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 8월 19일 민의원에서는 민주당 대표최고위원 장면(張勉)이 제2공화국의 국무총리로 인준된다.
민주당 신파의 대표인 장면이 우리나라 역사상 국무총리가 실권을 가졌던 유일한 내각책임제 정권인 제2공화국의 총리로 인준되자 그의 정치적 활동 근거지인 명륜동 가옥에는 총리 인준을 축하하고 향후 이루어질 조각(組閣) 상황을 취재하기 위한 내외빈과 기자들이 한꺼번에 몰려들게 되는데 아래는 그러한 상황을 보여주는 사진들이다.
▲ 가옥 외부(1960년 8월 20일자 동아일보 게재) - 담장 밖으로 기자들의 취재 천막이 설치되어 있다.
▲ 축하객들로 가득한 가옥 마당(1960년 8월 20일자 동아일보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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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이제 위 사진들로만 짐작할 수 없는 1960년 당시의 감흥과 흥분은 위 사진들이 실린 1960년 8월 20일자, 8월 22일자 동아일보와 같은 날짜 경향신문 기사를 함께 읽으면서 간접 경험해 보도록 하자.
▲ 1960년 8월 20일자 동아일보
흥분·기쁨의 도가니
밤늦도록 화분 받아드리기에 진땀
장 총리댁에 인파로 법석
국무총리가 된 장면 박사 ---총리 인준 가결보도가 전해지자 시내 명륜동에 있는 장박사댁은 삽시간에 밀려드는 남녀시민·정객 ·실업가·동네 사람들로 뒤덮여 비좁은 집안이 숨박힐 지경.
온집안을 활짝 열어제치고 축하객들을 맞이하였는데 찾아오는 사람은 밤늦도록 그칠 줄을 몰라 장박사도, 부인 김여사도 구슬같은 땀을 흘리었으나 시종 미소를 잃지 않는 가운데 기쁨과 흥분에 찬 첫날을 보냈다.
명륜동 자택 앞길에는 어느 틈에 시민들로 꽉 차서 급거 동원된 수명의 교통 순경들이 정리하기에 진땀을 빼는 판국... 저마다 장박사의 얼굴을 보려고 엎치락 뒤치락...
장박사 집 정문 바로 앞에는 모 신문사의 천막이 벼락같이 출연... 조각(組閣) 취재를 위한 결사적(?)인 태세...
관용차·자가용차 그리고 군용차까지... 쉴새 없이 모여드는 찝차들은 개미떼처럼 장박사 집 주변에서 웅성거려 크락숀 소리도 요란...
건평이 60평에 마당이 40평 남짓한 장박사 집안은 글자 그대로 흥분과 기쁨의 도가니... 수십명의 부녀자들이 대청마루에서 김여사를 둘러싸고 웃음 또 웃음들... 마당에는 임시로 천막 한 채가 쳐있고 맥주와 콜라로 손님 대접...
3시 좀 넘어 장박사가 들어서자 길가의 시민들은 『만세!』와 박수... 집안에서도 또 『만세!』와 박수... 장박사는 손을 흔들며 답례. 「4월혁명학생동지회」에서 삐라 살포가 있었는데 그 내용은 「제2공화국·윤대통령·장면국무총리 만세!」를 외치는 것...
화분, 화환의 물결... 각계각층에서 홍수처럼 쏟아져오는 것... 『온실을 하나 장만할 만도하다』고 중얼거리는 사람도... 어느 틈에 경비전화가 가설되고 경비순경들도 오락가락...
밤 8시 40분경에는 신용산 시장번영회 회원들 약 50명이 줄을 지어 대거 출동하여 축의를 표하고 돌아갔는가 하면 동대문 밖에서 찾아왔다는 아낙네들도 집구경 겸사 사람 구경을 할 량으로 조심조심 문안으로 들어서기도 하였다.
밤 11시까지의 내객수는 대충 6백 내지 7백명 정도... 권세란 과연 좋은 건지? 어느새 그다지 좁지도 않은 앞마당에는 값진 화분들이 빽빽이 들어서고 안내인들은 계속해서 들어오는 화분을 받아들이기에 바빴는데 그 화분에 달린 리본에는 ××사장, ××이사장 이라고 쓰여있는 것이 유달리 눈에 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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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0년 8월 20일자 경향신문
탄압받은 주름살도 웃는
장면씨 생애 최고의 날
하객으로 문전성시, 부인은 뼈저린 책임 느낀다고
「장면씨 생애 최고의 날」인 19일 하오 서울 명륜동 1가 36번지 자택은 쉽사리 몸을 들여놓기 힘들만큼 남녀 환영객들로 빽빽했다. 중계방송이 당선을 외친 그 순간부터 일어닥친 꽃과 화분들은 삽시간에 좁다란 앞 뒷뜰에다 리봉을 붙인 화원을 꾸몄다.
코리어의 럭키 레디(행운의 부인)가 된 총리 부인 김(김옥윤) 여사는 그저 기쁨에 넘친 얼굴을 누구에게 먼저 돌려야 할 지 몰라 부드럽게 당황하는 것 같았다. 백사람의 도련님이 추석과 설과 생일을 한꺼번에 한자리에서 맞은 것 같은 인상 - 이것이 장 박사댁의 인산인해를 요약한 형용사일지 몰랐다.
앞마루 기둥에 매달린 카나리아와 십자매 한 쌍이 뒷마루로 옮겨졌으나 노오란 카나리아는 울질 않았다. 검은 세파트 한마리는 뒷마당에 웅크린 채 분위기에 알맞게 꼬리를 흔들었다. 부엌에서 일하는 앞니 빠진 식모 조씨 할멈은 소리 없는 웃음을 끊지 않았고 그의 손길 발길이 한층 가벼워보였다.
『국민이 원하는 대로 될 줄 알아요』---하객들에 에워싸인 김 여사는 땀에 흠뻑 젖었다. 수백 명이 입추의 여지 없이 기다리는 가운데 행운의 주인공이 경무대를 거쳐 그의 스위트 홈에 나타났다 하오 3시 20분! 박수와 만세소리에 실린 장 박사는 대문간에서 부인과 먼저 악수를 교환했다.
다음 순간 군중들은 「와」하면서 두 사람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거기 모인 모두가 비서 같았고 참모 같았다. 감투를 그리면서 찾아든 듯한 거물급들의 표정은 『어서 이 혼잡이 가라 앉았으면 ---』하는 것으로 반영되었다.
대청 전축 위에 세워진 마리아 상 앞에 화환이 안겨져 있었으며 그 카드엔 「하자 없으신 성모여. 우리 조국을 맡기나이다」라고 쓰여져 있었다.
1명의 신부, 1명의 수녀를 낳은 2녀 6남의 어버이 장 박사 부처는 『이날까지 한 번도 다투어 본 적이 없어요』라고 말했다. 서울 갑부 정미소왕의 맏딸로 태어난 김여사는 『어깨가 무거워졌음을 뼈저리게 느꼈어요』라고 총리 인준이 되던 순간의 기분을 피력했다. 경주가 고향인 총리 부인의 이마엔 야당 정치인의 아내로 늙어온 탄압의 주름살인양 한 가닥 한 가닥에 심각한 야담이 새겨진 것 같았다.
하오 5시쯤 되니까 집안은 서서히 고요를 찾기 시작했다. 그러나 환영객들의 발길은 릴레이 식으로 그냥 계속되었다.
『원님 가시라고 길 닦았더니 문둥이가 먼저 간다』는 속담을 털어놓은 박(박순천) 여사는 안방에서 그의 「부인 동지」들로부터 개선장군의 대접을 받았다. 『신파의 산실』 치고는 너무도 초라한 자택이었으나 3천만의 멍에를 지고 갈 『정치 노동자』의 집으로 따진다면 그다지 뭣하지는 않았다.
황혼이 깃들기 시작하자 장 총리댁의 굴뚝에선 어제와 다름없는 『삶의 연기』가 가운 8월의 천공을 향해 솟아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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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0년 8월 22일자 동아일보 <횡설수설> 코너
장 신총리 자저(自邸) 앞엔 새로이 천막 하나가 갑자기 쳐졌다. 모르는 사람들이 보기엔 어떤 상가(喪家) 문전이 아닌가 하고 심상하게 봐 넘길는지 모르나 알고 보면 그것이 신문기자들을 위한 휴게·대기소라는 점에서 행인들의 호기심과 관심을 끌게 된다. 즉, 장면 총리의 명륜동 자택이 조각본부가 된 것은 이미 알려진 일. 그래서 뉴스맨들은 장 총리의 초청을 받고 드나드는 정계인들의 면면과 그들의 일동(一動)·일정(一靜) 캣취에 취재편의를 제공하기 위해서 임시로 차일을 쳐놓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친절을 베풀어준 장 총리의 호의는 신문인들에게 매우 좋은 첫인상을 준 게 사실이다. 여러해동안 이승만 독재자에게 하시(下視)와 홀대를 받아온 국내 신문기자들이다. 단독 인터뷰를 절대 허용 않은 것은 물론 공동회견조차도 가뭄에 콩나기 격으로 하기 힘들던 그 시절이 연상된다.
바로 말해서 이승만 그 사람도 12년 전 대통령에 당선, 이화장에다가 조각본부를 차렸을 당시엔 오늘의 장면씨처럼 정문 앞에다가 천막을 쳐놓고 프레스맨들에게 제법 접대하느라고 했다. 오늘의 장 박사가 하듯이 해서 호평을 받았던 일이 아련히 생각난다. 그렇던 이승만이 집권 후 소인배들의 호간에 농락되면서부터 신문기자들을 경원하고 또 멸시하기 시작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지금의 장면 국무총리는 앞으로 결코 그렇지 않으리라고 믿고 싶다. 조각(組閣)에 앞서 그 본부 한족 빈마당에다가 신문기자들을 위한 휴식소쯤 가설해주는 것은 일본 같은 나라엔 옛날 고리쩍부터 있어 내려온 일이다. 뭣이 그다지 썩 달가운 게 아니다. 오직 장씨가 집권하는 동안 끝까지 신문 및 신문인들에 대한 태도가 어떻겠느냐가 보다 더 큰 문제다.
윤 대통령에게 바라듯이 언제나 문호를 훨쩍 개방하고나서 신문인들이 단독으로라도 만나 달랄 때 선선히 만나주고 또 공동 인터뷰를 아이크의 경우처럼 주례적(週例的)으로 꼬박꼬박 해주고... 이런 것들이 더욱 절실하게 필요하다. 그리고 또 하나는 특히 여당지와 야당지를 차별 않는 일시동인(一視同仁)의 관대한 아량과 태도로 대해 주었으면 하는 것이다.
어쨌든 장면 박사의 조각초부터의 언론인들에 대한 에티켓은 우선 찬사를 받고 있지만 그러한 친근감이 두고두고 녹슬지 말아주기를 바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