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와이 생활

 

 

   하와이에서 병원 생활을 하면서 이박사는 자나 깨나 고국을 돌아올 생각만 했다.

 

   "내 땅에 돌아가 뼈를 묻어야 해."

 

   이것이 이박사가 눈만 뜨면 하는 얘기였다고 한다. 하와이에서의 생활비는 월버트 최, 최백렬씨 등 옛 동지인 하와이 교포들이 부담했다. 건강이 나빠지면서부터 마담이 면회를 제한해 가까운 사람들 외에는 이박사를 뵙기가 힘들었다고 한다. 할아버지의 건강에 대한 할머니의 보살핌은 전에도 남달랐지만 망명 후 5년 동안에 특히 진면목을 발휘했다. 병원 바로 옆에 방을 얻어 놓고 거의 밤낮을 곁에서 모시며 간병했다. 고생 많던 몸이 직접 식사를 만들고 병이 심해진 뒤에는 배설물 가리는 일까지 모두 자기 손으로 해냈다.

 

   나는 전에 할머니에게 섭섭한 생각이 없지 않았지만 이 어려울 때 할머니가 할아버지에게 보인 눈물 겨운 사랑을 듣고는 정말 할머니를 다시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분 생애의 말기에 할아버지가 마음 아파 한 일이 있다면 조국을 떠나 있다는 사실과 부모님께 효도하지 못했다는 아쉬움 뿐이었던 것 같다.

 

   61년 후반기에 일가뻘인 전 내무부장관 이순용씨가 이박사를 만나자 이박사는 '부모님의 선영을 모실 아들이 있어야겠어'하며 택양(擇養) 의사를 비치더라고 했다. 이순용씨에게서 이런 얘기가 전해지자 이유선씨 등 양녕대군 종친회 분들이 택양을 주선했다. 물론 우리도 할아버지의 병환이 좋지 않고 양자로 삼았던 강석이가 자기 생가 식구를 따라 죽은 만큼 양자를 두는 일에 적극 찬성했다.

 

   그러나 적어도 이박사의 아들이 되려면 인물과 학벌이 좋고 영어도 잘해야 하기 때문에 고르고 골라 종친회에서 이인수군을 양자로 천거했다. 택양에 대해 마님은 별로 관심이 없었으나 이박사의 뜻에 따랐다. 할아버지는 종친회의 천거를 받들어 인수군의 입양을 승락하면서 얼굴을 보고싶어 했다.

 

   그래서 인수씨가 입적한 뒤 하와이로 인사 겸 찾아갔다. 벌써 이때만 해도 5·16 혁명 후라 민주당 정권 하에서와 같은 심한 통제가 없어 이박사와의 왕래가 어렵지 않았던 것이다.

 

   인수씨는 오래 미국에 머무르면서 이박사를 간호할 생각이었으나 하와이 사정이 한사람 더 머무르기조차 어려운 실정이어서 얼마 안 있어 돌아왔다. 항간에는 프란체스카 부인이 스위스 은행에 예금을 해두었느니 보석을 많이 가져갔느니 하는 별별 소문이 다 났으나 그런 정도로 하와이의 생활이 어려웠었다.

 

   할아버지가 눈만 뜨면 '가자'는 소리를 연발해 하와이와 국내의 측근들이 62년 환국 준비를 서둘렀다.

 

   마우날라니 병원 의사도 지금 아니면 장기 여행이 불가능할 것이라고 해 비밀리에 준비가 진행됐다. 이박사 환국준비위원회가 조직돼 회장인 이활씨가 하와이로 찾아갔다.

 

   병상에 누운 할아버지는 조국에 가게됐다는 얘기에 어린애 같이 마음이 들떠 병세도 좋아졌다. 아마 조국에 가야겠다는 마지막 일념으로 병세를 극복한 것이리라. 의사에게서도 '무리지만 베드에 누운 채 의사가 계속 돌보며 가면 갈 수 있을 것'이란 청신호가 떨어졌다.

 

   이박사 환국일은 3월 17일로 정해졌다. 하와이에서는 짐까지 사놓고 떠날 준비를 마쳤고 국내에서도 이화장을 수리하는 등 맞을 준비를 모두 끝냈다. 그러나 국내 정세가 여의치 않아 하루 전에 환국계획을 취소할 수 밖에 없게 됐다. 애석한 일이었다.

 

   귀국하겠다는 집념이 좌절된 할아버지는 건강이 급속히 악화했다. 그후로 병상에서 일어서지 못했으며 63년부터는 정신조차 혼미해졌다. 돌아가시는 65년 7월까지 재기불능의 투병이 계속된다.

 

   한편 국내에서는 그동안 황규면씨와 나 등 주변 사람들이 경무대에서 가져간 이 박사 재산을 찾으려는 노력을 계속했다.

 

   이박사의 대통령 시절에 선물을 가져온 사람 중에는 자기가 윤대통령에게 가 자기가 갖다드린 물건을 찾아오겠다는 이도 있었다. 민주당 시절에는 이박사 재산을 윤대통령이 가져간 것이 잘못이라는 사실을 여기저기서 말로 퍼뜨렸고 5·16 후에는 글과 행동으로 바노한운동을 전개했다.

 

   나는 63년 5월 《올·다이제스트》란 잡지에 '이박사 재산 도난기'란 글을 써 재산을 돌려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내용은  이박사 재산 몰수는 부정축재처리법이나 기타 특별법을 적용한 것이 아니니 불법이며 빌려간 것이라면 유대통령이 물러날 때 제자리에 갖다놓았어야 할 것이다. ②진해 별장 지하실 금고에서 이박사의 귀중품을 도난당한 것은 납득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 후 63년 7월 민정당 대의원대회에서 이런 내용을 유인물로 만들어 윤씨가 대통령 자격없다는 주장을 한 일도 있다.

 

   그래서인지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정부에서 이박사 재산 일부를 돌려주겠다고 했다. 그러나 마담으로부터 'All or Nothing'이란 원칙이 지시됐기 때문에 마담의 귀국 직전까지 반환받지 않고 버텨왔다.

 

 

 

서거와 장례

 

 

   오랜 투병 끝에 이박사는 65년 7월 19일 하와이의 마루날라니 병원에서 서거했다. 만 90세. 조국에 대한 사랑으로 일관된 파란과 영욕으로 점철된 생애였다. 프란체스카 부인과 위독하는 소식을 듣고 다시 간 양자 이인수씨가 임종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친척과 친지들은 이화장에 빈소를 차렸고 운구를 위해 황규면씨와 임철호씨가 다음날 하와이로 떠났다. 황씨는 마담의 부름으로 하와이에서 미행기표를 보내 떠난 것이며 임씨는 자비로 간 것이다.

 

   우리는 할아버지가 불명예스런 퇴진을 했다 하더라도 독립운동을 한 공로나 초대 대통령으로서의 업적을 감안해 으례 국장이 되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20일 국무회의는 장례를 국민장으로 양해했다. 정부 당국의 얘기는 국장을 고려했으나 4월 혁명 단체의 극한적인 반대로 이렇게 됐지만 국장 못지 않은 예우를 하겠다고 했다.

 

   이러한 소식이 전해지자 이화장 호상소(護喪所)는 물 끓듯 했다. 결국 나와 몇몇 사람이 국장이 안 될 바에는 가족장으로 하자고 강력히 주장해 이화장은 별도로 장례집행위원회를 구성하여 가족장을 할 채비를 차렸다.

 

   나는 그 다음날 오후에 열린 장례준비회의에서 국민장을 반대하는 뜻을 분명히 밝혔다.

 

   ▶ 이석제 총무처장관 = 부득이 국민장을 해야겠으니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국민장을 하더라도 국장 못지 않게 하겠습니다.

   ▶ 나 = 국장을 안 해 준다 해서 그러는 게 아니라 정부가 국장을 할 생각이 없지 않은데 반대단체가 있어 못한다면 국민장을 국장 못지 않게 하면 거기에도 반대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다 불상사라도 난다면 이박사 유지에 어긋나는 일이니 국민장은 필요 없습니다. 가족장으로 하겠습니다.

   ▶ 윤치영 서울시장 = 우제하씨. 당신이 뭐요. 미망인이 국민장을 좋다 했으니 그 뜻을 받아줘야지 이화장 호상소의 친척들이 무슨 권한이요.

   ▶ 나 = 윤시장께서는 우리를 어떻게 보는지 모르나 국민장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동산(윤치영)은 그 후에도 몇 차례 나와 인수씨에게 국민장을 받아들이기로 권고했으나 우리는 완강히 가족장을 고집했다. 국내에서 장례 절차 문제로 옥신각신하는 동안 하와이에서는 운구 준비가 착착 진행됐다. 존슨 미국 대통령은 운구를 위해 미 공군 특별기를 제공했다.

 

   22일 호놀룰루의 한인교회에서 영결식이 진행되는 동안 충격과 피로에 지친 마담은 쓰러져 졸도 직전에까지 이르렀다고 한다. 그래서 결국 이박사의 주치의였던 토머스 민의 만류로 운구 환국 행렬에 끼지 못하고 영결식이 끝난 뒤 입원했다. 한인교회에서의 영결식에서 이박사의 관은 황규면·월버트 최·오중정·김현철·김학성·최백렬씨에 의해 운구됐다. 이 영결식에는 인도 주재 총영사인 임병직씨와 전 유엔군 사령관 밴플리트 장군 및 미국·월남·일본·파키스탄 등의 대표가 참석했다고 한다. 밴플리트 장군은 14명의 운구 환국 호송행렬에게까지 끼여 이화장에 왔다.

 

   23일 오후 김포공항의 유해봉영식에는 3부 요인·외교사절·일반시민 등 5천여 명이 나왔으며 이화장까지 이르는 길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다만 유감된 것은 교통혼잡을 염려한 당국에서 운구 행렬을 시속 40km 이상으로 몰아쳐 일반 시민들의 추모의 정을 표시할 새가 없었던 점이다. 운구는 해왔으나 이화장에 병풍·돗자리는 물론 그릇도 없어 우리집에서 모두 가져왔다. 가족장을 하기로 정한 우리들은 정부의 지원을 모두 거절했다. 그러나 정부측은 장례보조비 5백만원·꽃 차·3군 의장대를 떠맡기다시피 했다.

 

   장지는 할아버지가 대통령 때부터 스스로 정해 놓았던 국립묘지의 공작봉 중턱으로 정부측이 배려해줬다. 이곳이 안 되면 양녕대군 묘소 근처로 장지를 정할 준비까지 했었다. 이박사가 공작봉 중턱을 자신의 묘지로 봐 놓은 경위는 대충 이렇다.

 

   6·25가 끝난 뒤 이박사는 국군묘지 터를 잡기 위해 몸소 엄홍섭 육군공병감과 황비서를 데리고 헬리콥터로 관악산 일대·남한산성 ·망우리 등지를 답사했다.  결국 세 번째 답사 끝에 국군묘지가 동작동으로 결정됐다. 국군묘지 터를 둘러본 이박사는 공작봉 중턱 2백 70여 평의 터를 가리키며 '후에 저 자리엔 내가 들어갈 수 없겠나'하고 엄 공병감에게 말해 그 후 이박사 묘지 터로 유보해 두었던 것이다.

 

   27일의 장례 때도 당국에서는 교통혼잡을 줄이기 위해 이화장 → 돈화문 → 중앙청 → 시청 → 청파동 굴다리까지는 도로로 가고 다음부터는 군용기 편으로 동작동까지 가는 게 좋겠다고 제의했다. 물론 우리는 거절했다.

 

   아침 8시에 이화장으로 떠난 장례행렬은 종로 5가 → 광화문 →이화여중 → 정동교회 →시청 → 동작동 코스를 장장 8시간 동안 도보로 갔다. 하관할 때 별안간 한 줄기 소나기가 내렸다. 우리는 90평생을 조국만 생각한 거인의 죽음에 하늘도 슬퍼하는구나 하는 감동을 느꼈다.

 

 

▲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 안에 자리잡고 있는 이승만 초대대통령과 프란체스카 여사의 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