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우리치오 페라리스의 인터뷰

 

피터 그래턴(Peter Gratton): <<선언(Manifesto)>>과 <<서론(Introduction)>>이라는 두 책은 당신의 "신실재론(new realism)"에 관한 명료하게 쓰여진 그리고 흔히 해학적인 해설서입니다만[...], 이 저작들을 발견할 기회를 아직 가져본 적이 없었던 독자들을 위해, 저는 먼저 당신의 "신실재론"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리고 그것이 이전의 실재론들과 어떻게 차별화될 것인지 요약해 주시기를 요청합니다.

 

마우리치오 페라리스(Maurizio Ferraris): 제 실재론이 이전의 실재론들과 다른 유일한 까닭은 그것이 특정적으로 탈근대주의(postmodernism)에 대응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유형들의 실재론은 다른 유형들의 반실재론(anti-realism)에 대응합니다. 예를 들면, 1912년의 미합중국 신실재론은 신칸트주의를 비판했습니다. 각 실재론은 독자적인 반실재론이 있으며 특정한 역사적 환경에 대응합니다. 제 신실재론의 경우에, 그것은 탈근대주의의 전형적인 무차별적 구성주의(constructivism)에 반대합니다. 이른바, 호수와 산을 비롯한 모든 것이 사회적으로 구성되는 것으로 간주되었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예컨대, 청구서가 사회적으로 구성된다는 점을 인정하는 데에는 아무 어려움도 없습니다. 어떤 방식들로 (전적으로는 아니지만) 카리스마나 아름다움 같은 것들도 사회적으로 구성될 것입니다. 그렇지만 호수와 산은 확실히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터무니 없고, 그래서 이렇게 말하는 것(또는 심지어 시사하는 것만으로도)은 철학에게서 모든 진지함을 박탈하여 철학을 헛된 동화로 바꾸는 것입니다.

 

PG: 이탈리아어와 다른 유럽어들로 이 저작들이 출판됨으로써 얼마간의 물의를 일으켰는데, 제가 생각하기에는, 특히 해석학과 해체에 관여하는 사람들이 당신은 이런 운동들이 대항계몽주의(counter-Enlightenment)였거나, 또는 상대주의를 초래한다는 취지로 하버마스를 원용할 최초의 사람에 속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마지막 숨을 쉬고 있는 늙은 파수꾼일 뿐입니까? 아니면 어떤 실재론은 항상 물의를 일으킬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MF: 실재는 물의를 일으키고 흔히 불쾌하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에 실재론은 항상 물의를 일으킬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늘 그렇듯이, 허구가 항상 훨씬 더 좋아 보입니다. 계몽주의에 대해서, 지금까지 해석학은 흔히 명시적으로 그것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습니다만(저는 가다머와 하이데거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해체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후기 데리다는 도래할 계몽주의, 신계몽주의를 지지한다고 말했으며, 그리고 이것은 신실재론이 좇는 방향과 동일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진정한 해체는 사실상 신실재론, 즉, 지금까지 최근 철학을 특징지은 "학파 도식들"의 외부에서 해체하여 재구성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PG: 신유물론과 신실재론에 결코 관여하지 않지만, 상이한 정치적 공간들을 재고하기 위한 문헌적 원천들을 캐내는 작업을 하는 사람들[...]에게 사회적인 것이 발생하는 바로 그 글쓰기로서의 문서성(documentality)에 관한 당신의 작업이 특히 흥미로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한편으로 당신은 실재계의 긍정성으로부터 우리를 격리시키는 탈구조주의와 해석학의 형태들을 거부하지만, 예컨대, 주어진 법 체계 등의 실재를 서술하기 위해 흔적에 관한 데리다의 관념에 여전히 의존합니다. 그래서 당신의 <<굿바이 칸트!(Goodbye, Kant!)>>(<<굿바이 레닌!>>이라는 독일 영화의 리프)라는 역설적인 제목을 원용하면, 당신은 해체와 완전히 이별할 채비를 갖추고 있지 않는 듯 보일 것입니다.

 

MF: 그렇습니다. 저는 해체와 완전히 이별할 채비를 갖추고 있지 않습니다. 또는, 최소한, 제 이별은 유령이 "안녕, 안녕, 안녕, 나를 기억해 다오"라고 말하고 햄릿이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하는 <<햄릿>>의 유명한 장면을 대체로 회상시키는 것입니다. 기본적으로, 지금까지 제가 행한 모든 일은 해체의 기억을 간직하며 그것을 개정하는 것이었습니다. 데리다는 흔적을 남기는 것의 중요성을 역설했으며, 그리고 지금까지 저는, 제 이론에서, 사회적 행위들의 기록(즉 흔적)에서 비롯되는 사회적 객체들의 범주를 정교화함[이것 역시, 설(Searl)과의 갈등의 중심에 놓여 있는, 언설 행위에 관한 데리다의 성찰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으로써 이 통찰에 긍정적이고 더 구체적인 차원을 부여하려고 노력했습니다. 데리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텍스트의 외부에는 아무것도 없다." 실재론자로서 저는, 탁자 같은 자연적 객체들과 수 같은 관념적 객체들은 텍스트의 외부에 존재하는 반면에, 지난 수십 년 간의 인터넷과 글쓰기의 붐이 입증하듯이, 사회적인 것은 아무것도 텍스트의 외부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문자 그대로 참이다.

 

PG: 문서성이라는 이 개념이 우리가 사회적인 것들의 작동을 재서술하는 데 어떤 도움을 주어야 합니까?

 

MF: 예를 들면, 설, 투오멜라(Tuomela) 또는 길버트(Gilbert)에서 찾아볼 수 있는 사회적 실재에 대한 지배적인 해석은 그것을 이른바 집단적 지향성의 표현으로 간주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충분한 답변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며, 사실상 저는 그것이 사회적 계약 이론의 재생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탁자 주위에 둘러 앉아서 재화를 구입하는 데 화폐가 사용될 것이고 사람들에게 보상하거나 형벌을 가하는 데 법률이 사용될 것이라고 결정합니다. 명백히 그것은 상황이 전개되는 방식이 아닙니다. 우리는, 예컨대, 우리가 거의 이해하지 못하지만 복종해야 하는 규칙, 규제, 법률 그리고 문서들로 가득찬 매우 늙은 세상에서 매우 젊은 존재자로 태어납니다.

 

어느 시점에 우리는 그런 규칙들 가운데 일부는 잘못되었고 일부는 불공평하다는 것을 깨달을지도 모릅니다(사실상 그것은 바람직합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나중에 오는 단계인데, 비판과 변형을 겨냥하는 집단적 지향성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타자들을 정치적으로 민감하게 만드려는 시도를 수반해야 합니다. 지향성은 항상 하나의 반작용, 즉 문서성의 지배를 받으면서 그것을 초래하지 않는 변화인데, 제가 보기에는, 문서성이 사회적 세계의 본질적인 요소이기 때문입니다.

 

PG: 당신의 접근 방식은 당신의 친구 마르쿠스 가브리엘(Markus Gabriel), 또는 사변적 실재론자들과 어떻게 다릅니까?

 

MF: 마르쿠스와 비교하면, 저는 인식론자라기보다는 존재론자라고 말할 것입니다. 마르쿠스는 존재하는 것은 의미의 장 속에서 존재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저는 존재하는 것은 저항하는 것이고, 이런 저항은 아무 의미도 갖지 않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것이 아무 의미도 생성하지 않고 우리가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그것은 그저 존재할 뿐입니다. 사실상, 제가 개정 불가능성(unamendability)라는 제 관념을 통해서 설명하려고 노력했듯이, 무언가를 실재적인 것으로 인식하는 최초의 가장 직관적인 방식은 우리가 그것을 임의대로 변화시킬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실재는 존재하는 것이고 흔히 그것은 우리에게 다소곳이 순응하기보다는 우리의 개념적 도식들에 저항합니다. 존재론이 불투명하고 흔히 무의미하다는 사실은 그냥 사실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것이 삶입니다.

 

물론, 철학자들은 존재론을 이해하려고 노력할 수 있고 노력해야 하며, 그래서 무엇이 존재하는지 알게 되겠지만,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존재하는 것과 존재하는 것에 관해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을 혼동하지 않도록 항상 주의해야 합니다. 또한 이것이 사변적 실재론자들과 저를 구별지을 것입니다. 제 철학은 사변 철학이 아닙니다. 그것은 셸링(Schelling)풍의 실증 철학인데, 세계 속에서 일어나는 것과 이런 사건들이 세계에 관해 드러내는 것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입니다.

 

PG: 다음 저작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습니까?

 

MF: 현재 저는 "창발"이라는 관념에 관해 작업하고 있습니다. 지난 이 세기 동안 철학은 실재를 구성, 즉, 나로부터 세계로 나아가는 운동의 결과물로 간주했습니다. 지금 제가 작업하고 있는 것은 그 반대의 과정, 즉 실재가 세계에서 출발한 다음에 사유에 이르게 되는 창발인데, 사유도 실재의 일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