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가지 토포스와 세 가지 규율

The three topoi and the three disciplines

 

―― 마시모 피글리우치(Massimo Pigliucci)

 

스토아주의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배우게 되는 최초의 것들 가운데 두 가지는 세 가지 토포스(즉, 논리학, 자연학 그리고 윤리학) 및 세 가지 규율(즉, 욕망, 행위 그리고 일치) 사이의 구별짓기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한, 고대에 그 두 집합은 명시적으로 연결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기도 할 것이지만, <<삶의 방식으로서의 철학(Philosophy as a Way of Life)>>이라는 탁월한 책에서 피에르 아도(Pierre Hadot)는 그것들(그리고 네 가지 미덕) 사이의 어느 특정한 유형의 관계를 옹호하는 탁월한 변론을 전개했다.

 

이 포스트 글에서 나는 그 쟁점을 재고하여 토포스 사이의 3분법을 고안한 제논이 어느 특정한 순서로 그것들을 가르친 까닭뿐 아니라, 세 가지 규율(초기 스토아주의에서 그것들은 거의 틀림없이 함축되었지만)을 명시적으로 도입한 것으로 간주되는 에픽테토스가 그것들 가운데 하나가 여타의 것들보다 명료한 우선성을 갖는다고 생각한 방식도 분명히 하고 싶다.

 

토포스, 즉 스토아주의적 철학 체계 전체의 근저에 놓여 있는 탐구 영역들에서 시작하자. 그것들은 "자연학"(즉, 현대 자연과학, 형이상학 그리고 신학), "논리학"(즉, 본격적인 현대 논리학, 수사학, 인식론 그리고 인지과학) 그리고 "윤리학"(즉, 자신의 삶을 최선으로 살아가는 방법에 관한 연구)이다. <<그리스 철학자 열전>>이라는 책에서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가 서술하듯이,

 

"스토아파 사람들은 철학에 관한 논술이 세 부분으로 이루어진다고 주장하고 있다. 즉 그 하나는 자연에 관한 것(피시콘), 하나는 윤리에 관한 것(에티콘), 또 하나는 언론에 관한 것(로기콘)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구분은 키디온의 제논이 <<언론(또는 이성, 로고스)에 대해서>>[라는 글 속에]서 최초로 행한 것[이다]."(429)

 

"그리고 그들 스토아파 가운데 일부 사람들의 주장에 따르면 그와 같은 어느 부문도 다른 부문에서 분리되어 있지 않고 서로 뒤섞여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은 이것들을 뒤섞인 것으로서 가르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그것들 사이에 순서를 두어서) 언론에 관한 학문을 최초에 두고, 자연학을 두 번째로, 그리고 윤리학을 세 번째로 두고 있다. <<언론에 대해서>>[라는 글 속에]서 그와 같이 말하고 있는 제논도 그 가운데 한 사람인데 크리시포스나 아리케데모스 그리고 에우드로모스도 그렇게 하고 있다."(429-30)

 

그래서 초기 스토아주의에 주요한 영향을 미친 두 철학자, 제논과 크리시포스는 독자적인 판본의 스토아주의적 교육과정에서 다음과 같은 순서를 사용했다.

 

논리학 > 자연학 > 윤리학

 

이것은 토포스 사이의 관계를 설명할 의도로 제시된 가장 공통적인 스토아주의적 은유들 가운데 하나, 즉 울타리가 쳐진 정원이라는 은유를 고려할 때 이해된다. 또 다시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

 

"더 나아가 기름진 밭에 비유해 언론에 관한 학문은 그 밭을 둘러싸고 있는 울타리, 윤리학은 과일, 자연학은 토양 내지는 과일나무로 치고 있다."(420)

 

논리학은 울타리이고, 그래서 학습되어야 할 첫 번째 토포스인데, 왜냐하면 그것은 나머지 두 기둥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건전한 추리를 수행할 도구들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자연학이 그 다음의 토포스인데, 왜냐하면 인간 본성에 대한 이해를 비롯하여 세계가 작동하는 방식에 대한 이해가, 스토아주의자들에 따르면, 자신의 삶을 가장 잘 살아가는 방법을 파악하는 데 필요하기 때문이다. 최선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목표이고, 그러므로 기름진 토양, 즉 자연학에 대한 적절한 이해에 의해 가능하게 되는 정원의 과일이다.

 

그 다음에 스토아파 학도에 의해 실천하게 되어 있는 에픽테토스의 세 가지 규율을 고찰하자. 잘 알려 있게도 에픽테토스는 이런 식으로 그것들을 서술한다.

 

"현명하고 선한 사람이 연습해야 하는 세 가지 일이 있다. 첫 번째 것은 욕망하는 것들과 혐오하는 것들에 관한 것인데, 사람은 자신이 욕망하는 것을 얻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 그리고 자신이 욕망하지 않는 것에 빠져버릴 수도 있다는 것과 관계가 있다. 두 번째 것은 어느 객체를 (향한) 운동 및 그것으로부터의 운동과 일반적으로 사람이 해야 하는 일을 행하는 것과 관계가 있는데, 사람은 명령, 이성에 따라 그리고 무심하지 않게 행동할 수도 있다는 것과 관계가 있다. 세 번째 것은 판단에 있어서 기만과 성급함으로부터의 자유에 관한 것이고, 그래서 일반적으로 그것은 일치와 관계가 있다." (<<담화록>>, III.2)

 

이것은 약간 해명할 필요가 있다. 욕망의 규율은 기본적으로 목적으로 삼기(즉, 욕망하기)에 적절한 것 또는 적절하지 않은 것을 말하며, 그리고 스토아주의자들에 따르면 이것은 유명한 통제의 이분법에 반영되어 있다. 우리에게 달려 있는 것들을 욕망하는 것은 적절하지만(왜냐하면 우리는 확실히 그것들을 획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전적으로) 달려 있지 않은 것들을 욕망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왜냐하면 그 안에 결과의 불확실성이 있고, 그래서 실망과 고통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달려 있는 것들은 우리의 판단과 행위이고, 우리에게 달려 있지 않은 것들은 꽤 많은 여타의 것들이 포함되는데, 무엇보다도 특히 건강, 부 그리고 명성이 포함된다.

 

두 번째 규율, 행위의 규율은 우리가 타자들에 대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에 관한 것이다. 여기서 스토아주의자들은 세계시민주의적이었고, 그래서 그들은 개체의 필요를 무시하지 않은 채 강하게 친사회적인 태도를 택했다는 점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마지막 규율, 일치의 규율은 우리의 "인상들", 즉 우리의 판단이 개입할 시간을 갖기 전에 세계가 우리에게 현시하는 원료를 재가하거나 재가하지 않을 수 있는 우리의 능력에 관한 것이다. 예를 들면, 갑작스러운 소음을 듣게 된다면 나는 갑작스러운 두려움을 반영하는 자동적인 반사 작용으로 뛰어오를 수 있다. 그런데 나의 "지배 역량"(마르쿠스가 말하곤 했듯이)에 의한 후속적인 검토는 그것이 어떤 관목들을 움직이는 바람이었을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그래서 나의 애초 인상(저쪽에 무언가가 존재하고, 나는 두려워할 필요가 있다!)은 정당하지 않은 것이었고 나는 그것으로부터 일치를 철회할 필요가 있다.

 

그 다음에 에픽테토스는 계속 진술한다.

 

"이런 주제들 가운데 주요하고 가장 긴급한 것은 정동과 관련된 것인데, 왜냐하면 정동은 다름이 아니라 사람이 욕망하는 것을 획득하지 못함으로써 또는 사람이 회피하고 싶은 것에 빠져버림으로써 산출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교란, 무질서, 불행, 역경, 슬픔, 한탄 그리고 선망을 일으키는 것이고, 사람들로 하여금 선망하게 하고 질투하게 하는 것이며, 그리고 이런 원인들 때문에 우리는 이성의 가르침을 경청하지도 못하게 된다. 두 번째 주제는 인간의 운명에 관한 것인데, 왜냐하면 나는 조각상처럼 정동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이 아니라, 경건한 사람으로서, 아들로서, 아버지로서, 시민으로서 자연적 관계들과 획득된 관계들을 유지해야 하기 때문이다. 세 번째 주제는 숙달하고 있는 사람들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것으로서 나머지 두 주제의 안정성에 관한 것인데, 그래서 꿈 속에서도 음미되지 않은 그 어떤 외양도 우리를 놀라게 하지도 않고 중독시키지도 않으며 우울하게 만들지도 않을 것이다."(<<담화록>>, III.2)

 

그래서 에픽테토스는 욕망의 규율―그리고 그것과 관련된 통제의 이분법―이 세 가지 규율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라는 점을 명확히 한다. 그런 이유 때문에 아리아누스(에픽테토스의 제자로서 그의 강의 노트를 <<담화록>>과 <<앵케이리디온>>으로 편집했다)는 유명하게도 엥케이리디온을 이렇게 시작한다.

 

"존재하는 것들 가운데 어떤 것들은 우리에게 달려 있는 것들이고 다른 어떤 것들은 우리에게 달려 있는 것들이 아니다." 그 다음에 각각의 범주에 속하는 것들의 목록이 이어진다. "우리에게 달려 있는 것들은 믿음, 충동, 욕구, 혐오, 한마디로 말해서 우리 자신이 행하는 그러한 모든 일이다. 반면에 우리에게 달려 있지 않은 것들은 육체, 소유물, 평판, 지위, 한마디로 말해서 우리 자신이 행하지 않는 그러한 모든 일이다."(13)

 

행위의 규율에 대해서는 에픽테토스가 스토아주의자들은 "조각상처럼 정동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이 아니라, 경건한 사람으로서, 아들로서, 아버지로서, 시민으로서 자연적 관계들과 획득된 관계들을 유지해야 한다"고 명시적으로 말하는 것을 주목할 가치가 있다. 무정한 스토아주의자들이라는 고정 관념에 대해서는 이쯤 해두자.

 

그리고 일치의 규율에 관해서 에픽테토스는, 제자들에게 진전을 이루기를 바라다면, 그래서 나머지 두 가지를 "확보하기"를 바란다면 일치의 규율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프로코프톤(prokopton)은 음미되지 않은 인상들에 놀라지 말아야 하는데, 이상적으로는 꿈 속에서도 놀라지 말아야 한다.

 

그러므로 세 가지 규율의 상대적인 등급은 이렇게 보일 것이다.

 

욕망 > 행위 > 일치

 

마지막으로 토포스와 규율 사이의 관계는 어떠한가? 여기서, 내가 전술했듯이, 원래의 명시적 표명은 피에르 아도에서 비롯되는 것이며, 그리고 <<스토아주의와 행복의 기예(Stoicism and the Art of Happiness)>>라는 돈 로버트슨(Don Robertson)의 책에서도 훌륭하게 이루어진다.

 

그 관념은 [서두에 제시한] 도표로 요약된다.

 

욕망의 규율은 세계가 작동하는 방식에 대한 우리의 이해, 즉 자연학에서 비롯되고, 그래서 그것은 용기라는 미덕(사물들이 존재하는 방식을 수용하는 것)과 자제라는 미덕(우리가 가질 수 없는 것을 욕망하지 않은 채 잘 살기 위해)에 의해 매개된다.

 

윤리학은 우리가 타자들과 관련하여 행동해야 하는 방식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행위의 규율은 윤리학이라는 토포스에서 비롯되고, 그래서 정의라는 미덕에 의해 매개된다.

 

마지막으로, 일치의 규율은 논리학과 관련되어 있는데, 왜냐하면 인상에 대한 일치를 승인하거나 부인하기 위해서는 이성을 사용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그것의 실천은 (실천적) 지혜, 즉 프로네시스라는 미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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