수님께서는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계 3:2)”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실상은 죽은 교회라는 의미입니다.
라오디게아교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라오디게아교회를 향해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계 3:15)”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시대의 교회가 라오디게아교회의 모습을 닮았습니다. 영적 타성이 그만큼 무서운 것입니다. 서서히 죽어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라오디게아교회를 향하여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계 3:17~1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부끄러운 모습으로 있으면서도 눈이 어두워서 부끄러운 줄 모릅니다. 자신의 모습을 전혀 알지 못한다는 것은 참 심각한 일입니다.
오히려 자신이 잘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배에 빠지지 않고, 헌금도 제대로 하고, 봉사도 하고 있기 때문에 자신에게 문제가 전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문제입니다. 병들었는데 병든 줄 모르는 것이 문제입니다.
사데교회의 가장 심각한 것은 눈먼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다른 세상에 눈이 팔렸습니다.
완전히 눈먼 것이 아닙니다. 영적인 것은 보지 못하는데, 세상적인 것에는 눈이 밝습니다. 이익과 안목의 정욕에 눈이 밝습니다. 세상에 대해서는 눈이 밝아 돈 버는 일에는 열심을 냅니다. 그런데 영적인 것은 보지 못합니다.
오늘날 우리나라가 경제적으로 어렵다고 말해도,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나아졌습니다. 물론 절대 빈곤층이 있지만, 우리나라는 경제대국입니다.
요즘은 미국에 가면 사올 것이 없습니다. 일본에 가도 마찬가지입니다. 세계 어느 나라를 가든지 사올 것이 없습니다. 그만큼 우리나라가 경제적으로 발전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세상적인 것에 눈이 밝아져서 영적인 것에 대한 갈망이 식어졌습니다. 주님을 의지하는 마음이 약화되었습니다. 교회에 다니고 신앙인으로서 해야 할 것은 다 하지만, 이전의 열정과 열심은 사라졌습니다. 영적 갈증을 느끼지 않습니다.
라오디게아교회의 모습이 그렇습니다. 할 것은 다 합니다. 그런데 그 안에 열정이 없습니다. 영적으로 온도가 점점 떨어졌습니다.
영적 온도를 유지하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기본을 유지하기가 어렵습니다. 세상이 우리의 시선을 빼앗아서 우리의 시선을 멀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영적 세계 안으로 깊이 나아가기가 어렵습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현상유지하려는 태도를 경계해야 합니다. 매우 위험합니다.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 중 라오디게아교회는 가장 혹독한 심판을 받았습니다.
라오디게아교회의 미지근한 상태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계 3:1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라오디게아교회는 예배도 드리고, 봉사도 하고, 헌금도 하고, 모든 것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라오디게아교회를 향하여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신앙생활을 함에 있어서 애매모호한 중립적 태도를 갖는 것이 위험한 것임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도 모르게 변질됩니다. 처음과 같지 않습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현상 중 3가지 이상 해당된다면, 영적 타성에 빠진 것입니다.
첫째, 더 이상 배우려고 하지 않습니다.
흥미가 없고, 다 배웠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더 이상 배우려고 하지 않습니다. 기가 막힌 일입니다.
평생 배워도 하나님의 깊은 세계 속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2천 년 기독교 역사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써놓은 책을 다 읽을 수는 없습니다. 그 속에 신비로운 것이 매우 많습니다. 한 주제에 대한 책만 해도 수없이 많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어떻게 다 알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신실하심’ 이 한 가지 주제만 1년 공부해도 다 알 수 없습니다. 그만큼 깊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 이것은 매우 심오한 주제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가 매우 큽니다. 그런데 우리는 배우려고 하지 않습니다.
목회자가 대충 목회하려 한다면, 공부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렇게 하면 영적 나태에 빠질 수 있습니다.
둘째, 회개하지 않습니다.
죄를 짓지 않아서 회개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영적으로 둔감해졌기 때문에 회개하지 않는 것입니다. 영적 타성에 젖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모습을 보지 못합니다. 자신의 실체를 모르니까 회개하지 않습니다.
셋째, 눈물이 메말랐습니다.
울지 않습니다. 회개의 눈물이 없습니다. 건조해졌습니다. 찬송을 불러도, 예배를 드려도, 기도를 해도 눈물이 흐르지 않습니다.
넷째, 예배를 사모하거나 기다리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예배를 얼마나 사모하십니까?
다섯째, 간증거리가 없습니다. 이런 사람은 신앙생활에 활력이 없습니다.
여섯째, 판단하기 좋아합니다.
일곱째, 권면이나 충고를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가르치려고 합니다.
여덟째, 과거 이야기만 합니다.
아홉째, 교회의 사역에 빠지려 합니다.
주님을 위해 헌신할 수 있는 엔진이 식어버렸습니다. 금방 피곤해집니다. 할 만큼 했다고 생각합니다.
열째, 봉사하고 있지만, 기쁨이 없습니다.
지쳐버렸습니다. 겨우 해냅니다. 이렇게 되면 시험에 들 가능성이 많습니다.
한국 교회는 이전에 하던 것을 다 합니다. 예배도 있고, 기도 모임도 있고, 새벽기도도 있고, 다 있습니다.
그런데 불이 없습니다. 뜨거움이 없습니다. 형식만 있습니다. 내용은 매우 부실해졌습니다. 이전에 타오르던 불은 없어졌습니다. 한국 교회가 일어날 때에는 영적으로 후끈했습니다. 열기가 있었습니다.
스포츠 경기장에 가보세요. 열기가 느껴집니다. 죄를 짓는 곳에는 뜨거움이 있습니다. 뜨겁습니다. 후끈후끈합니다.
요즘 많은 교회들은 싸늘해졌습니다. 진리를 말하고 진리를 전하는 곳이 가장 뜨거워야 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의 뜨거운 열기는 영혼을 죽입니다. 죽이는 영이 가득합니다. 그러나 영적 열기는 사람을 살립니다.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고, 부흥의 역사가 일어나는 곳에는 불이 있습니다. 뜨거움이 있습니다. 싸늘한 곳에는 역사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많은 교회들이 현상 유지에 급급합니다.
여러분의 신앙은 어떻습니까? 신앙의 목표가 무엇입니까?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째, 묵은 땅을 기경해야 합니다.
묵은 땅이 무엇입니까? 한때는 기름진 땅이었습니다. 수많은 소출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잡초가 우거지고 황폐해졌습니다.
한때는 매우 비옥한 땅이었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묵은 땅이 되어버렸습니다. 잡초가 우거지고 메말라버렸습니다. 소산이 더 이상 없습니다. 사람들이 외면합니다. 묵은 땅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영적으로 무기력한 상태가 묵은 땅과 같습니다. 영적 무기력에 적응해버렸습니다. 그래서 익숙해졌습니다.
사람은 잘 적응합니다. 심리학자 마틴 셀리그만(Martin. E. P. Seligman) 박사는 “학습된 무기력(learned helplessness)”이라는 말을 사용했습니다. 무기력이 학습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차지도 않고 덥지도 않은 상태에 있지는 않습니까. 라오디게아교회와 같은 교회가 오늘날 많습니다.
교회답지 않은 교회, 성도답지 않은 성도가 많습니다. 성도들이 영적으로 잠들어있는데도 성도들을 깨우지 않는 교회가 많습니다. 오히려 성도들을 잠재웁니다.
라오디게아교회는 성도들로 하여금 미지근한 신앙생활을 하도록 조장하는 교회였습니다. 성도들에게 전혀 부담을 주지 않았습니다. 세상에서 열심히 살라고 합니다.
교회에만 모여 있고 세상을 등진 자처럼 사는 것도 문제이지만, 형식적으로 교회 다니는 사람이 세상에서 열심히 살다 보면, 기본을 유지하기 어렵습니다.
성도들에게 부담주지 않는 교회를 좋은 교회처럼 여기는 풍조가 있습니다. 그런 교회가 좋아 보입니다. 편안하게 적당히 믿자는 것입니다.
잠자는 교회 안에 있으면, 자신이 잠든 것도 모릅니다. 모두 잠들었기 때문에 잠든 것이 오히려 정상입니다.
어떤 교회가 좋은 교회입니까? 늘 뜨거운 교회입니다. 성도들이 잠들지 않도록 성도들을 깨우는 교회입니다.
그래서 교회에만 오면 정신이 번쩍 듭니다. 말씀을 들으면 정신이 들고, 회개하게 되고, 가슴에 불이 붙습니다.
오순절의 역사를 보세요. 불이 내렸습니다. 제자들은 알아야 할 것은 다 알고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요엘서를 인용하여 설교했습니다.
베드로는 구약을 알고 있었습니다. 베드로에게 지식이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고, 구약을 통달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설교를 수없이 들었습니다.
베드로는 지적(知的)으로 충만했지만, 능력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에게 불이 임했습니다.
말씀이 능력이 되어 베드로의 입에서 나왔습니다. 이로 인해 3천 명이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베드로의 입에서 불이 나갔습니다.
이미 알고 있는 것 위에 불이 임했을 때에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향해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행 3:6)”라고 말하니 일어나 걷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사역자도 마찬가지입니다. 공부를 많이 해서 머릿속에 지식이 가득합니다. 알 것은 다 압니다. 그러나 역사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불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에베소교회를 향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계 2:5)”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의 불이 꺼졌다는 의미입니다. 불이 꺼진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 식어버린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
남녀 사이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뜨겁게 사랑하지 않고서는 결혼할 수 없습니다. 사랑이 뜨거워야 합니다.
베드로전서 4장 8절에 보면,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복음이 우리에게 주는 은혜가 그런 것입니다.
뜨겁게 사랑하면, 시련도 이겨낼 수 있습니다. 고난도 이겨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랑이 뜨겁지 않으니까 외부적으로 유혹이 오면, 모든 것을 포기해버립니다.
주님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면, 죽는 줄 모릅니다. 모든 어려움을 이겨냅니다. 힘들어도 상관없습니다. 시험에 들지 않습니다.
초대 교회의 성도들은 순교했습니다. 베드로는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처형당했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주님을 향한 사랑이 세상의 열기보다 뜨겁기 때문입니다.
그 불을 아무도 끌 수 없습니다. 시련, 핍박, 환난, 순교도 그 불을 끌 수 없습니다. 시시한 것 때문에 마음이 흔들리지 않습니다.
불이 없는데, 어떻게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불이 없는데, 어떻게 충성할 수 있겠습니까. 불이 없는데, 어떻게 헌신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 묻은 복음 앞에 사로잡히지 않으면, 주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교회를 사랑할 수 없습니다.
죽더라도 자기 일에 끝까지 생명을 바치는 것이 충성입니다. 요한계시록 2장 10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죽음으로 너의 충성을 증명하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불이 없는 사람은 충성할 수 없습니다.
열정은 감정적인 것이 아닙니다. 참다운 열정은 죽을 때까지 식지 않는 것입니다. 죽음을 통해 그것을 증명해야 합니다.
사도 요한이 요한계시록을 기록할 당시에는 환난과 핍박으로 가득했습니다. 사도 요한이 요한계시록을 기록할 당시에는 편안하게 예수님을 믿을 수 없었습니다.
로마 황제의 지배 하에 수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형태로 잔인하게 죽었습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믿음의 사람들이 믿음을 지키려면 많은 어려움이 따랐습니다. 순교자의 영성에는 불이 있습니다.
우리 교회의 금요철야가 우리 민족의 운명을 쥐고 있는 마지막 보루입니다. 그래서 저는 비장합니다. 한국 교회의 열기가 식어버렸습니다. 불이 꺼졌습니다.
우리 교회에서 이렇게 모이는 것도 자칫하면 형식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끼리 은혜 받고 말씀 듣고 기도하다가 흩어지는 것으로 끝나면 안 됩니다. 밤을 지새우며 생명을 걸고 사투를 벌여야 합니다. 그래서 하늘이 열리고 불이 이곳에 임하고 기적이 일어나야 합니다.
전국 방방곡곡에 소문이 퍼져야 합니다. “그곳에는 성령의 임재가 있고, 기름 부으심이 있고, 기적이 일어나고, 초대 교회의 영성이 살아있다.”라고 소문나야 합니다.
그리고 이곳에 참석한 사람들이 불을 받아야 합니다. 불을 받고 돌아가 자신의 교회에 불을 지펴야 합니다.
영적 타성은 아주 교묘하게 찾아옵니다. 제 자신에게서도 그것을 봅니다. 저는 영적 선봉에 서있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타성에 젖을 위험이 늘 있습니다.
할 일이 많기 때문에 에너지를 분배하면, 제 마음도 나누어지고, 타성에 젖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기도하는 둥 마는 둥 합니다.
자신이 식었다고 생각한다면, 불덩어리를 만나시기 바랍니다. 영적 교제권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누구를 만나는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고만고만한 사람들끼리 모이면, 고만고만할 수밖에 없습니다. 만나고 나면 오히려 힘이 빠지는 사람도 있습니다. 기도할 마음이 사라지는 사람도 있습니다.
인생은 짧습니다. 가슴에 불이 붙는 사람들끼리 만나 시너지(synergy) 효과로 불이 치솟는 역사가 일어나야 합니다.
불이 일어나는 곳에 일이 일어납니다. 아무리 좋은 자동차라도, 연료통에 기름이 가득 차 있어도 엔진에 불이 붙지 않으면 아무 소용없습니다. 비행기가 하늘로 날아오를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엔진에 불이 붙어야 합니다.
기막힌 재능을 가지고 있고, 이론과 지식을 많이 알아도, 가슴에 불이 붙지 않으면 아무 소용없습니다. 가슴에 불이 붙을 때, 재능이 실제화 되고, 능력이 됩니다.
아무것도 없지만, 믿음 하나로 정면승부 하며 하나님의 기적을 보려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머리로만 믿으려 합니다. 입으로만 믿으려 합니다.
강단에서 세련된 말투와 잘 짜여진 원고로, 논리 정연하게 설교하지만, 설교에 불이 없습니다.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기막힌 진리가 있습니다. 복음은 능력입니다. 헬라어로 능력은 ‘δυναμις(두나미스)’입니다. 여기서 ‘다이너마이트(dynamite)’라는 단어가 파생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복음은 다이너마이트입니다.
로마서 1장 16절에 보면, 사도 바울은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이 터지면, 아무도 감당할 수 없습니다.
복음은 우리의 가슴에 불을 지릅니다. 십자가는 우리의 삶에 불길을 일으킵니다.
하나님께서는 타는 불길 가운데서 모세를 만나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영원히 타는 불이십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실 때에 불을 지펴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불이 모세의 심장으로 옮겨지니 모세가 바로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모세는 거대한 애굽의 최고 권력자 앞에 지팡이 하나 들고 나아갔습니다. 그것이 불 받은 사람의 모습입니다. 겁날 것이 없습니다.
모세는 지팡이 하나 들고서 당시 인류 최고 문명국가의 권력자 앞에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민족을 이끌고 애굽에서 나갔습니다. 하나님의 불이 붙은 것입니다.
우리에게 아무것도 없어도 됩니다. 불만 있으면 역사가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불, 소멸하지 않는 불, 능력의 불만 있으면 됩니다. 불꽃처럼 살고 싶지 않습니까.
마틴 루터(Martin Luther)의 가슴에 불이 붙었을 때, 95개의 반박문을 들고 거대한 로마 가톨릭의 권력 앞에 당당하게 맞설 수 있었습니다. 진리에 대한 불이 마틴 루터의 가슴 속에서 타올랐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받은 사람은 불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예수님 시대의 바리새인들을 매우 싫어하셨습니다. 그들은 규칙을 철저히 지켰지만, 그들의 가슴에는 불이 없었습니다. 할 것은 다 합니다. 그런데 불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들은 그들을 싫어하셨습니다.
주일을 지키는 것이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헌금 열심히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율법의 조항과 수칙을 지키는 것이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가슴에 불이 있어야 합니다. 바리새인들은 불 대신 쓸데없는 열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나쁜 불입니다.
요즘 교회도 많고, 교회 안에 모임과 프로그램도 많은데, 문제는 불이 없습니다. 이것이 이 시대의 안타까움입니다.
불이 있다 해도 가물거리는 불입니다. 바람이 불고 비가 오면 꺼집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불을 지르시려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복음을 경험한 것은 가장 뜨거운 불을 만난 것입니다.
복음, 십자가는 가장 뜨거운 사랑입니다. 이것보다 뜨거운 것은 없습니다. 복음을 경험하면, 제정신으로 있을 수 없습니다. 복음에 미쳐버립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미치게 만듭니다. 이 시대에는 미지근하면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 라오디게아교회를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시려는 것은 불이 되라는 것입니다. 미치라는 것입니다.
맨 정신으로 예수님을 믿지 말라는 것입니다. 아주 미치라는 것입니다. 남들이 무시하든 욕하든 진짜 미치라는 것입니다. 불이 붙으면 미칩니다.
여기서 미쳤다는 것은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미친 것입니다. 미친 것이 우리의 기준으로는 지극히 정상입니다. 미치지 않은 것이 오히려 비정상입니다.
아직 미쳐본 적이 없거나 미치도록 신앙생활하고 있지 않다면, 아직 예수님을 만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정말로 예수님을 만나면, 눈이 뒤집어집니다. 미쳐버립니다.
하나님을 만났는데도 미치지 않았다면, 하나님을 제대로 만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마 5:3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마 5:41)”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 5:4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누가 이렇게 할 수 있습니까? 미치면 이렇게 할 수 있습니다. 제정신으로는 이렇게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미친 짓을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참으로 예수님을 믿으면, 이렇게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불이 있는 사람을 사용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불이 있는 교회를 사용하십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오순절에 불이 교회에 임했습니다.
역사가 오래된 교회를 보면, 건물이 멋지고 조직이 기막히고 틀이 잘 잡혀있습니다. 흠 잡을 것 없이 모든 것을 갖추고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 불이 없습니다.
기도회에 불이 없고, 예배에 불이 없고, 직분자들의 가슴에 불이 없다면, 그 교회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멋진 건물도 의미 없습니다.
아무것도 없어도 됩니다. 건물이 허름하고, 조직이 어설퍼도 그곳에 불이 임하고 성령이 임하시면 됩니다. 그것 하나로 충분합니다.
불, 뜨거움, 열기를 잃어버리면 안 됩니다. 찬양 한 곡을 부르더라도 땀이 나도록 불러야 합니다. 힘을 다해 찬양해야 합니다. 마음을 다해 찬양해야 합니다.
5천 명이 목청껏 찬양하면, 예배실 천장이 들썩거릴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소리를 들으시기 원하십니다.
30분 동안 온 마음을 다해 기도하면 진이 다 빠집니다. 더 이상 드릴 것이 없을 정도로 진액을 다 쏟아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뉴스를 보세요. 사회적으로도 기도해야 할 것이 많습니다. 가장 악한 시대입니다. 더 이상 악해질 수 없습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회개해야 합니다. 본문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라오디게아교회에게 회개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계 3:19). 돌이키라는 것입니다. 처음으로 돌아가라는 의미입니다. 어디에서 잘못되었는가를 확인하고, 다시 시작하라는 의미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신앙을 되짚어보고, 처음 신앙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미지근한 상태의 라오디게아교회의 큰 문제점은 회개하지 않는 것입니다. 왜 회개하지 않습니까? 해야 할 것을 다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해야 하는 것을 다 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회개하지 않습니다. 문제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심각한 문제입니다.
타락하여 곁길로 가버렸다면, 구해낼 수 있을 것입니다. 잘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문제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진정한 회개는 첫 사랑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처음으로 돌아갈 때, 우리는 복음을 붙들어야 합니다.
가장 기본적인 신앙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십자가의 신앙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겉치레는 모두 치워버리고, 본질로 돌아가야 합니다. 십자가의 영성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제대로 회개하면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회개하지 않으면 죄의 힘, 이전에 가졌던 습관의 힘이 에너지를 빼앗아가 버립니다.
죄의 힘이 우리를 무력하게 만듭니다. 은혜를 받는데도 금방 무력해집니다. 죄의 힘이 아주 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뒤로 물러납니다. 옛 삶의 모습으로 빠져 들어갑니다.
여러분 가운데 회개의 영이 임하시기 바랍니다. 회개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둘째, 자아만족과 나태와 싸워 이겨야 합니다.
본문 요한계시록 3장 19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정도면 된 것 아닌가’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그렇지 않습니다. 영적 세계에서는 ‘이 정도’가 없습니다. 끝이 없습니다.
왜 영적으로 나태해집니까? 자만(自滿)하기 때문입니다. 배가 부르기 때문입니다. 먹고살만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매달리지 않습니다.
벼랑 끝에 서서, 막다른 길에서 더 이상 소망이 없고, 의지할 것이 하나도 없다고 생각하면, 하나님께 매달릴 수밖에 없습니다.
예전에는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붙잡고 기도했습니다. 그만큼 절박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요즘은 기도원에도 가지 않습니다. 그래서 기도원이 문을 닫고 있습니다.
우리가 미온적으로 기도해서는 불을 받을 수 없습니다. 결사적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의 야성을 회복해야 합니다.
불을 받으려면, 기도의 태도가 달라져야 합니다. 엘리야처럼 기도해야 합니다. 그냥 기도해서는 하늘 문이 열리지 않습니다. 결사적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셋째, 갈망을 유지해야 합니다.
영적으로 갈급함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바울은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빌 3:12)”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의 심령은 늘 가난했습니다. 바울은 늘 배고픔을 느꼈습니다. 하나님을 더 알기 원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더 경험하기 원했습니다.
말라기서를 보세요. 무엇이 문제입니까? 언제부턴가 예배가 시들해졌습니다. 하나님께 온전하게 헌금하지 않았습니다. 형식만 가득한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불경했습니다. 그들은 영혼이 죽어갔습니다. 이것이 그 시대의 모습이었습니다.
라오디게아교회의 모습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시대의 끝에 있습니다. 우리도 그러한 때를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불이 되거나 형식적인 신자로 남거나 둘 중의 하나를 택해야 합니다. 중립지대에 서있으면 안 됩니다. 미지근하면 안 됩니다.
지금은 철저히 세속화된 시대입니다. 이런 시대에 미지근한 상태로 살아가는 사람은 아무 소망이 없습니다. 세상에 발을 담그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신앙은 형식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야 합니다. 영적으로 깨어 하나님 안에서 승부를 걸어야 합니다. 믿음의 선명한 기준을 가지고 선택해야 합니다.
영적 미지근함을 끝내시기 바랍니다. 매너리즘에 빠져 야성이 사라져버린 모습을 버리시기 바랍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불이 되는 것입니다. 열 명의 사람이 불을 받으면, 거기서 역사가 일어납니다.
우리가 불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가슴에 불을 지르실 때, 우리는 세상에 불을 일으키는 방화자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우리 교회의 철야기도가 살아나야 합니다. 영적 매너리즘에 빠져 고만고만한 모습으로 유지되어서는 안 됩니다. 땀이 나도록 부르짖으시기 바랍니다.
부르짖음의 영성을 되찾지 않으면 안 됩니다. 금요철야를 통해 그것이 회복되기를 축원합니다. 불이 임하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통해 일하실 줄 믿습니다.
세상의 염려와 문제를 이길 수 있는 능력도 불입니다. 불이 필요합니다. 여러분이 아는 지식에 불이 붙으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멋지게 사용하실 것입니다.
인생의 모든 문제를 넉넉히 이기고도 남을 것입니다. 영적 나태함을 극복하게 될 것입니다. 영적 매너리즘을 끝낼 것입니다. 십자가 복음의 능력이 심장에서 다이너마이트처럼 터지는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가슴에 불이 타서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 생명을 기꺼이 드릴 수 있는, 능력 있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