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버드 특강 “정의” - 벤담의 공리주의
2011년도 새해가 밝았습니다. 2010년도엔 대한민국이 참 어지려웠습니다. '정의'라는 단어가 무색할 정도로 힘 가진자들의 노리개 감으로 전락을 한 듯 합니다. '정의'의 본 뜻을 제대로 알리기 위해서라도 마이클 샌델 교수의 강의 전문을 편집해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제발, 2011년도에는 대한민국 사회에 '정의'가 되살아나기를 고대해 봅니다. 괜한 '공정사회' 들먹거리지 말고...
<신년기획> 하버드 특강 “정의”
(Justice with Michael Sandel : What's Right Thing To Do)
(PBS / Harvard University 공동제작)
<<프로그램 소개>>
정의란 무엇인가
하버드대학 역사상 가장 인기 있는 강좌 중 하나로 꼽히는 마이클 샌델 교수의 “정의”. 지난 20년간 하버드 학생들 가운데 이 강의를 수강한 학생 수는 14,000명에 이르며 특히 2007년 가을엔 한학기 수강생이 1,115명에 달했다. 2010년 한국에서도 마이클 샌델 교수의 강의를 바탕으로 한 책 역시 꾸준히 국내 베스트셀러에 이름을 올렸고 저명 인사들의 독서 목록에 끊임없이 거론되면서 대중적인 관심이 고조되어 왔다. 그러나 책을 접한 사람들의 공통적인 반응은 조금은 난해하고 관념적이라는 것. 그러나 이제 이 특별한 강의의 실체를 직접 보고 확인할 수 있는 있는 좋은 기회가 마련됐다. Justice 열풍의 진원지인 하버드 특강 “정의”를 EBS가 2011년 신년기획으로 준비한 것. 2011년 1월 한달 동안 총 12강으로 이루어진 “정의” 특강이 EBS에서 연속 방송된다.
아리스토텔레스와 제러미 벤담, 존 스튜어트 밀, 임마누엘 칸트, 존 롤스 같은 철학자들의 이론을 바탕으로 도덕, 정의, 자유, 평등을 논하는, 얼핏보면 지극히 딱딱히 보이는 이 강의가 이런 센세이션을 일으킨 이유는 무엇일까? 시대적인 요구가 맞아떨어진 것도 사실이지만,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샌델 교수의 강의 자체가 역동적이고 재미있기 때문일 것이다. 소위 소크라테스식 문답법으로 널리 알려진 샌델 교수의 강의 스타일은 일방적인 수업이나 지식의 암기가 아니라 실생활에서 누구나 경험할 수 있는 상황을 바탕으로 질문들을 학생들에게 던지고 끊임없이 상호작용하는 것으로 요약된다. 이런 인기는 현재 전 세계로 확산되어, 일본의 공영방송 NHK는 지난 4월부터 2개월에 걸쳐 "정의“강의를 방영해서 큰 사회적 반향을 일으켰으며 실제로 NHK 홈페이지 프로그램 다운로드 횟수 신기록을 갱신할 만큼 큰 인기를 얻었다. 또한 BBC는 2009년 라디오 특집 프로그램으로 ”정의“를 고정 편성했고 2011년 TV 정규 편성을 고려하고 있다.
급격한 경제개발을 거치며 우리는 ‘정의’를 잊거나 무시하게 됐다. 정의와 자유, 도덕, 평등처럼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 모두에게 필수적인 개념들을 간과해왔던 것이다. 우리 삶과 동떨어져 있고, 아주 어려울 것 같다는 선입견도 이 개념들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어렵게 했다..
이제 마이클 샌델 교수의 강의실로 들어가 정의와 자유, 도덕, 평등에 대해 고민해보자. 12강으로 이뤄진 강의에서 샌델은 까다로운 도덕적 딜레마들을 제시하며, 어떤 선택이 정당한지를 끊임없이 질문한다. 브레이크가 고장 난 전차를 인부 1명이 일하는 선로와 5명이 일하는 선로 중 어디로 몰고 가야 할까? 조난을 당해 오랫동안 굶주린 선원들이 제일 약한 소년을 잡아먹었다면, 그 행위는 도덕적으로 용납될 수 있을까? 사람의 목숨에 값을 매기는 건 가능하고 정당한 일일까? 안전띠나 오토바이 헬멧 착용을 법으로 강제하는 건 잘못일까? 국방, 치안, 사법제도 이외의 목적을 위해 세금을 거두고 사용하는 건 잘못일까? 정자 기증, 난자 기증, 상업적 대리출산은 아기를 사고파는 것과 비슷할까? 선의의 거짓말도 거짓말이기 때문에 잘못된 것일까? 미국의 많은 대학이 실시하고 있는 소수집단 우대제도는 정당할까? 선천적 장애가 있는 골프선수는 카트를 타고 경기에 임할 수 있을까? 샌델의 질문은 끝이 없다. 그리고 정해진 모범정답도 없다. 도덕적 문제는 흑과 백의 이분법으로 가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쉴 새 없이 질문속에, 반박에 반박이 오가며 지성의 향연이 펼쳐지는 마이클 샌델 교수의 공개강의실, 하버드대학 샌더스극장(Sanders Theatre: 하버드대학 내 대형 강의와 공연을 위한 공간. 처칠, 루즈벨트, 마틴 루터 킹, 고르바초프 등 유명인들의 특강이 이루어졌던 장소로도 유명함)으로 가보자.
벤담의 공리주의
(The Moral Side of Murder/The Case for Cannibalism)
《개요》
하버드대학 샌더스극장에서 진행되는 샌델 교수의 강의는 지루하거나 고리타분하지 않다. 일상생활에서 만나는 문제들이나 재미있는 가정을 가져와 그 안에 숨은 철학을 찾아내기 때문이다. 첫 번째 시간인 “벤담의 공리주의”는 흥미로운 가정으로 시작한다. 브레이크가 고장 난 전차를 인부 1명이 일하는 선로와 5명이 일하는 선로 중 어디로 몰고 가야 할까? 5명 대신 1명을 희생시키는 게 정당하다면, 선로 밖에 있던 1명을 밀어 넣어 전차를 멈추는 건 어떨까? 19세기 영국에서 실제로 일어난 사건도 정의와 도덕을 논하는 소재로 등장한다. 조난을 당해 오랫동안 굶주린 선원들이 제일 약한 소년을 잡아먹었다면, 그 행위는 도덕적으로 용납될 수 있을까?
각각의 경우에 대해 판단을 내리며, 우리는 두 가지 방식의 도덕적 원칙을 인식하게 된다. 행위의 결과에 따라 도덕성을 판단하는 결과론적 도덕 추론과 절대적인 도덕규범에 따라 도덕성을 판단하는 정언론적 도덕 추론이다. 다양한 도덕적 딜레마를 체험하며 지적 즐거움과 성찰을 얻을 수 있는 마이클 샌델 교수의 강의실로 들어가 보자.
<강의 내용>
‘정의’를 공부하는 이 강좌를 이야기 하나로 열어보겠습니다. 자신이 전차 기관사라고 가정해봅시다. 전차는 시속 100km 정도로 달리고 있는데 선로 앞쪽에 작업 중인 인부 5명이 보입니다. 아무리 애를 써도 전차는 멈추지 않습니다. 브레이크가 고장 난 것이죠. 당신은 필사적인 심정입니다. 전차와 충동할 경우 인부 5명이 죽는다는 걸 알기 때문이죠. 5명이 죽는 걸 기관사가 확실히 안다고 가정한 상황입니다. 당신은 안절부절 어쩔 줄을 모릅니다. 그러던 중 당신의 눈에 오른쪽으로 난 비상 철로가 들어옵니다. 그 비상 철로 끝에는 인부 1명이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핸들은 고장 나지 않았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방향을 바꿔 비상 철로로 가서 1명을 희생시키고 5명을 살릴 수 있죠.
● 토론
첫 번째 질문입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을까요?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투표를 해봅시다. 비상 철로로 핸들을 꺾을 분은 손 들어주세요. 핸들을 꺾지 않고 앞으로 계속 가실 분? 아직 손 내리지 마세요. 몇 명 되지 않는군요. 대부분이 핸들을 돌린다고 했습니다. 이제 그렇게 판단한 이유를 알아봅시다. 왜 그게 옳다고 생각하십니까? 다수에 속하는 분들의 이유부터 들어보죠. 비상 철로로 가겠다고 한 분들은 왜 그런 판단을 내렸나요? 판단의 근거가 무엇입니까? 이유를 설명해주실 분 있습니까?
“일어서서 말씀해주세요.”
“1명만 희생시킬 수 있는 상황에서 5명을 죽이는 건 옳지 않기 때문이죠.”
1명만 희생시킬 수 있는 상황에서 5명을 죽이는 건 옳지 않답니다. 훌륭한 이유네요. 다른 의견은 없습니까? 모두 같은 이유인가요? 네, 말씀하세요.
“저도 같은 이유를 떠올렸습니다. 우리는 911당시 여객기를 펜실베이니아 들판에 추락시킨 이들을 영웅이라고 생각합니다. 승객만 죽고 건물 안에 있는 더 많은 사람을 살리기로 결정했기 때문이죠.”
“911 당시에도 같은 원칙이 적용됐다는 얘기군요.”
‘비극적인 일이기는 하지만 1명을 죽이고 5명을 살리는 게 낫다’ 그게 핸들을 돌리겠다고 한 분들의 판단 근거인가요? 그렇습니까? 이제 소수의견에 속한 분들, 핸들을 돌리지 않겠다는 이유를 들어보죠.
“전 그 얘기가 학살이나 전체주의를 정당화하는 논리와 같다고 봅니다. 한 인종을 살리기 우해서 다른 인종을 쓸어버려야 한다는 것이죠.”
“그러니까 학생이 선택한 건 학살의 공포를 피하기 위해서 5명한테 전차를 몰고 가 죽이는 건가요?”
“그런 것 같습니다.”
“그래요?”
“네”
“좋습니다. 다른 의견 없나요?”
어쨌든 용감한 답변이었어요. 고맙습니다. 이제 고민해볼 얘기가 하나 더 있습니다. 다수 의견에 속했던 분들이 ‘1명을 죽이고 5명을 살리는 게 낫다’는 원칙을 이번에도 고수하는지 지켜봅시다.
이젠 당신은 전차 기관사가 아니라 구경하는 사람입니다. 당신이 서 있는 곳은 전차 선로가 내려다보이는 다리고 그 아래 선로에는 전차가 다가옵니다. 그 선로의 끝에는 인부 5명이 있고 브레이크가 고장 난 전차는 5명을 덮치기 직전입니다. 이제 당신은 기관사가 아닙니다. 안절부절 어쩔 줄을 몰라 하는데 옆에 서 있는 사람이 눈에 띕니다. 다리에 기댄 채 서 있는 아주 뚱뚱한 남자가 말이죠. 여러분은 그 남자를 밀 수 있습니다. 그런 남자는 다리 난간을 넘어가 선로 위에 떨어질 겁니다. 전차 선로 바로 위로 말이죠. 그럼 남자는 죽겠지만 인부 5명의 생명을 구할 겁니다. 다리 난간 너머로 남자를 밀어버릴 분 손 들어주세요. 밀지 않을 분, 손드세요. 대부분이 밀지 않겠다는군요. 그럼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그 원칙은 왜 버려졌을까요?
‘1명을 죽이고 5명을 살리는 게 낫다’는 원칙은 어디로 갔죠? 첫 번째 이야기에서는 대부분이 그 원칙에 찬성하지 않았나요? 두 이야기에서 모두 다수 의견에 손을 든 분의 생각을 듣고 싶습니다. 두 이야기의 차이를 어떻게 설명하겠습니까?
“두 번째 이야기는 사람을 밀어버리는 행동이 포함된 선택인 점이 다른 것 같아요. 그 행동이 아니면 이 상황과 전혀 관계가 없었을 사람을 끌어들이는 거죠. 그러니까 그 남자가 모면할 수 있었을 일에 그 남자를 끌어들이기 위해 그를 대신하여 선택하는 일은 첫 번째 이야기의 경우 월권이라고 생각합니다. 첫 번째 이야기의 기관사와 두 선로의 인부들은 이미 상황에 들어와 있으니까요.”
“하지만 비상 철로에서 혼자 일하고 있던 인부도 뚱보 남자와 마찬가지로 자기 생명을 희생하겠다는 선택을 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그 인부는 선로에 있었으니까...”
“그 남자는 다리 위에 있었어요! 할 말이 있으면 다시 발언기회를 드리죠.”
“네, 어려운 질문입니다. 대답은 잘 들었어요. 두 이야기의 다수 의견이 다른 이유를 설명해줄 학생 또 없습니까? 말씀하세요.”
“인부 1명과 5명이 등장하는 첫 번째 이야기에서는 1명과 5명 중에서 선택을 할 수밖에 없어요. 전차 때문에 누군가는 죽게 돼있죠. 그게 꼭 내 행동 때문은 아닙니다. 전차가 달리고 있는 가운데 짧은 순간 선택을 하는 거죠. 반면 뚱뚱한 남자를 미는 건 살인이에요. 그 행동은 내가 제어한 것인 반면 전차는 내 제어 범위가 아닐 수 있습니다. 둘은 약간 다른 상황이라고 생각해요.”
“좋은 의견이었어요. 이 의견에 대해서 할 말이 있는 분? 그렇게 생각하면 딜레마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까요?”
“전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두 경우 모두 내가 죽을 사람을 정하니까요. 핸들을 꺾어 한 사람을 죽이는 것도 고의적으로 한 행동이고 사람을 밀어 떨어뜨리는 것도 자발적이고, 의식적인 행동입니다. 그러니까 두 경우 모두 우리는 선택을 하는 것이죠.”
“이 의견에 대해 할 말 있나요?”
“전 두 경우가 같다는 확신이 들지 않아요. 둘은 좀 달라 보입니다. 실제로 누군가를 선로로 떨어뜨려 죽이는 건 진짜로, 직접 사람을 죽이는 거죠.”
“자기 손으로 직접 미니까요.”
“그렇습니다. 그건 핸들을 돌려서 누군가의 죽음을 야기하는 것과 달라요.”
“그런데 적당한 얘기가 아닌 것 같네요. 제가 이 위에 있잖아요.”
“학생 이름이 뭐죠?”
“앤드루입니다.”
“앤드루 학생한테 질문을 하나 하죠. 다리 위, 학생 옆에 서 있는 뚱보 남자를 밀 필요가 없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 남자는 아래로 열리는 문 위에 서 있고 학생은 손잡이를 돌려서 문을 열 수 있어요. 돌리겠습니까?”
“어쩐지 그건 더 잘못된 것 같은데요. 우연의 일치인지 제가 그 손잡이에 기대고 있었다고 가정하면 어떨까요? 아니면 그 전차가 그 함정문의 손잡이를 향해 돌진하고 있었다고 할까요?”
“그럼 돌릴 수 있을 것 같네요.”
“좋습니다. 그렇기는 해도 첫 번째 경우와는 달리 뭔가가 옳지 않다는 생각이 들 겁니다. 말씀하세요.”
“다시 말해, 첫 번째 이야기에서 우리는 그 상황에 직접 연관돼 있지만 두 번째 이야기에서는 그냥 구경꾼이죠. 그러니까 뚱뚱한 남자를 밀어서 상황에 말려들지 그러지 않을지를 선택할 수 있어요.”
“좋습니다. 이제 두 번째 경우도 잊읍시다. 어쨌든 좋은 의견이었어요.”
새로운 경우를 상상해봅시다. 이제 여러분은 응급실의 의사고 환자 6명이 응급실에 왔습니다. 끔찍한 전차사고를 당한 사람들이죠. 5명은 그리 심하게 다치지 않았고 1명은 중상입니다. 여러분은 하루 종일 중상을 입은 환자만 치료할 수도 있지만 그럼 5명은 죽습니다. 반면 같은 시간 동안 5명을 치료해 건강을 회복시킬 수도 있죠. 그럼 중상을 입은 1명이 죽습니다. 이제 의사가 된 여러분 중에서 5명의 생명을 구할 분? 1명을 구할 분은 얼마나 되죠? 숫자가 아주 적군요. 극소수에 불과하네요. 이유는 아마 같을 겁니다. 1명이냐 5명이냐의 선택이죠. 이제 의사가 된 또 다른 경우입니다.
이번에 여러분은 이식수술 전문의사이고 5명의 환자가 찾아왔는데 모두 다 살기 위해서는 장기이식이 꼭 필요합니다. 한 명은 심장, 한 명은 폐, 한 명은 신장, 한 명은 간, 한 명은 췌장이 필요하죠. 그런데 장기 기증자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환자가 죽는 걸 보게 생겼죠. 그러다 이런 생각이 떠오릅니다. 옆방에 가면 건강검진을 받으러 온 건강한 남자 하나가 있는데 그 남자는... 얘기가 마음에 드나 보죠? 그 남자는 낮잠을 자는 중입니다. 여러분은 조용히 옆방에 들어가 장기들은 빼내올 수 있어요. 그럼 그 사람은 죽지만 여러분은 5명을 구할 수 있죠. 그렇게 하겠다는 분? 없습니까? 그렇게 할 생각이 있는 분은 손을 들어주세요.
“2층에도 없습니까?”
“전 그렇게 할 겁니다.”
“그래요? 조심하세요. 난간에 너무 많이 기대지 마시고요.”
“그렇게 하지 않을 분? 좋습니다. 2층에 계신 분의 생각을 들어보죠. 이유가 뭐죠?”
“사실 저는 조금 다른 대안을 생각했습니다. 이식수술이 필요한 5명 중 1명 죽으면 그 사람의 건강한 장기들을 이용해 나머지 4명을 살리는 것이죠.”
“멋진 아이디어로군요.”
“멋진 아이디어이기는 하지만 학생은 방금 내 철학적 질문의 요점을 망가뜨리고 말았어요!”
어쨌든 그 이야기들과 우리의 토론에서 한 걸음 물러서서 논의가 전개된 방식 두어 가지에 주목해봅니다. 몇몇 도덕적 원칙들은 조금 전 토론에서 이미 드러나기 시작했는데 그 도덕적 원칙들이 어떤 것인지 함께 생각해 보죠.
토론에서 나타난 첫 번째 도덕적 원칙은 올바른 일, 즉 도덕적인 일인지의 여부가 우리 행동이 야기할 결과에 달려 있다고 말합니다. ‘어쨌든 1명이 죽는 게 5명이 죽는 것보다 낫다’는 것이죠. 이것은 결과론적 도덕 추론의 한 가지 예입니다. 결과론적 도덕 추론은 행동의 결과에 따라 도덕성을 판단합니다. 우리 행동이 변화시킬 세상의 모습으로 도덕성을 판단하죠. 하지만 우리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다른 경우들을 고민할 때 우리는 결과론적 도덕 추론에 그다지 큰 확신을 갖지 못했죠.
뚱뚱한 남자를 다리 너머로 밀어버리는 걸 망설이거나 아무 것도 모르는 환자의 장기를 빼내오는 걸 망설였을 때 우리가 보여준 추론의 방향은 결과에 상관없이 행동 그 자체의 본질적 성격을 고려했다는 걸 보여줍니다. 우리는 주저했습니다. 그게 옳지 않다고 생각했죠. 무고한 사람을 죽이는 건 원칙적으로 옳지 않다고 생각했어요. 5명을 구하기 위해서라고 해도 말이죠.
적어도 우리가 상상해 본 이야기들의 두 번째 경우에서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이것은 두 번째 범주를 보여줍니다. 도덕 추론의 두 번째 범주요. 정언적 도덕 추론은 절대적인 도덕규범들에 따라 도덕성을 판단합니다. 절대적인 의무와 권리에 따라 판단하죠. 결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앞으로 며칠 혹은 몇 주 동안 우리는 결과론적 도덕 원칙과 정언적 도덕 원칙의 차이를 알아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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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덕추론
결과론적 : 행동의 결과에 따라 도덕성을 판단. 정언적 : 의무와 권리에 따라 도덕성을 판단. |
결과론적 도덕 추론 중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것은 공리주의입니다. 18세기의 영국 정치철학자 제러미 벤담이 만들어낸 사상이죠. 정언적 도덕 추론에서 가장 중요한 철학자는 18세기 독일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입니다. 우리는 이 두 가지 도덕 추론을 살펴보고 평가하고 다른 도덕 추론도 살펴볼 것입니다. 강의 요강에는 우리가 읽을 위대하고 유명한 책들이 소개돼 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 존 로크, 임마누엘 칸트, 존 스튜어트 밀 등의 저자가 쓴 책들이죠. 강의 요강을 보면 우리가 읽는 게 고전만이 아니라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철학적 질문을 제기하는 오늘날의 정치적, 법적 논쟁도 다룰 것입니다. 우리의 토론은 평등과 불평등, 소수집단 우대정책, 언론자유와 증오발언, 동성결혼, 징병제도 등 현실의 다양한 문제를 다룹니다. 이유가 뭐냐고요? 오래되고 추상적인 책들에 활기를 불어넣는 동시에 정치를 포함한 일상생활 속의 문제들을 끌어내고, 명확하게 밝혀서 철학을 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런 책들을 읽고 이런 문제들을 토론하고 이것들이 서로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지 살펴볼 것입니다. 아주 매력적인 얘기 같겠지만 여러분한테 경고부터 해야겠습니다. 제, 경고는 이것입니다. 이런 방식으로 이 책들을 읽으면 그러니까 자기인식을 위해 이 책들을 읽으면 몇 가지 위험이 닥칠 수 있습니다. 개인적이고 정치적인 위험, 정치철학을 공부하는 학생은 누구나 알고 있는 위험입니다. 이 위험은 철학이 우리를 가르친다는 사실과 이미 알고 있는 사실에 맞서게 만들며 우리를 뒤흔든다는 사실에 기인합니다. 아이러니도 존재합니다. 이 강좌의 까다로움은 여러분이 이미 아는 것을 가르쳐준다는 점에 기인합니다. 우리에게 친숙하고 당연했던 것들을 가지고 와서 그것들을 낯설게 만들기 때문이죠. 우리가 살펴본 예들도 그런 것들입니다. 강의를 시작하며 제시했던 장난기와 진지함이 섞인 가정들 말입니다. 이 철학서들도 그런 방식을 취합니다. 철학은 친숙한 것들을 낯설게 하는데 그 방법은 새 정보를 제공하는 게 아니라 새로운 관점을 이끌어 내는 것이죠.
여기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친숙한 것들이 낯설어진 뒤에도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자기 인식은 순수함을 잃는 것과 같습니다. 자기인식으로 불안을 느낀다고 해도 생각과 지식을 되돌릴 수는 없습니다. 이 공부가 어렵고도 매력적인 이유는 도덕철학과 정치철학이 이야기이기 때문이며 그 이야기가 어떻게 될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는 건 그 이야기가 우리 이야기라는 점입니다. 그게 개인적인 위험이죠.
그럼 정치적인 위험은 어떤 것일까요? 이런 강좌를 소개하는 방법 중 하나는 이런 약속을 하는 것입니다. ‘이 책들을 읽고 이 문제들을 토론하면 더 훌륭하고 책임감 있는 시민이 된다.’, ‘공공정책이 뭘 가정하는지 검토하며 정치적 판단력을 기르게 될 것이다.’, ‘공공의 일에 더 능률적으로 참여할 수 있게 된다.’는 약속이죠. 하지만 이런 약속들은 불공정하며 오해를 불러일으킵니다. 일반적으로 말해 정치철학은 그런 효과를 낳지 않습니다. 이런 가능성도 염두에 두십시오.
정치철학 때문에 여러분이 더 나쁜 시민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이죠. 훌륭한 시민이 되기에 앞서 나쁜 시민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염두에 두십시오. 철학은 거리를 두는 학문, 무력화시키는 학문이기 때문입니다. 그건 소크라테스한테서도 확인할 수 있죠. <고르기아스>에는 소크라테스와 친구 칼리클레스의 대화가 나옵니다. 칼리클레스는 소크라테스가 철학하는 걸 중단시키려고 합니다. 칼리클레스는 소크라테스한테 말하죠. “철학은 예쁘장한 장난감이다”, “적당한 시기에 적당히 빠지는 건 괜찮지만 지나치게 철학을 추구하면 사람을 망친다”고 말입니다. 칼리클레스는 말합니다.
“내충고를 듣게. 논쟁을 그만두게”
“활동적인 사람들이 이룬 것을 배우게”
“시시한 궤변에 시간을 낭비하는 사람을 귀감으로 삼지 말고 돈을 잘 벌고, 평판이 좋고 여러 복을 타고난 사람을 귀감으로 삼게”
즉, 칼리클레스가 소크라테스한테 한 말은 “철학은 집어치워. 정신 좀 차려 경영대학원이나 가”였던 겁니다. 칼리클레스의 말에는 일리가 있습니다. 철학은 관습적인 것이나 기존의 관념, 신념에서 우리를 떼어놓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개인적이고 정치적인 위험입니다.
이런 위험에 맞닥뜨릴 때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반응은 회피죠. ‘회의주의’란 이름의 회피입니다. 회의주의는 이런 식의 생각이죠. ‘우리는 아무 것도 해결하지 못했어’, ‘강의를 시작하며 상상한 이야기나 논의한 원칙들에 대해 결론을 짓지 못했지’, ‘아리스토텔레스나 로크, 칸트, 밀도 그 오랜 기간 동안 풀지 못한 문제를 하버드 대학 극장에 모인 우리가 어떻게 한 학기 만에 풀겠어?’, ‘원칙은 각자가 알아서 할 문제고 거기에 대한 토론할 필요는 없는 것 같아’, ‘이치를 따지는 건 불가능해’라고 말하는 게 바로 회피이고 회의주의입니다. 거기에 대해 저는 이런 대답을 내놓고 싶습니다. 이 문제들이 아주 오랫동안 논의돼왔다는 점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반복적으로 제기돼 왔고 사라지지 않았다는 바로 그 점이 비록 해결은 불가능 하지만 이 문제들을 피할 수도 없다는 걸 보여주는 게 아닐까요?
그 문제들을 회피할 수 없는 이유, 그 문제들에서 도망칠 수 없는 이유는 우리의 일상이 이 문제들에 대한 답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도덕적 고민을 포기하는 회의주의는 해결책이 아닙니다. 임마누엘 칸트는 회의주의란 문제를 다음과 같이 멋지게 설명했습니다. “회의주의는 인간 이성의 쉼터다”, “그곳에서 이성은 이념적 방황에 대해 성찰할 수 있지만 그곳에 영구적으로 정착해 살 수는 없다”, “회의주의에 굴복한다면 이성의 동요를 절대 극복할 수 없다”. 이 이야기들과 토론을 통해 제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위험과 매력, 가능성이었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이런 얘기죠. 이 강좌의 목적은 이성을 일깨워 방황하게 만들고 그것이 무엇을 이끌어내는지를 보는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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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수업을 시작할 때 우리는 몇 가지 이야기를 상상해봤습니다. 그 도덕적 딜레마들에는 전차와 의사, 장기이식수술의 희생자가 될지도 모르는 건강한 환자가 등장했죠. 우리의 토론에 대해서는 두 가지를 인식하게 됐습니다. 하나는 우리가 논쟁을 하는 방식과 관계있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각각의 경우에 대한 판단을 먼저 내렸습니다. 그리고 어떤 근거나 원칙이 우리의 판단 뒤에 있는지 밝혀내려고 했죠. 그 다음에는 새로운 경우에 직면했고 그 원칙들을 재검토하고 새로운 경우에 비춰 원칙을 수정했습니다. 우리는 각각의 경우에 대한 판단과 우리가 지지하는 원칙을 일치시키고자 하는 마음속의 압박감 역시 인식했습니다.
또한 토론에서 드러난 논점들의 바탕에 대해서도 몇 가지 알게 됐죠. 우리는 종종 행동의 결과에서 도덕성을 찾으려 한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그 행동이 만들어 낼 세상의 모습에서 도덕성을 찾는 것이죠. 우리는 그것을 결과론적 도덕추론이라고 부릅니다. 어떤 경우에는 행동의 결과가 우리를 동요시키지 않는다는 것도 알게 됐죠. 우리 중 많은 사람은 때때로 결과뿐만 아니라 행동의 본질이나 특징도 도덕성 판단에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세상에는 절대적으로 그릇된 일들이 존재한다고 어떤 사람들은 말합니다. 좋은 결과를 낳는다고 해도, 1명을 희생해 5명을 구한다고 해도 그릇된 일이라는 것이죠. 그렇게 결과론적 도덕 원칙과 정언적 도덕 원칙을 대조해봤습니다.
오늘부터 며칠 동안 우리가 살펴볼 주제는 가장 영향력이 큰 결과론적 도덕 이론 중 하나입니다. 공리주의라는 철학이론이죠. 제러미 벤담은 18세기 영국의 정치철학자로 공리주의 도덕 이론을 처음으로 명확하고 체계적으로 설명했습니다. 벤담의 핵심적인 아이디어는 아주 단순하면서도 도덕적 직관에 강하게 호소하죠. 벤담의 주장은 다음과 같습니다. 옳은 행동, 다시 말해 정당한 행동은 공리를 극대화하는 것이라는 주장이죠. ‘공리’가 뜻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벤담이 말한 공리는 고통을 상쇄하고 남은 쾌락입니다. 고통을 빼고 남은 행복이죠. 벤담이 공리 극대화의 원칙에 도달한 과정은 이렇습니다. 벤담의 출발점은 모든 인간이 고통과 쾌락이라는 두 통치권자에게 지배받는 존재라는 깨달음이었습니다. 우리 인간은 쾌락을 좋아하고 고통을 싫어합니다.
그래서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결정할 때의 도덕의 기준, 입법자나 시민으로서 법이 어때야 할지 결정할 때의 기준, 즉 개인이나 집단에게 옳은 행동이 무엇인지 결정할 때의 기준은 전체의 행복을 극대화하는 행동이냐 아니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죠. 벤담의 공리주의는 종종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란 말로 요약됩니다. 공리라는 기본원칙을 손에 쥐고 그 원칙을 시험하고 검토해 봅시다. 다른 이야기에 대입해보는 것이죠. 하지만 이번 이야기는 가상이 아니라 실제로 있었던 일입니다. ‘더들리와 스티븐스 재판’이란 얘기죠.
19C 영국에서 벌어진 유명한 재판에 관한 이야기로 법학대학원에서 많이 논의된 것입니다. 사건은 이렇습니다. 사건을 요약해드린 다음에 여러분의 판결을 들어보겠습니다. 자신이 배심원이라고 생각해 주세요. 당시 발행된 한 신문은 사건의 이면을 자세히 소개했고 ‘미뇨넷 호 생존자의 이야기보다 더 슬픈 해난사고는 없었다고 했습니다. 그 배는 희망봉에서 약 2000km 떨어진 남대서양에서 발견됐습니다. 배에 탄 건 4명이었는데 더들리는 선장이었고 스티븐스는 1등 항해서, 브룩스는 선원이었죠. 모두 성품이 훌륭한 사람이었습니다. 적어도 신문은 그렇게 말하고 있죠.
4번째 승무원은 배의 잡무를 보던 17세 소년 리처드 파커였습니다. 파커는 고아라서 가족이 없었고 배를 타고 장기간 바다에 나온 건 처음이었습니다. 신문의 설명에 따르면 파커는 친구들의 충고를 잘 따르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는 치기어린 의욕 때문에 배를 탔죠. 항해를 하면 어른이 될 줄 안 것입니다. 슬프게도 결과는 달랐습니다. 사건의 정황에는 이견이 없습니다. 파도가 배를 강타했고 미뇨넷 호는 침몰했죠. 승무원 4명은 구명보트로 탈출했습니다. 식량은 순무 통조림 두 개뿐이었습니다. 마실 물도 없었어요. 처음 사흘간은 아무 것도 먹지 않았습니다. 넷째 날에는 순무 통조림 하나를 따서 먹었죠. 이튿날엔 거북 한 마리를 잡았습니다. 남은 순무 통조림 하나와 거북을 먹으며 승무원들은 다음 며칠을 버텼습니다. 그 다음 8일간은 아무 것도 먹지 못했죠. 음식도 물도 없었습니다.
자신이 그 상황에 처했다고 상상해보세요. 어떻게 할 것 같습니까? 선원들은 이렇게 했습니다. 파커는 구명보트 한쪽 구석에 누워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충고를 듣지 않고 바닷물을 마셨기 때문이죠. 파커는 병이 났고 죽어가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19일째, 선장인 더들리는 제비뽑기를 하자고 제안했습니다. 제비뽑기를 해서 다른 사람들을 위해 죽어줄 사람을 정하자는 것이었죠. 브룩스는 반대했습니다. 제비뽑기가 내키지 않았던 것이죠. 뽑힐 게 두려워서인지, 정언적 도덕 원칙을 신봉했기 때문인지는 모릅니다. 어쨌든 제비뽑기는 무산됩니다.
이튿날에도 구조해 줄 배가 보이지 않자 더들리는 브룩스에게 고개를 돌리라고 말한 뒤, 스티븐스에게 파커를 죽여야겠다고 몸짓으로 말했죠. 더들리는 기도를 올리고 소년에게 때가 됐다고 말한 다음 주머니칼로 소년의 경정맥을 찔러 죽였습니다. 양심 때문에 그 섬뜩한 하사품을 받지 않으려던 브룩스도 태도를 바꾸었고 나흘간 세 남자는 파커의 피와 살을 먹었습니다. 실화입니다. 그리고 선원들은 구조됐죠.
더들리는 자신의 일기에 구조상황을 놀랍도록 부드럽게 묘사했습니다. ‘24일째, 우리가 아침을 먹고 있을 때 드디어 배 한 척이 나타났다’. 생존자 3명은 독일 선박에 구조됐고 영국 팰머스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체포돼 재판을 받았죠. 브룩스는 검찰 측의 증인이 됐고 피고는 더들리와 스티븐스였습니다. 사건 정황에 대한 논쟁은 없었습니다. 두 사람은 불가피한 행동이었다고 주장하며 변호를 했습니다. 결과적으로 1명이 죽어서 3명이 생존한 게 낫다고 주장했죠. 검사는 그 주장에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살인은 살인이라며 둘을 재판에 넘긴 것이죠. 여러분이 배심원이라고 상상해보세요.
복잡한 논쟁을 피하기 위해서 법적인 문제는 고려하지 맙시다. 배심원이 된 여러분은 피고들의 행동이 도덕적으로 용납될 수 있는지 없는지를 판단해야 합니다. 도덕적으로 용납될 수 있는 행동이니 유죄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분? 도덕적으로 잘못된 행동이니 유죄라는 분, 손을 들어주세요. 상당수가 유죄라고 생각하는군요. 이제 그 이유를 들어봅시다.
● 토론
소수에 속하는 사람들부터 들어볼까요? 더들리와 스티븐스를 변호해줄 의견부터 들어보겠습니다. 왜 도덕적으로 죄가 없다고 생각하죠? 이유가 무엇입니까? 네, 말씀하세요.
“도덕적으로 비난받을 만한 일이지만 도덕적으로 비난받을 일과 법적인 책임을 져야 할 일은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서 판사가 말한 것처럼 도덕적이지 않은 행동이 늘 위법은 아니라는 것이죠. 불가피할 경우엔 도둑질이나 살인 같은 범법행위가 용납된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불가피함이 어느 수준에 달하면 죄를 물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좋습니다. 피고 측의 변호를 더 들어보죠. 피고들의 행동을 도덕적으로 변호하는 주장입니다. 말씀하세요.”
“고맙습니다. 그렇게 절박한 상황에서는 살아남기 위해서 뭐든지 해야 합니다.”
“살아남으려면 뭐든 해야 한다...”
“네, 어쩔 수 없으면 해야죠. 19일 동안 아무 것도 먹지 못 하면 누군가는 희생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나머지가 살죠. 게다가 생존자들이 생산적인 일을 하게 된다고 가정해봅시다. 고향으로 돌아간 뒤에 자선단체들을 수도 없이 만들어 좋은 일을 했다면 모두에게 이득이라는 얘기죠. 생존자들이 어떻게 됐는지는 모릅니다. 그냥 죽었을 지도 모르고 사람을 더 죽였을 지도 모르죠.”
“뭐라고요?”
“암살자가 됐을 수도 있어요.”
“고향으로 돌아와서 암살자가 됐으면 어떻게 하냐고 묻는군요.”
“암살자가 됐으면 어떻게 하나고요? 글쎄요.”
“누구를 암살했을 알고 싶죠?”
“네, 그거 재미있네요.”
“누구를 암살했을지 알고 싶어요.”
“좋습니다. 학생은 이름이 뭐죠?”
“마커스입니다.”
피고들을 변호하는 얘기는 들었고 이제 검찰 측의 얘기를 들어봐야겠네요. 대부분은 피고들의 행동이 잘못됐다고 생각합니다. 이유가 뭐죠? 말씀하세요.
“처음에 든 생각은 이랬어요. ‘그렇게 오랫동안 굶었다면 정신적인 문제가 생겼을지도 몰라’ 만약 그렇다면 변론의 근거로 쓰일 수 있었을 거예요. 이렇게 말하는 거죠. ‘피고들은 올바른 정신상태가 아니었다. 그래서 정상적인 판단을 내리지 못했다’ 정신이 이상하지 않으면 그런 짓을 했을 리가 없다는 변론이 그럴듯하다면 그렇게 생각한 사람들은 피고들의 행동이 부도덕했다고 생각한다는 뜻이죠.”
“저는 학생의 생각을 듣고 싶어요. 피고들의 잘못했다고 판단한 거 맞죠?”
“네, 도덕적으로 바람직한 행동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왜죠? 피고들의 행동을 변호한 마커스한테 뭐라고 말하겠습니까? 마커스가 한 말은 들었죠. 그런 상황에서는 불가피한 행동을 할 수밖에 없다는 얘기였습니다. 마커스한테 뭐라고 말하겠습니까?”
“어떤 상황에서도 인간이 다른 인간의 운명이나 생명을 빼앗는 건 용납될 수 없습니다. 우리한테는 그럴 권한이 없어요.”
“좋아요. 의견 고맙습니다. 학생 이름은 뭐죠?”
“브릿이에요.”
“좋습니다. 다른 의견 없습니까? 일어서서 의견을 말해주세요.”
“전 더들리와 스티븐스가 파커한테 죽음에 대한 동의를 구했는지 궁금합니다. 미리 동의를 구했다면 피고들은 살인을 저질렀다는 죄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도덕적으로 정당화될 수도 있을까요?”
“동의라, 아주 흥미로운 얘기군요.”
“잠깐만요. 학생은 이름이 뭐죠?”
“캐슬린입니다.”
“캐슬린의 시나리오를 상상해봅니다. 더들리는 저기 있습니다. 주머니칼을 쥔 더들리는 기도 대신에, 혹은 기도를 올리기 전에 이렇게 말합니다. ‘파커, 괜찮지?’ ‘우리가 엄청 배가 고파서 말이야’ 마커스가 강조한 것처럼 말하는 거죠. ‘우리가 엄청 배가 고파서 말이야. 자네는 어차피 오래 버티지 못하잖아.’”
“자네는 순교자가 될 수 있어.”
“순교자가 돼주겠나? 어때, 파커?”
“학생의 생각은 어떤가요? 그랬다면 도덕적으로 정당한 것일까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파커가 몽롱한 정신으로 동의했다면요?”
“그래도 정당하지 않다고 봐요.”
“동의를 받아도 정당하지 않다고요?”
“네.”
“동의를 받았다고 해도 도덕적으로 정당한 건 아니라고 봤군요. 동의에 대한 캐슬린의 생각에 반대하는 의견을 가진 분 없습니까? 동의를 받으면 도덕적으로 정당하다고 생각하는 분은 손을 들어주세요. 아주 흥미로운데요. 어째서 동의 때문에 도덕적인 차이가 생길까요? 이유가 뭐죠? 말씀하세요.”
“제 생각에는 그 아이디어가 파커한테서 나온 것이라면, 즉, 파커가 처음 제안한 것일 경우에만 정당성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파커가 압력에 굴복했다고 말할 수 없을 테니까요. 3대 1의 상황이었잖아요? 자기 생명을 희생하겠다는 결정을 스스로 내리고 누군가를 지목해서 자기를 희생시켰다면 그걸 훌륭하게 생각하는 사람도, 반대하는 사람도 있겠죠.”
“그러니까 아이디어를 파커가 낸 경우에는 도덕적으로 확실한 동의라고 볼 수 있고 살인도 괜찮지만 그게 아니라면 상황에 의해서 동의를 강요받은 게 될 수 있다는 얘기군요. 파커가 동의를 했다고 해도 살인은 정당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분 있습니까? 그렇게 생각하시는 분? 일어서서 이유를 말해주세요.”
“파커가 살해된 건 다른 선원들이 구조될 수 있다는 희망 때문일 겁니다. 그러니까 파커가 죽어야 했던 명확한 이유는 없었던 거죠. 나머지 선원들이 언제 구조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으니까요. 파커의 죽음이 헛된 일이 될 수도 있었어요. 구조될 때까지 선원들을 하나씩 죽일까요?”
“누군가는 결국 죽어야 할 테니까요.”
“상황을 보면 그랬을 겁니다.”
“제일 약한 사람을 하나씩 차례대로 뽑았겠죠. 구조될 때까지 말입니다. 이 사건에서는 다행히 3명이 남았을 때 구조가 됐고요. 학생은 파커가 동의를 했다면 살인이 정당하다고 생각합니까?”
“아뇨, 그래도 옳지 않아요.”
“그 이유를 말해주세요.”
“인육을 먹는 건 도덕적으로 옳지 않아요. 어쨌든 사람을 먹어서는 안 되죠.”
“그러니까 인육을 먹은 게 도덕적으로 문제가 됐군요. 그럼 이건 어떻습니까? 누군가가 죽을 때까지 기다려서 먹었다면 그래도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을까요?”
“제 생각에는 그래요. 개인적 도덕관에 달린 일이겠죠. 그러니까 제 의견이 그렇다는 거예요. 물론 다른 사람들 생각은 다르겠지만...”
“그럼 다른 사람들의 반대의견을 듣고 그게 학생을 설득할 수 있는지 봅시다. 괜찮겠죠? 누가 이유를 설명해주십시오. 동의 때문에 판단을 바꾼 분이 동의가 도덕적으로 왜 중요한지 말해주시죠. 제비뽑기는 어떻습니까? 그것도 동의로 볼 수 있을까요? 더들리가 처음에 제안한 게 제비뽑기였다는 걸 잊지 마세요. 모두가 제비뽑기에 동의했다고 가정해보죠. 그랬다면 도덕적으로 괜찮다고 생각하는 분? 제비뽑기를 했고 파커가 뽑혀서 그 일들이 일어났다고 가정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도덕적으로 용납할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 분? 제비뽑기를 했더니 숫자가 늘어나는군요. 손을 든 분 중 한명의 얘기를 들어보죠. 제비뽑기가 도덕적인 차이를 낳았다고 생각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제 생각에 그 살인이 범죄가 되는 핵심적인 이유는 피고들이 파커의 생명보다 자기 생명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그게 모든 범죄의 근본이유가 아닐까요? 이런 생각 말입니다. ‘네 욕구나 욕망이 네 것보다 중요해. 내 욕구나 욕망이 우선이야’. 제비뽑기해서 누군가를 죽이는 데 모두가 동의했다면 그건 모두가 나머지를 위해서 스스로를 희생하는 데 동의했다는 뜻이죠.”
“그럼 괜찮다는 거죠?”
“좀 끔찍하기는 하지만...”
“도덕적으로 허용할 수 있다?”
“네”
“학생은 이름이 뭐죠?”
“매트입니다.”
“학생이 문제 삼는 건 인육을 먹는 게 아니라 적절한 절차가 없었다는 점이군요.”
“그렇게 말할 수도 있죠.”
“그렇죠?”
“제비뽑기와 관련해서 매트와 비슷한 의견을 가진 분 없습니까? 제비뽑기를 하면 도덕적으로 용납이 된다고 봅니까? 말씀하세요.”
“제 생각에 모든 문제의 출발점은 파커의 의견을 들은 적이 없다는 점입니다. 파커한데 일어날 일인데도 말이죠. 처음 제비뽑기 얘기가 나왔을 때도 그의 의견이 어땠는지는 모르지만 그냥 결정이 돼버렸죠.”
“그가 죽어야 한다고 말입니다.”
“실제 상황에서는 그랬죠.”
“하지만 모두가 동의한 절차에 따라 제비뽑기했다면 괜찮다는 얘기죠?”
“그렇습니다. 누군가가 죽는 다는 걸 모두가 아는 상황이니까요. 하지만 실제 상황에서 파커는 그런 논의가 진행 중인 것도 몰랐죠. 파커가 죽는 게 자신일지도 모른다는 경고를 받지 않았어요.”
“이제 모두가 제비뽑기에 동의했고 파커가 뽑혔는데 그의 마음이 바뀌었다고 가정해봅시다.”
“결정은 이미 내렸고 그건 구두계약과 같죠. 이미 결정했으니 돌이킬 수는 없어요. 다른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죽을 수 있다는 걸 알았으면 죽어야죠. 다른 사람이 뽑혔다면 그 사람을 희생시켰을 거잖아요.”
“하지만 그가 이렇게 말할 수도 있죠. ‘나도 알아. 하지만 내가 뽑혔잖아’”
“제 생각에 가장 중요한 도덕적 문제는 그의 동의가 없었다는 점입니다. 자기한테 일어날 일을 몰랐다는 게 이 사건에서 제일 끔찍한 점이죠. 자기한테 일어날 일을 알았다면 정상참작의 여지가 좀 더 있겠죠.”
“잘 알겠습니다. 그러니까 여기 모인 사람 중 일부는 그게 도덕적으로 용인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 비율은 10% 정도 밖에 안 됩니다. 마커스가 주도하는 의견이죠.”
진짜 문제는 동의가 없었다는 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제비뽑기, 즉 적절한 절차에 대한 동의가 없었다는 점이나 캐슬린의 생각처럼 죽음의 순간에 동의를 받지 않은 게 문제라는 얘기죠. 동의를 얻은 경우엔 그 희생이 도덕적으로 정당하다고 보는 사람이 더 많았습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묻고 싶습니다. 동의를 받은 경우에도 즉, 파커가 제비뽑기에 동의했다거나 죽어도 좋다는 동의를 마지막 순간에 보여줬다고 해도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분? 어째서 옳지가 않죠? 이유를 듣고 싶습니다. 말씀하세요.
“저는 처음부터 정언적 도덕 추론에 마음이 기울었습니다. 제가 괜찮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경우는 제비뽑기해서 뽑힌 사람이 스스로 목숨을 끊을 경우뿐입니다. 그럼 살인이 아니겠지만 제 생각엔 그 경우도 강압적인 것 같습니다. 게다가 반성하는 빛도 없어 보입니다. 더들리는 일기에 ‘아침을 먹고 있었다’고 썼는데 그걸 보면 더들리는 다른 사람의 생명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다는 느낌이 들어요. 그래서 저는 정언적 도덕 추론의 입장에 서고 싶습니다.”
“후회나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사람이니 책이라도 집어던지고 싶나요?”
“네”
“알겠습니다.”
“덧붙일 얘기가 있는 분?”
“‘동의가 있든 없든 원칙적으로 옳지 않다’ 그렇게 생각하시는 분? 일어서서 말씀하세요.’”
“우리 사회를 봐도 살인은 살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살인은 어떻게 봐도 살인이고 사회는 살인을 나쁘게 봅니다. 그건 어떤 경우에도 달라질 수 없다고 봐요.”
“그럼 질문을 하나 드리죠. 이야기에서는 3명과 1명이 걸려 있었죠.”
“네”
“그런데 파커는 부양할 가족이 없었어요. 나머지 3명은 영국에 가족이 있었죠. 부양할 가족이 있었습니다. 아내와 아이들이 있었죠. 다시 벤담을 생각해봅시다. 벤담은 복지와 공리, 모두의 행복을 생각하라고 했죠. 그 모든 걸 더해야 한다고요. 그렇다면 사건에 관계된 사람의 숫자는 3대 1이 아닙니다. 집에 있는 가족들도 포함되는 것이죠. 당시 런던에서 발행된 신문과 여론은 피고인 더들리와 스티븐스를 동정했어요. 그 신문은, 피고인들이 집에 있는 부양가족을 사랑하고 걱정하지 않았다면 분명 그런 짓을 하지 않았을 거라고 말했습니다.”
“그럼 일자리를 잃고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애쓰는 사람과 그 경우가 어떻게 다를까요? 저는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제가 신분상승을 위해서 사람을 죽인다면 그건 살인이죠. 저는 하나의 잣대를 적용해야 한다고 봅니다. 몇몇 행위만 뽑아내서 범죄로 만들고 몇몇 행위를 더 폭력적이거나 야만스럽다고 말하는 건 옳지 않아요. 같은 범죄라면 모든 게 같아야죠. 살인의 동기가 가족 부양이라도 말입니다.”
“3명이 아니라 30이나 300명이면 어떨까요? 300명을 구하려고 1명을 희생시킨다면요? 전시라면 3000명이 될 수도 있죠. 숫자가 더 많다고 가정해봅시다.”
“숫자가 더 많아진다고 해도 저는 달라질 게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럼 집단의 행복을 증진시키는 일이 옳다는 벤담의 주장이 틀렸다고 봅니까? 벤담의 그 생각은 틀렸을까요?”
“틀렸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살인은 살인이죠.”
“그럼 벤담이 틀린 거네요. 학생이 옳으면 벤담은 틀린 거죠”
“그렇다면 벤담이 틀렸네요.”
감사합니다. 얘기 잘 들었어요. 이제 토론에서 한 걸음 물러서서 피고인들의 행위에 대해 우리가 들은 비판들을 생각해봅시다. 피고를 옹호하는 의견도 있었습니다. 불가피성과 절박한 상황을 지적한 옹호였고 숫자가 중요하다는 뜻을 함축한 옹호였습니다. 관계자의 숫자뿐만 아니라 사건의 여파도 중요합니다. 집에서 기다리는 부양가족 말입니다. 파커는 고아이고 그리워할 사람이 없죠. 다시 말해서 그 모든 행복과 불행을 더해서 계산을 한다면 피고들의 행동이 옳았다고 말하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다음에 우리는 적어도 세 종류의 반대의견을 들었습니다.
먼저 피고들의 행동은 원칙적으로 잘못됐다는 의견이 있었죠. 여기 있는 마이크는 ‘살인은 살인이다. 살인은 늘 나쁘다’는 말을 했습니다. 사회의 전반적인 행복을 증진시킨다고 해도 나쁘다는 얘기였죠. 원칙론적인 반대였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생각해볼 점은 ‘살인이 왜 원칙적으로 나쁜가?’입니다. 파커도 기본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까요? 그렇다면 기본권은 어디에서 나올까요? 기본권을 만든 것은 더 큰 복지와 공리, 행복이란 생각이 아닐까요? 그게 첫 번째 질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제비뽑기가 도덕적 차이를 낳았을 거라고 말합니다. 매트는 ‘적절한 절차’라고 표현했죠. 그것 때문에 의견을 바꾼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건 윈칙론적인 반대가 아니죠. ‘전체의 행복을 위해 1명이 희생되더라도 모든 사람은 공평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니까요.
그 점은 또 하나의 문제를 던집니다. 일정한 절차나 정당한 절차에 대한 동의는 어째서 그 절차가 야기한 모든 결과를 정당하게 만드는 것일까요? 그게 두 번째 문제입니다. 세 번째 문제는 이것이죠. 동의라는 개념 말입니다. 캐슬린이 제기한 것이죠. 파커가 동의를 했다면, 그리고 그것이 강압적이지 않았다면 나머지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서 소년을 죽이는 게 정당할까요? 이 생각에 동의하는 사람은 더 많았는데 그게 세 번째 철학적 질문을 던집니다. 동의는 어떤 도덕적 기능을 갖고 있을까요? 동의라는 행위는 어째서 도덕적으로 중요할까요? 동의가 없다면 옳지 않은 행위인 살인도 동의를 얻었다면 도덕적으로 용인될까요?
이 세 질문의 답을 찾기 위해 우리는 몇몇 철학자들의 책을 읽을 것입니다. 다음 시간부터는 공리주의 철학자인 제러미 벤담과 존 스튜어트 밀을 읽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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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기된 질문들
1. 우리는 특정한 기본권을 갖고 있는가? 2. 정당한 절차는 모든 결과를 정당화하는가? 3. 동의는 어떤 도덕적 기능을 가지고 있는가? |
* 저작권은 PBS / Harvard University에 있고, 번역은 EBS 방송에서 했음을 알려드립니다. 상업적인 용도는 사용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