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형철의 문학 사용법]
나란히 선 두 사람의 손등이 계속 스치듯 조짐을 형성하는 이윤기식 말 건넴을 더는 들을 수 없네

 

어떤 지면에서, 소설가의 급수가 나뉘는 곳 중 하나가 대화 장면이라는 말을 해놓고는 충분히 부연하지 못했다. 그 뒤 마이클 티어노의 <스토리텔링의 비밀>(아우라·2008)에서 이런 구절을 읽었다. “변증법적으로 움직이는 대사(대화)란 곧 행동이다.”(186쪽) 변증법적 대화란 무엇일까. 대화가 명제, 반명제, 종합명제의 단계를 밟아가면서 진행되는 경우다. 저자가 제시한 기본 모형은 이렇다. “야, 너 우리 할머니처럼 운전하면 거기 못 가.”(명제) “너희 할머닌 돌아가셨잖아.”(반명제) “그러니까!”(종합명제) 대화는 단순한 탁구가 아니라는 얘기다. 굳이 말하자면, 공을 받아넘길 때마다 선수가 공중으로 10cm씩 떠오르는 탁구쯤 되려나.

 

최근 어느 인터뷰에서 무라카미 하루키는 더 힘있고 명쾌하게 대화에 관한 그의 작업 비밀 중 하나를 공개했다. “가장 하고 싶은 말은 하면 안 됩니다. 거기서 멈춰버리니까요. 대화라는 것은 스테이트먼트가 아닙니다. 훌륭한 퍼커셔니스트는 가장 중요한 소리를 내지 않아요. 그것과 마찬가지입니다.”(<문학동네> 2010년 가을호) 예컨대 “내가 하는 말 들었어?”라고 물었을 때의 좋은 대답은 “들었어”가 아니라 차라리 “난 귀머거리 아니야”다. “들었어”라는 대답은 핵심적인 사실을 직접적으로 말해버리는 것이고 그 순간 대화는 멈추는 것이다. 하루키는 덧붙인다. “쓸데없이 멈춰서는 안 돼요. 그게 기본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대화는 어떤가. 확인해보니 2003년 1월26일에 나는 다음 대화를 어딘가에 옮겨 적었다. “미안해요./ 그럴 거 없어요… 이 고요가 그 보람이에요./ 마음고생 많이 했을 테지요?/ 조금… 그러나 그 보람은 거기에서만 자라지요./ 그래도 그 오랜 세월…/ 이제 이렇게 우산을 받고 있으니까, 됐지./ 비가 올 거 믿었나요?/ 부르고 대답하는 것처럼.”(이윤기, <만남> 중에서) 어떤 책에 인용돼 있는 이 대화를 보고 나는 ‘소설가’ 이윤기에게 단번에 반해버렸다. 이 대화의 매력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적어도 그라면 앞의 두 저자와는 다른 ‘대화의 기술’을 알려줄 수 있을 것 같지 않은가.

 

 

이쯤 되면 ‘윤대녕풍 대화’가 떠오른다. <호랑이는 왜 바다로 갔나>(문학동네·2010)의 한 장면. 남자는 지금 여인의 가슴 쪽으로 손을 옮겨가는 중이다. “거기서부터는 국경이에요./ 지금 국경을 넘지 못하면 뒤쫓아온 수비대에 끌려 날이 채 밝기도 전에 박달나무 기둥에 묶여 총살을 당하게 될 겁니다./ 조국을 등지고 목하 어디로 망명 중인데요?/ 왜, 아실 텐데요. 오늘 밤은 당신이 내 조국이잖습니까.”(66쪽) 이런 대화를 나누면서 그들은 킥킥거린다. 결국 ‘좋지 않다고 말할 수는 없소’와 ‘싫지 않다고 말하지는 않을래요’로 요약되는 성인남녀의 ‘수작’들이 어쩐지 귀엽고 애틋하고 쓸쓸하다면 그것은 윤대녕의 소설이다.

 

어린 독자들에게는 어쩌면 ‘느끼하다’고 느껴질 수도 있을 이런 대화를 나는 좋아한다. 어른들의 대화이기 때문이다. 진심이라 믿은 욕망도 세월 속에서 허망하게 스러지기 일쑤라는 것을 아는 나이가 되면 자기 자신에게 쉽게 속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 이들은 아주 결정적인 순간에도 말에 무게를 싣지 않고 가볍게 띄운다. 그런 말의 가벼움은, 그저 객기에 휩쓸려 마구 늘어놓는 말의 가벼움과는 다르다. 요컨대 대화란 탁구 치듯 주거니 받거니 쓰는 것이 아니라, 함께 걷는 두 사람의 겉옷이나 손등이 계속 스치는 것처럼 쓰는 것이다. 좋은 대화는 ‘정보’의 교환이 아니라 ‘조짐’의 형성이다.

 

부기. 그러나 이윤기(1947년 5월3일~2010년 8월27일) 선생은 이제 더 이상 우리에게 멋진 대화를 들려줄 수 없게 되었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

 

신형철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