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잡지명 : 삼천리 제5권 제9호(1933년 9월 1일)

 

3대 금광왕 출세기 : 최창학, 방응모, 김태원씨 등

(三大 金鑛王 出世記 : 崔昌學, 方應模, 金台原氏 等)

 

북악산인(北岳山人)

 

최창학편(崔昌學 篇)

 

그것은 대정(大正) 13년(1924년) 7월 24일 오후7시 경(頃)이엇다, 평북(平北) 의주(義州)에 잇는 삼성금광(3成 金鑛)에 강도단이 무기를 가지고 돌연히 습격하여왓다.

 

그날 광주(鑛主) 최창학(崔昌學)은 자기가 아츰부터 제련소(製鍊所)에 올나가서 채금(採金)하는 것을 감독하고 잇다가 하오 6시 반 경(頃)에야 사무소에 내려와서 몸을 쉬이엿다, 그럴 때에 마츰 일본인 경관(警官) 두 명이 놀너 왓기에 담배를 피우면서 한참 잡담하고 잇다가 암만하여도 제련하는 것을 인부들에게만 맛겨 두는 것이 안 되어서 순사들은 안저 놀라하고 저는 몸을 이르켜 다시 굴이 잇는 산으로 올나갓다, 약 5분이나 지낫슬까 할 때에 어대서 불시에 총소리 저녁 하늘을 째며 여러 사람들이 부르지즈며 우는 소리가 난다, 깜작 놀라 본능적으로 바위 밋헤 몸을 숨기고 내려다 보니 저리로 손에 총과 독끼 등 무기를 지닌 강도단 여럿이 위협(威嚇)하는 공포(空砲)를 노으며 사무소로 질풍갓치 몰려온다. 그리더니 경관과 교화(交火)하는 양(樣)이더니, 이내 사무소 문을 파괴하고 실내에 드러가 금고를 고깽이로 바스는 소리 나더니 사무소에는 불을 질너 그 화광(火光)이 산곡(山谷)을 환-하엿 비최엿다, 최씨(崔氏)는 실색(失色)하고 더욱 산으로 깁히 기어 올낫다가, 에라 죽으면 한번 죽지 두 번 죽겟나 하는 생각으로 모자를 눌너쓰고 밤중이 되어 누구인지 잘 분간 할 수 업는 것을 이용하야 다시 광부들이 2만여 명이나 모여 사는 사무소 아래의 촌락으로 내려가서 남 몰래 여러 광부들 틈에 석기엇다.

 

그때 강도단들은 반항하는 촌민 3, 4명을 쏘아 죽이고 모다 모여서라 하여 모여 노코는

「우리 목적은 최창학씨에게 잇다, 너이들이 최씨(崔氏)를 잡아내면 2천원을 줄 터이다, 최창학씨는 너이들 속에 숨어 잇슬 터이니 어서 발견하야 내여라, 만일 찻어내지 안으면 너이들이 모다 이것이다.」

하며 또 한번 공포를 놋는다.

 

대담한 최창학은 그 말을 듯자 등골에서 찬 땀이 흘넛다, 목전(目前)에는 시체가 보이고, 무기를 가진 강도단이 잇다, 그는 어름어름하며 몸을 피하여 그 부근 길가에 잇는 다리 아래에 숨엇다.

 

여러 갱부(坑夫)와 강도단들의 수사(搜査)는 더욱 맹렬하다, 그는 참다 못하여 다시 몸을 일어 그 뒷 산곡(山谷)으로 올낫다, 정신이 업시 엇더케 다라올낫는지 한참만에 이마에서 땀이 작고 나리기에 손으로 만지니, 땀이 아니라, 피엿다, 그제야 보니 그 험한 칼날 가튼 바위속을 기어오느 라고 손과 발과 전신이 왼통 피투성이가 되엇다.

 

멀니 촌락을 내려다보니 촌가(村家)에서는 불이 일고 잇섯다.

 

최창학씨는 이날 습격에 생명만은 구하엿섯다, 그리고 앗가 사무소에 와 놀든 순사 두 명은 무참히 죽엇고 촌민(村民)도 수삼인(數三人)이 죽엇다.

 

해라고는 사무소 금고 속에 두엇든 현금 6천원과 금괴 1만원짜리 한 개엇다.

이 사변이 한번 이러나자 삼성금광 부근에 광구(鑛區)를 가지고 잇든 광주(鑛主)들은 생명의 위태(危殆)를 깨닷고 자기네 광구(鑛區)를 헐갑으로 팔엇다.

 

최(崔)는 그것을 모다 거더삿다, 그것이 나종에 저 유명한 삼성금광의 광구가 된 것이다. 삼성금광은 전년(前年)에 중추원(中樞院) 참의(參議) 김모(金某)의 주선으로 동경(東京)의 「미츠비시(三菱)」재벌에 130만원인가 밧고 팔엇다.

 

최(崔)는 구경(究竟) 幸運(행운)한 사람이엇다, 그는 촤(禍)가 전(轉)하야 복(福)이 된 사람 중의 한 사람이다.

 

최(崔)의 재산을 세상에서는 약 300만원 된다고도 하며, 또는 100여 만원 밧게 아니 된다고도 한다, 그 진부(眞否)는 알 수 업스나 얼마 전에 엇던 흥신소(興信所)의 비밀조사에 의하면 신의주(新義州) OO은행지점에 69만원의 저금현재(貯金現在)가 잇슨 것은 사실이라 한다. 그로 미루어 보건대 다른 은행에도 현금예입(現金預入)이 상당액이 잇슬 것이며 또 경성(京城) 죽첨정(竹添町)의 양옥과 의주(義州), 구성(龜城)의 굉장한 주택 등, 더구나 그가 가지고 잇는 광산은 아직 의주(義州), 삭주(朔州), 구성(龜城) 등지에 허다하다 하니, 2, 300만원의 거부인 것은 알 수 잇겟다.

 

최창학씨를 호(呼)하야 조선 근대 금광왕 중 제1인자라고 한다.

 

그는 올에 마흔 다섯인가 여섯 살인가 한 장년에 불과하다, 그리고 아직도 금광사업에 야심을 만만(滿滿)히 가지고 잇다, 금일 실로 평북(平北)의 지하 100척(尺)만 파면 도처에 금은이 쏘다저 나온다고 한다, 전선산(全鮮産) 금액중 3分1은 평북에서 나고, 그 평북에서도 8, 9할(割)은 운산(雲山), 삭주(朔州), 구성(龜城), 의주(義州)에서 난다고 하는데 최씨의 소유광구가 대부분 삭주(朔州),  구성(龜城), 의주(義州)에 잇는 것을 생각할 때 최창학씨의 장래는 아직 잇다고 보는 것이 올흐리라, 더구나 총독부에서는 산금장려(産金獎勵)를 극력으로 하여 금일 1,000만원의 연산액(年産額)을 10년 후에는 1억만원으로 증액할 계획을 가젓다 하니 정(正)히 금광업자들은 세월을 맛낫다 할 것이다.

 

최창학씨는 평북 구성(龜城) 출생이라, 그는 한미한 소농가(小農家)에 태어 낫기에 소년시(少年時)의 최창학은 고난으로 일관하엿다. 장(長)하야 별로 학문 닥글 기회도 업시 몸에 손독끼 한 개를 지니고 이 산에서 저 산으로 금광 찻기로 나서기도 하고 엇던 때는 광산의 광부로 갱내 지하 140척(尺) 속으로 드러가서 인부로도 잇섯고 또 덕대(德大)로도 범(凡) 10수년(數年)을 불우(不遇)하고, 삼순구식(三旬九食)하는 생활을 하다가, 삼성금광(三成金鑛)의 광구(鑛區)를 발견하여 그를 출원(出願)하여 소유함으로부터 일조(一朝)에 광산의 왕자(王者)가 된 것이다.

아모려나 今日 朝鮮의 鑛業界엔 三菱系와 久原系의 王者가 橫行하지만 그 세력에 대할 세력은 오직 崔昌學 氏 等의 鑛業者들이라 한다.

崔氏는 아직 아모데도 돈 잇단 표를 내민 것이 업다, 그는 鄕里에 數百間드리 阿房宮 가튼 주택을 지엇스되, 頹落하는 學校집을 重修하라고 단돈 100원 기부하엿다는 말을 아직 못 드럿다, 又 신문사나 고아원이나 其外 일반사회사업에 足跡을 냉긴 자최가 아모데도 업다, 이것을 엇던 분은 倒罵하고 엇던 분은 침묵을 직혀 비평을 피한다, 打罵하는 분은 인색하여, 個人亨樂밧게 모르는 爲人이라하고. 침묵 직히는 이는 그가 큰 돈을 더 버으러 아주 큰 일을 죽기 전 한아는 작만하리라고 기대하고 잇기 까닭이다, 崔氏는 과연 장차 어느 편에 쓸닐 분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