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대전사라는 이름의 사찰에 선뜻 다가서지 못한 것은 창피스럽게도 이 나이들어서 들어보지도 못한 사찰이름이었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것이 사는 지역이 전라도라 지금까지 다녀본 곳이 주로 전라도땅과 제주도, 조금 멀리 간다면 충청도와 경상남도였으니

경상북도로의 여행은 지금까지 태어나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 정도니 모든 것이 낯설고 신기하고 이름마저도 생경스러웠다.

대전사..사찰이름에서 부처님의 그 무슨 뜻도 뵈이지 않으니..주왕산 주왕사라고 했다면 오히려 더 친숙해졌을 이름..대전사

 

 

주왕산 주방계곡과, 주왕산으로의 각자 체력에 맞는 산행을 마치고 모두 우르르 몰려간 곳이 바로 대전사이다.

물론 나와 내 주변의 몇몇 친구들이 몰려갔기에 나머지 친구들이 갔는지 안갔는지를 모른다.

하지만 이토록 멋있고 아름다워 보이는 사찰을 그냥 통과했을리 만무하기에 모두들 갔을 것이라 믿는다.

올라갈 때 대전사 입구에서 멀찌감치 바라보이는 기암과 주왕산들과 멋지게 어우러진 사찰의 겉모습만 보고 올라갔기에

내려오면서부터는 대전사에 대해 탐방하는 시간이 무척 기다려졌다.

 

 

 제대전사는 대한불교 제10교구 본사인 은해사의 말사로  672년(신라문무왕12)에 의상(義湘)이 세웠다는 설과

919년(고려 태조 2) 눌옹(訥翁)이 창건했다는 설도 있다.

대전사라 이름이 붙여진 것은 주왕의 설화에서 유래하며,《주왕내기(周王內記)》에 의하면,

중국 당나라의 주도(周鍍)라는 사람이 스스로 후주천왕(後周天王)이라 칭하고 군사를 일으켜 당나라에 쳐들어갔다가

크게 패하고 신라로 건너와 주왕산에 숨었다.

이에 당나라가 신라에 주왕을 없애달라고 부탁하자 마일성 장군 등 오형제를 보내 주왕의 무리를 죽였다고 한다.

그 뒤부터 주왕이 숨었던 산을 주왕산이라 하고, 절은 주왕의 아들 대전도군(大典道君)의 이름을 따서 대전사라 하였다고 한다.

절 이름은 나옹화상 혜근(惠勤)이 붙였다고 한다.

혹은 신라의 주원왕(周元王)이 수도했던 산이라서 주왕산이라고 부른다는 설도 있다.

주원왕은 태종무열왕의 8대손인 김주원(金周元)을 말하는데, 김주원이 김경신(뒤의 원성왕)에 밀려 왕위에 오르지 못하자

이곳에서 수도를 하다가 명주(지금의 강릉)로 가서 강릉 김씨의 시조가 되었다는 것이다.(자료출처 : 네이버 테마백과사전>


 

 

창건 이후 자세한 연혁은 전하지 않지만,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주방사(周房寺)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임진왜란 때는 사명대사 유정(惟政)이 승군을 훈련한 곳으로도 알려져 있다.

조선 중기에 불에 탄 것을 다시 중창하여 오늘에 이른렀으며, 부속 암자로는 백련암(白蓮庵)과 주왕암(周王庵)이 있다.

이 중 백련암은 주왕의 딸 이름에서 유래하며, 옛날에는 이 암자에 큰 종이 걸려 있어 아침 저녁으로 은은한 종소리가 울려퍼졌다고

하나 지금은 걸려 있지 않고, 주왕암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나오는 주방사로 추정되며, 나한전과 가학루·산령각 등이 남아 있다.

(자료출처 : 네이버 테마백과사전>

 

 

대전사 건물로는 보광전(普光殿)과 명부전·산령각·요사채 등이 있고, 유물로는 보광전 앞 삼층석탑 2기와

사적비·부도 등이 남아 있다.

이 중 보광전은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02호로 지정된 정면 3칸의 다포계 맞배지붕 건물로, 내부에 임진왜란 당시

이여송(李如松)이 유정에게 보냈다는 친필 서신을 목판으로 음각한 것이 보관되어 있다.

보광전 앞의 석탑은 근처에 흩어져 있던 석탑재를 짜맞춘 것이다.(자료출처 : 네이버 테마백과사전>


 

절 오른쪽 밭에는 우물을 메운 자리가 남아 있는데, 이 우물에 얽힌 전설이 전한다.

본래 이 절에서는 부처에게 올리는 물을 매일 냇가까지 가서 길어오곤 하였다.

이를 귀찮게 여긴 승려들이 조선 중기에 앞뜰에 우물을 파고 그 물을 길어서 청수(淸水)로 사용하였다.

그러나 곧 불이 나서 전각이 불에 타고 말았다. 뒷날 한 도사가 와서 불이 난 이유를 설명하기를,

이 절의 지세는 배가 바다에 떠서 다니는 부선형(浮船形)인데 우물을 판 것은 마치 배 바닥에 구멍을 낸 것과 같다고 하였다.

이 말을 듣고 다시 우물을 메웠다 한다. 이밖에 노루가 우물에 빠져 죽은 뒤 메웠다는 설도 있고, 이 물을 마신 승려들의 힘이 넘쳐

난폭해지는 바람에 인근 주민들의 원성이 많아지자 메웠다는 이야기도 있다. (자료출처 : 네이버 백과사전>

 

 

관음전에 단청이 입혀지지 않은 것으로 봐서 최근 불사로 새로이 지어진 듯 하다.

 

 

관음전에 모셔진 관세음보살

 

 

보광전은 보물 제1570호로 임진왜란때 불탄 것을 조선 현종(顯宗) 13년(1672)에 새로 지어 현재 사찰의 중심 건물로 사용되고 있다. 1976년에 보광전을 고칠 때 1662년의 상량문(上樑文)이 발견되었고, 내부단청은 당시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어 문화적, 예술적, 

학술적으로 그 가치가 매우 높다고 한다. 네 기둥에 적혀있는 주련은...

天上天下無如佛 <천상천하무여불> 천상과 천하에 부처님 같은 이 없고,

十方世界亦無比 <시방세계역무비> 시방세계에도 역시 견줄 이 없네.

世間所有我盡見 <세간소유아진견> 세간의 모든 것을 내가 다 보았지만,

一切無有如佛者 <일체무유여불자> 일체에 부처님 같은 이는 없네.

 

 

보광전에 모셔진 석가여래 삼존불은 조선 현종(1672년)에 절을 새로 지었을 때 1685년에 봉안된 삼존불이라고 한다.

조성재질이 석조로 내구성이 뛰어나고 조형적 가치가 높이 평가되는 조선시대의 보기드믄 석조여래좌상이다.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56호)

 

 

 

산령각(山靈閣)

 

 

 

명부전은 보광전과 더불어 임진왜란때 불타버렸던 것을 조선 현종(顯宗) 13년(1672)에 새로 지어

지금까지 보존되고 있다한다. 명부전 내부의 지장탱화는 경북문화재 자료 제468호로 1806년에 조성된 탱화라고 한다.

 

 

대전사는 부지면적에 비해 상대적으로 사찰규모가 매우 작은편이다.

그렇지만 주왕산이라는 거대한 산을 품다보니 조그만 사찰임에도 빼어난 경관미를 자랑하여

진사님들의 단골 촬영지라고도 한다.

 

 

지금 대전사는 대대적인 불사로 사찰의 규모가 엄청나게 늘어나고 있다.

아마도 템플스테이를 하기위한 불자들의 숙소와 강단등을 만들고 있는 듯...

 

 

대전사의 부처님은 아마도 찾는 이 많아 행복하실지도 모른다.

불교의 대중화라는 명목만 본다면 이렇게 유명한 경승지 바로 앞의 사찰은 굳이 불자가 아니더라도

절을 찾는 사람들에게 부처의 자비로운 미소를 가장 가까이에서 보여줄 수 있는 천혜의 위치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간혹 어떤 사찰에서는 대웅전에 모셔진 부처님의 사진을 찍지 말 것을 요구하지만 글쓴이는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

이미 그 전부터 그 사찰의 주불은 템플스테이를 거친 불자들이나 다른 사진작가, 여행작가들에 의해 널리 퍼져있기에

굳이 부처님의 미소를 담기위해 참배객이나 방문객들이 카메라를 들이대는 것 자체는 이미 소멸시효가 지났다는 것이다.

이제라도 부처님의 미소를 나라 곳곳으로 널리 퍼져나가게 하려면 사진이라도 마음데로 찍었으며 좋겠다라는 생각이 든다.

그것이 부처님이 바라는 세상 아닐까?

 

 

 

 

                기암을 배경으로 이 멋진 대전사의 당우들..

 

 

그리고 명부전앞의 소국.

 

 

 

불사의 현장을 보니 이제 대전사도 제2의 중흥기가 도래할 것으로 보인다.

주왕산을 찾는 연간 수백만명의 탐방객들이 당연히 지나가야 하는 대전사는 주왕산이 주는 지리적 자연적인

은총과 축복을 마음껏 받고 있는 사찰일 것이다.

거기에 계신 부처님 역시 얼마나 행복하실 것인지는 느낌으로도 알 수가 있다.

 

 

 

이제 주왕산을 따스하게 비치던 태양도 서산너머로 뉘엇뉘엇 넘어가고 하늘은 온통 뜯어놓은 솜구름으로 가득하다다.

대전사를 나서며 만산홍엽이 된 주왕산의 기암에 어울리는 이 멋진 사찰을 뒤 돌아 보고, 또 뒤 돌아 보게 만든 것은 왜 일까?

 

 

(4편 봉하산에서 노무현을 추억하다 계속)

 

 (글 : 포토뉴스 코리아 simpro) 트위터 ☞ http://twitter.com/huhasim

   지도: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