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트 리들리의 만물의 진화에 대한 서평 - 우파 자유지상주의자의 잘못된 생각

The Evolution of Everything by Matt Ridely review - the rightwing libertarian gets it wrong

 

다윈의 이론은 인터넷에서 지도력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에 적용되는가? 칼럼니스트이자 퇴진한 은행가는 거만한 엉뚱한 책을 저술했다.

 

―― 존 그레이(John Gray)

 

매트 리들리는 한 가지 사실을 발견했다. <<종의 기원(The Origin of Species)>>에서 다윈이 서술한 자연 선택은 보편적 과정의 특수한 일례일 뿐이다. 이 책의 서두에서 리들리가 말하듯이, 다윈주의는 "진화에 관한 특수 이론"이다. 그런데 진화에 관한 일반 이론도 존재하며, 그것은 사회, 돈, 기술, 언어, 법, 문화, 음악, 폭력, 역사, 교육, 정치, 신, 도덕에 적용된다. 일반 이론은 사물들은 그대로 유지되지 않고, 사물들은 점진적이지만 가차없이 변화하고, 사물들은 "경로 의존성"을 나타내고, 사물들은 유래의 수정을 보여 주며, 사물들은 선택적 지속성을 드러낸다고 말한다.

 

인터넷에서 지도력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의 진화를 다루는 그 책의 16개 장에 걸쳐 리들리는 이 주문―누적적 복잡성을 낳는 다윈의 자연 선택 메커니즘은 인간 문화에도 전반적으로 적용된다―을 여러 번 반복한다. 언어에서 도시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습관과 제도는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으며, 그 변화의 메커니즘은 놀랍게도 다윈주의적인 것으로 판명되는데, 그것은 점진적이고, 무방향적이고, 돌연변이적이고, 가차없고, 조합적이고, 선택적이며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 막연히 진보적이다".

 

리들리가 이것을 새로운 관념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흥미롭다. 사회적 진화에 관한 이론들에서 새로운 것은 결코 아무것도 없다. 나는 고인이 된 FA 하이에크(Hayek)가 삼십 년 전에 그가 "종교들의 자연 선택"이라고 부른 것―존속하여 널리 퍼지는 종교들은 사적 소유과 시장 교환을 조장하고, 그래서 점점 늘어나는 신자들을 지지하는 것들이 되는 다윈주의적 과정으로 추정되는 것―에 관하여 행한 강연을 경청했던 생생한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 나는 이런 설명이 어떻게 종교의 실제 역사와 일치되는지 의아하게 여긴 것을 떠올린다. 그리스와 로마의 다신교적 교단들은 진화적 쇠퇴의 점진적 과정으로 사라지지 않았는데, 그것들은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로 개종했을 때 근절되었다. 티베트 불교가 티베트에서 사라진다면, 또는 바하이교가 이란에서 사라진다면, 그 이유는 이런 종교들이 어떤 진화적 열세를 겪는다는 점이 아닐 것이다. 그것은 국가 권력이 그것들을 파괴하는 데 동원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사회적 진화에 관한 관념들은 권력의 행사를 무시하는데, 그것이 도대체 언급되더라도 진화적 변화의 방대한 과정에서 사소한 세부로서 언급될 뿐이다. 그런데 사회에 있어서 진화를 추동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것은 무엇인가? "사물들은 그대로 유지되지 않는다"는 주장은 거의 이론이 아니다. 다윈주의적 자연 선택은 메커니즘과 선택 단위―유전자들은 그레고르 멘델(Gregor Mendel)이라는 모라비아의 수도사에 의해 발견되었었는데, 다윈을 알지 못했다―를 식별했다. 과거에 사회적 진화의 이론가들은 이것들 가운데 어느 것도 특정하는 데 결코 성공한 적이 없다. 돌연변이적이고 조합적인 과정 등에 관한 많은 시시껄렁한 이야기에도 불구하고 리들리도 성공하지 못한다. 진화에 관한 일반 이론은 존재하지 않는다.

 

리들리가 행하는 것은 사회적 진화의 옹호자들이 지금까지 항상 그랬던 것인데, 그는 역사의 선택적 조각들에 의해 적절히 보강된, 지난 몇 십 년 간의 일부 사건들에 집중하여 이런 다양한 일화들을 멈출 수 없는 추세로 변환시킨다. 초기 자본주의의 19세기 예언가였던 허버트 스펜서(Herbert Spencer)―긴 주석에서 리들리에 의해 "가장 부당하게 비방받은 역사적 인물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서술된―는 빅토리아 시대 중기의 자유방임주의를 모든 사회가 진화하고 있는 인간 발달의 최종 단계로 간주했을 때 그런 일을 행했다. 아무리 괴짜였더라도―그는 소음을 차단하기 위해 귀마개를 쓴 채로 두꺼운 책을 저술했다―스펜서는 그의 사도들보다 더 흥미로운 사상가였다. 스펜서는 세계가 그가 예상하고 바랬던 최소 정부가 아니라 다양한 유형들의 국가주의를 향해 움직이고 있는 것을 보게될 만큼 충분히 오래 살았었다(1820년에 태어나서 1903년에 사망했다). 스펜서의 말년은 당혹스러운 우울한 기분에 휩싸여 지나갔다. 이런 거만하고 지루하게 반복적인 저작에 의거하여 판단할 때, 리들리가 현실주의적 주장이나 자기 비판을 위한 유사한 역량을 드러낼 것이라고 추측하기는 어렵다.

 

사회적 진화에 관한 이야기는 당대의 유행물들을 반영한다. 1930년대에 자본주의가 퇴각함에 따라 스펜서의 사도인 베아트리스 웹(Beatrice Webb)은 스탈린의 소비에트 연방을 사회적 진화의 다음 단계로 간주했다. 1970년대에 미합중국의 사회학자 대니얼 벨(Daniel Bell)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가 유사한 형태들의 탈산업적 관료 지배 체제를 향해 진화하고 있다고 확신했다. 1990년대에 프랜시스 후쿠야마(Francis Hukuyama)는 "민주주의적 자본주의"가 진화하여 "인간 정부의 최종 형태"가 될 것이라는 점에 대해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이런 예측들 모두가 사건들에 의해 전복되었다는 사실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사회적 진화는 반증 가능한 이론이 아니라 일련의 이데올로기들인데, 리들리의 경우에는 낡은 기계적 판본의 우파 자유지상주의이다. 리들리는 사회가 정부에 의해 하향식으로 조정될 수 있다는 관념을 버려야 한다고 말하는데, 예를 들면, 교육과 의료는 혁신의 과정 속에서 개선된 방법들이 출현하도록 사유화되어야 한다. 이런 반국가주의적 이데올로기와 관련된 몇 가지 친숙한 문제들이 존재한다. 한 가지 문제는 그것이 권고하는 전면적 사유화는 정부를 장악함으로써 시행될 수 있을 뿐이라는 점이다. 그래서 우리는 사회적 진화에 있어서 빠진 고리, 즉 권력으로 되돌아가게 된다.

 

더 근본적인 한 가지 어려움은 관념과 가치의 역할과 관련되어 있다. 왜 리들리의 자유지상주의를 수용해야 하는가? 그가 비난하는 하향식 통치의 이데올로기들도 꼭 마찬가지로 사회적 진화의 산물이다. 결국 모든 것은 진화의 산물이다, 그렇지 않은가? 이것은 가장 유해한 관념과 믿음들을 포함한다. 진화적 과정들이 계속해서 반유대주의―오늘날 정치적 스펙트럼 전체에 걸쳐서 자체 복제되는 엄청나게 적응적인 밈―를 만들어낸다면, 이런 유형의 인종차별주의는 "어떤 의미에서 막연히 진보적"인 것이어야만 하지 않겠는가?

 

사회적 진화에 의존하는 것은 위험한 과업일 수 있다. 리들리의 경력이 이 점을 예시한다. 제5대 리들리 백작으로서 이튼과 옥스퍼드에서 교육받았고, 보수당 상원 위원이고, 대중 과학 작가이고, <<이성적 낙관주의자(The Rational Optimist)>>(2010)의 저자이며 <<타임즈(Times)>>의 칼럼리스트인 그는 2007년의 금융 위기가 일어나기 직전 시기에 노던 락(Northern Rock) 은행의 의장이었는데(그의 부친도 그 은행의 의장을 역임했었다), 2007년에 일어난 100년 이상 동안의 영국 역사상 최초의 심각한 대량 인출 사태 이후에 그 은행은 파산했고 국유화되어야 했었다. 리들리는 그 사건이 "규제 개입"과 "하향식 간섭"의 결과였다고 주장하고자 할 때에만 그것을 언급한다. 금융 위기가 일어나기 전에 광범위한 은행 규제 완화가 시행되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것은 사건들에 대한 설명으로서 제기될 수 있다. 그런데 또한 그것은 사회적 진화라는 관념의 비정합성을 예시한다. 노던 락 은행을 파괴한 위기는 진화적 과정의 일부였는가? 만약 그렇다면, 리들리에 따르면 그 위기를 초래한 사악한 규제 정책들도 그런 과정의 일부이어야 한다. 또는 2007년 10월에 리들리가 은행 의장직에서 사임했을 때, 진화는 리들리라는 인물에서 구현되었는가?

 

그가 더 진지하고 성찰적인 저자였더라면, 리들리는 다윈의 첫 번째이자 가장 위대한 사도 TH 헉슬리(Huxley)가 1893년에 행한 강연이었던 "진화와 윤리(Evolution and Ethics)"를 얼마간 생각했었을 것이다. 헉슬리는 진화가 윤리적 중요한 것이라면 무엇이든 가르칠 수 있다는 관념의 허위를 폭로하는 데 관여했다

 

우주적 진화는 인간의 선한 경향과 악한 경향이 어떻게 발생하게 되었는지 가르쳐줄지도 모르지만, 그것 자체로는 왜 우리가 선으로 부르는 것이 악으로 부르는 것보다 바람직한 것인지에 대해 이전에 존재했었던 것보다 더 나은 어떤 이유도 제공할 수 없다 ... 우리 시대의 광신적인 개체주의는 우주적 본성의 비유를 사회에 적용하려고 시도한다 ... 사회의 윤리적 진보는 우주적 과정을 모방하는 것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하물며 그것을 회피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과 싸움을 벌이는 것에 의존한다는 점을 단연코 이해하자.

 

헉슬리의 목표는 진화에 관한 다윈의 이론이 이데올로기로 전환되는 것을 막는 것이었다. 그것은 고귀한 노력이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진화와 인간의 개선 사이의 혼동은 우리 문화에 묻어 들어가게 되었다. 리들리는 진화가 자체의 행로를 취하게 내버려 두기를 권고한다. 그런데 그럴싸한 문명화된 어떤 도덕도 진화적 과정들에 개입하는 것을 포함한다. 약자들을 보호하고 그들이 독립적이고 가치 있는 삶을 영위하도록 도움을 주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진화에 관한 어떤 이론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리들리와 그와 비슷하게 생각하는 많은 사람들은 사회의 진화는 피에 물든 생존 투쟁이 아니며, 감정 이입과 상호 부조도 있다고 대응할 것이다. 도덕은 지금까지 진화했고 여전히 진화하고 있다고 그들은 결코 지치지 않고 말한다. 그런데 백 년도 더 전에 헉슬리가 지적했듯이, "비도덕적 감성들도 그에 못지않게 진화했다. 자선가와 꼭 마찬가지로 도둑과 살인자도 자연을 좇는다". 사회적 진화로 서술될 수 있는 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야만주의의 세력들은 문명만큼이나 그것의 일부일 것이다.

 

<<만물의 진화>>가 어떤 가치를 지니고 있다면, 그 책이 과학을 벗어나면 사상의 역사에서는 진보―막연한 종류의 것이라도―가 거의 없다는 점을 예증한다는 것이다. 나쁜 관념들은 반증에 의해 패퇴되지 않으며, 그것들은 사라지지 않는다. 리들리의 책이 보여주듯이, 그것들은 재현될 뿐인데, 꽤 자주 점점 더 원시적이고 비정합적인 형태들로 재현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