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토뉴스코리아 4월 출사 두번째 촬영지는 담양 대덕면 장산리의 모현관이다.

전남 담양하면 떠 오르는 것은 소쇄원, 식영정 등 가사 문화권의 정자들과 문인들. 쭉쭉빵빵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대나무 숲 죽녹원,

그리고 둑방길을 따라 쭉 늘어선 느티나무 숲 관방제림, 말과 설명이 필요없는 메타세퀘이아 가로수 길, 천년 역사의 담양 금성산성,

이렇게 바로 떠오르는 것만 해도 손가락으로 세기에도 넘쳐난다.

 

                                                                                                        

  추천에 감사 드립니다.

 

그렇지만 오늘 두번째 촬영지인 모현관은 나도 처음 들어본 곳이고 또 미암 유희춘이란 분이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고 있던 차에

출사지로 결정되어 궁금한 것을 보면 파헤쳐보고 싶은 블로거의 전투 의욕을 불태운다.

담양 대덕면 장산리 아름다운 연못위의 모현관(慕賢館)에는 보물 제260호인 ‘미암(眉巖)일기’가 보관되어 있다.

 

 

 

 

미암일기는 조선 중기의 문신인 미암 유희춘(柳希春· 1513∼1577)이 선조 즉위년인 1567년 10월부터 1577년(선조10년)까지

11년 동안 조정의 공적인 사무뿐만 아니라 개인적인 일과 주변의 일, 그리고 상부에 내는 보고서 등을 빠짐없이 상세하게 기록하여

조선시대 개인의 일기 중 가장 방대한 것으로, 본래 14책이었으나 현재 남아았는 것은 11책과 부록으로 그의 부인 송씨의 시문과

잡록이 실려있다고 한다.

이 책은 판본을 포함하여 일괄 보물로 지정되었는데 이 중 3매를 전남대학교 박물관에서 임시 보관했다가 현재는 미암의 후손들이

담양 대덕면 장산리에 있는 보존각 모현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이 일지는 임진왜란 때 선조 25년 이전의 기록이 다 타고 없어져,『선조실록』을 편찬할 때 이이의 『경연일기』와 더불어『선조실록』의 기본사료가 되었으며,
조선시대의 각 관서의 기능과 관리들의 내면생활, 사회, 경제, 문화, 풍속 등을 여실히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어 보물로 지정되었다.

 

미암은 1547년(명종2년) 벽서(壁書)의 옥(獄)에 연루되어 제주도에 유배되었다가 다시 함경도 종성, 충청도 은진 등으로 유배되어

무려19년동안 유배생활을 했으며, 1567년 선조가 즉위하자 삼성스승의 상소로 사면되어 직강 · 응교 · 교리 등을 역임하면서

지제교(知製敎)를 겸임하였다.

이어 장령 · 집의 · 사인 · 전한 · 대사성 · 부제학 · 전라도관찰사 등을 지내다가, 1575년(선조8) 예조 · 공조의 참판을 거쳐 이조참판을

지내다가 사직하여 고향인 해남 대신 처가인 담양으로 낙향하였다

경사와 성리학에 조예가 깊어 《미암일기》외 많은 저서를 남겼으며 16세기 호남사림을 대표하는 인물로 손꼽힌다. 

(미암일기 사진출처:문화재청)

 

壁書의 獄이란 1547년(명종2년) 경기도 양재역 벽에 '위로는 여주(문정왕후)가, 아래로는 간신(奸臣) 이기가 있어

나라가 망하려하는데 이를 보고만 있을 것인가' 라는 내용의 벽보 사건으로,

문정왕후가 수렴 청정하는 명종 2년에 당시 권력의 중심에 있던 소윤을 비난하는 익명의 벽서가 붙자,

윤원형은 중종의 서자이자 윤임의 조카인 봉성군을 죽이고, 과거에 자신을 탄핵한 적이 있는 유희춘을 귀양 보낸다.

이 사건이 바로 일명 벽서의 옥(獄)이라 불리는 정미사화다.

 

정미사화(丁未士禍) 1547년(명종2년)에 일어난 사화로 조선 전기 중앙관직에 진출했던 정치세력은 훈구파와 사림파로 나뉘는데,

이들 지배계급 내부의 갈등으로 정치권력을 잡기위한 싸움이 전개되는데, 중종이 사망한 후 중종의 제2계비인 문정왕후가 낳은

경원대군을 세자로 세우고자 하는 윤원로·윤원형 계열과, 세자의 외숙인 윤임과의 사이가 대립하기 시작했다(→ 색인 : 대윤, 소윤).

 

이것은 세자였던 인종이 즉위한 지 8개월 만에 죽고 12세의 명종이 즉위한 뒤 현상화되어 을사사화가 일어나고

그 여파로 정미사화가 일어났다. 을사사화를 통하여 정적을 제거하고 정권을 잡은 이기(李芑) 등은 명종의 보위를 굳혔다는 명분으로

공신책록을 서둘렀다. 일단 28명이 위사공신(衛社功臣)에 봉해졌다. 따라서 명종 초년의 강력한 정치세력은 이들 공신집단이었다.

 

그러나 이들의 결집력은 공신책록의 명분이 뚜렷하지 못하여 그다지 강하지 못했다.

윤임 등의 죄를 결정한 중신들의 모임에 참여했다는 것만으로 당시의 장관급 거의 모두가 공신에 책록되었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에는 이언적·신광한(申光漢)·민제인(閔齊仁) 등 사림파 계열에 속하는 인물들도 포함되었다.

이들은 훈구파와 본질적으로 달라서 결국 공신에서 탈락했다. 현실적으로 위사공신 집단은 문정왕후와 윤원형에 의존했다.

1546년에는 윤원로와 윤원형이 권력을 다투어 윤원로가 유배되었다가 사형당하는 사건이 일어나는 등 집권세력 내부에서도

갈등이 전개되었다.

 

따라서 위기의식을 느낀 집권파 공신집단은 그들에게 위협적인 존재로 판단되는 사림파 계열의 인사들을 제거하려고 했다.

정미사화의 직접적인 계기는 1547년에 일어난 양재역벽서사건이었다.

정언각(鄭彦慤)이 전라도 양재역에서 "여왕이 집정하고 간신 이기 등이 권력을 농단하여 나라가 망하려 하니,

이를 서서 기다릴 것인가"라는 뜻의 벽서를 발견한 것이었다.

 

이에 이기 등은 이것이 을사옥(乙巳獄)의 뿌리가 남은 것이라 하여 대윤의 잔당으로 지목된 송인수(宋隣壽)와 이약수(李若水) 등을

죽이고 권벌·이언적·정자(鄭滋)·노수신(盧守愼)·유희춘(柳希春)·백인걸(白仁傑) 등 20여 명을 유배보냈다.

그뒤에도 1548년 을사사화 전후의 시정기에 윤임을 칭찬하는 글을 썼다가 당한 안명세(安名世) 필화사건,

1549년의 이홍윤(李洪胤) 옥사 등으로 이어졌고 5~6년 사이에 죽거나 유배된 자가 거의 100명에 달했다.(자료출처 : 다음백과사전)

 

 

미암은 말년에 연계정(漣溪亭)에서 성리학을 배우고자 하는 제자들을 가르켰으며,

형인 유성춘도 시인이고 부인인 송덕봉도 여류문인으로 이름이 높았고 아들 유경렴은 하서 김인후의 사위이다.

그러고 보니 담양은 조선 중기 가사문학의 산실이자 보고이다.

 

석헌 류옥(1487~1519), 면앙정 송순(1493~1583), 석천 임억령(1496~1568), 소쇄공 양산보(1503~1557),하서 김인후(1510~1560)

미암 유희춘(1513~1577), 서하당 김성원(1525~1597), 제봉 고경명(1533~1592), 송강 정철(1536~1593),명곡 오희도(1581~1623) 등

당대의 내노라 하는 문인들의 교류의 장이 바로 담양이다.

 

 

 

미암은 왜 고향인 해남으로 내려가지 않고 담양에 머물게 되었을까.

당시에는 남자가 결혼하면 처가살이를 했으며, 자녀의 균분상속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는 사실 등으로 봐서,

해남 출신인 미암도 당시 풍습에 따라 담양에서 처가살이를 한 것으로 추정되며 이곳에서 뿌리를 내린 후손들이 지금까지

종가를 중심으로 미암을 모시며 살고 있다고 한다.

 

작년에 영암 영보정을 탐방하면서 연촌 최덕지(1384~1455)도 고향인 전주로 가지 않고 처가인 영암 덕진 영보리로 낙향하여

사위 신후경과 함께 영보정을 세워 학문연구와 후진양성으로 말년을 보낸 것도 이와 비슷하다 하겠다. 

 

미암사당으로 들어가는 들어가는 입구는 참 단아하게 생겼다.

사당앞의 집들은 미당의 후손들이 종가를 이루어 사는 종갓집으로 고택의 때는 묻지 않았지만

사당을 유지 관리하며 사는 후손들의 편의를 위해 새로이 지어진 듯 하다.

 

 

사당의 마당에는 홍매화가 진한 향기를 뿜으며 그 화려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시도 민속문화재 제 36호인 미당사당은 전체적으로 관리가 잘 되어 있으나 겨우내 드센 바람에 문풍지가 뜯겨 나간 곳이 여러군데여서 따뜻한 봄을 맞이하여 문풍지를 다시 발라주어야 할 듯하고, 갈라진 틈 사이로 빼꼼히 들여다 본 사당 내부는 아주 깨끗했다.

 

 

 

2003년에 출간된 ‘홀로 벼슬하며 그대를 생각하노라’(정창권 저)는 미암일기를 토대로 당시 양반 가정의 생활상을 복원한 책이다.

우리 주변에서 흔히 일어나는 자질구레한 이야기들을 중심으로 저자가 작가의 상상을 가미한 후 평이한 문체로 재구성하였다 하고,

담양향토문화연구회에서도 한글로 번역하여 출간한 책도 있다고 하니 후참에 구입해서 자세히 들여다 볼 생각이다.

 

보물 제260호인 미암일기가 보관되어 있는 모현관이다.

소장 고문서로는 미암일기(보물 제260호)와 고문헌 238점이다.

 

호적관련문서인 호구단자와 준호구(準戶口), 청원문서인 소지(所志), 상서(上書), 원정(原情), 등장(等狀), 매매문서[賣買明文],

분재문서[別給文記], 노비안(奴婢案), 학생안(學生案, 의암서원 외), 시권(試券), 간찰(簡札)들로 임진왜란 이전인 16세기부터

19세기말엽에까지 이르는 다양한 종류(선산유씨가문, 미암 유희춘, 의암서원 등)의 자료로서 제도사, 생활사, 문화사 연구에

가치가 있으며, 이 가운데 가장 오래된 문서는 1566년(嘉靖 45)년에 유희춘이 종성(鍾城) 유배에서 풀려나 돌아오자,

미암의 둘째 누나[吳妹]가 그동안 관리하여 오던 전답과 노비를 유희춘에게 별급(別給)하는 문서이다.

 

그리고 김해김씨(金海金氏)의 분급문기(1570년경, 크기 세로 350㎝ 가로 52㎝)와 울산김씨(蔚山金氏)의 분급문기(1583년)는

임진왜란 이전의 재산상속 관계를 잘 보여주는 자료이다.

김해김씨 분급 문서는 김일손(金馹孫)의 증손녀가 유희춘의 손부(孫婦)로 시집오면서 부친인 김장에게서 재산을 분급받은 문서이고,

울산김씨 분급 문서는 미암 유희춘의 자부(子婦)이자 하서 김인후의 딸인 울산김씨가 2남 1녀에게 재산을 분급한 문서이다. 

유희춘이 처가(妻家)에서 분급받은 분재기(分財記),와 유희춘이 그의 자녀들에게 분급한 분재기도 있으며, 후손들의 과거 응시 답안지, 호구단자와 준호구 등 호적자료(戶籍資料), 문중 산송(山訟)과 관련된 청원서(請願書) 등과 유희춘을 배향한 의암서원 관련 문서들이다.

 

1607년에 창평에 삼천사(三川祠)를 건립하고 유희춘을 배향했는데, 1630년경 담양으로 이건하면서 백천사(白川祠)로 개칭하였다가 1669년 송준길(宋浚吉)의 상소로 사액되면서 의암서원이 되었다. 이 서원 관련 자료 가운데 가장 이른 시기의 자료는 삼천사 건립시

작성된 <영건유사기(營建有司記)>(1607년)를 비롯하여 유생안(儒生案)·서재안(西齋案)·보직안(保直案)들이다. (자료참고 : 문화재청)

 

이후 자료들은 17-18세기 선사유씨가(善山柳氏家)의 산송(山訟)과 관련된 소지(所志)·단자(單子)·원정(原情) 등 청원서, 문중 후손들의 호구(戶口)자료와 매매문서 등 모두 36종류에 이른다.

문건의 연대로는 미암 유희춘의 생존 시기에 해당되는 명종~선조대의 자료는 8건이고, 그 다음 유희춘의 사우가 건립된 시기인

광해군~현종대에는 4건이다. 그리고 숙종대부터는 유희춘의 담양 후손들의 호구단자와 준호구 등 호적자료가 전해오며, 이후 고종대까지 준호구 자료가 연결된다.

 

특히 현전하는 자료 가운데 가장 집중적으로 분포하고 있는 순조~철종대의 자료들은 유희춘 후손들의 생활사와 관련된 문서이다.

물론 이 시기의 자료들은 주로 담양 선산유씨가의 문중 산송(山訟)과 관련된 청원서가 가장 많으며, 이외에 문중 후손들의 생활사를

전달해 주는 매매문서(賣買文書)·수기(手記)·수표(手標), 문중 선조들의 행장(行(狀)·비문(碑文)·족보(族譜)·호총기(戶摠記)들이다.

담양 모현관 소장 고문서·고문헌 자료는 임진왜란 이전 시기의 고문서가 8건이나 있으며, 임란이후 사회경제사와 제도사, 생활사의

변모를 엿 볼 수 있는 자료이다. (자료참고 : 문화재청)

 

 

미암일기가 보관되어 있는 모현관

 

세번째 촬영지인 삽재골 자생화 단지로 가기 위해 마을을 나서면서 본 제각이다.

한창 시제가 진행중이어서 조심히 촬영을 허가받고 시제지내는 현장을 담아보았다.

 

 

창녕(昌寧)조씨의 제각으로 조씨(曺氏)의 본관은 문헌에 10여 본이 전해지고 있지만 사실상 창녕 단본으로 통한다고 한다.

시조 조계룡(曺繼龍)은 신라 제26대 진평왕의 사위이며, 중시조는 고려 태조 왕건의 사위인 조겸(曺謙)이다.

시조인 조계룡창녕 화왕산(火旺山)용지(龍池)에서 잉태되었다는 전설이 있어 본관을 창녕으로 삼았다고 한다.

 

 

시조의 묘소는 경북 경주시 안강읍 노당리에 있으며, 고려 이래 삼남의 명족으로 고려조에서는조겸의 손자 조연우로부터

조유기에 이르기까지 8대에 걸쳐 문하평장사가 배출되었고,조선조에서는 문과급제자 113명,상신 1명,호당 1명,공신 7명 등

숱한 인물들이 나왔다고 한다. 

 

 

도포에 유건을 쓰고 예를 올리는 후손들..

10대부터 18대 조상을 모시고 있다는 후손들의 시제현장을 담는데는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

카메라의 셔터소리도 조용히..발걸음도 조용히...숨도 멈추고...동선은 최대한 짧게..

 

 

그리고 그 아름다운 후손들의 모습을 이렇게 단체로 찍어본다.

 

 

다시 제사상이 차려지기 위한 막간의 시간을 이용하여 들여다 보니 10대조부터 18대조까지 제사를 모신다.

현재 52세손 정도까지 내려 왔다 하니 그 역사가 청송(靑松)심가(沈家)인 내가 24세손이 것에 비하면 유구한 역사임을 알 수 있다.

 

 

창녕조씨 시제가 끝나고 제사음식을 나눠 먹은 후 창평면 소재지에 있는 창평국밥집에서 점심을 먹었다.

창평국밥은 맛 좋고 가격 착하기로 너무나 유명한 음식이다 보니 맛집 탐방은 생략하기로 한다.

 

점심후 다음 촬영지인 삽재골 자생화 단지로 가면서 들른 청노루귀 군락지가 있는 야산으로 갔다.

창평소재지에서 옥과쪽으로 가다보면 언덕위의 하얀집이라는 카페가 있던 곳이 요양병원으로 바뀌었다.

그 언덕을 넘어서면 호남고속도로 위로 난 교량을 따라 화순 금호리조트로 넘어가는 갈림길이 나오는데

화순방향으로 5km정도 가면 우측으로 보광산업 이라는 레미콘 공장으로 들어가는 길이 나온다.

그 길로 500여미터 들어가면 차량을 댈 수 있는 넓다란 길이 나오고 그 왼편 산 기슭이 청노루귀 군락지다.

 

 

청노루귀 군락지를 나와 세번째 촬영지인 담양대덕면 삽재골 야생화 단지로 이동하였다.

아래 지도는 청노루귀 군락지가 있는 곳으로 보라색, 흰색, 청색 등 다양한 청노루귀가 있다.

혹여 가서 보더라도 워낙 작다 보니 발밑을 조심하여야 한다. 그렇지만 그 빛깔이 너무 화사하여 금새 눈에 띄니

쉽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청노루귀 군락지

 

(글 : 포토뉴스코리아, 굿뉴스피플 simpr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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