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각난 철학

Philosophy in Fragments


―― 레비 브라이언트(Levi Bryant)


아무튼 19세기에 시작된 철학의 전문화는 재앙이었던 것처럼 보인다. 나는 그런 것을 말할 때 자살적인 것이 있다고 짐작한다. 전문적 철학 같은 것이 있지 않았다면, 나는 직업이 없었을 것이다. 나는 그 점을 인정할 것이다. 그렇지만, 전문화가 초래한 것을 살펴볼 때, 나는 그것이 파국적인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전문화를 통해서 지금까지 철학의 의문들은 현실로부터 동떨어지고 추상화되었는데, 모든 종류의 매혹적인 철학적 난문과 수수께끼를 생성하지만 "그것이 왜 중요한가?"라는 일반적인 의문이 남게 된다. 특히 외부자에게 그렇다. 결국 도대체 이것이 어떤 차이를 만들어내는가? 중국인 방, 메리가 알게된 것 그리고 통 속의 뇌에 끝없이 쏟아 붓는 것이 얼마나 측은한가? 이것이 지금까지 우리가 환원되어버린 것인가? 전율? 물론 나는 이런저런 것이 왜 중요한지에 관한 이야기를 말할 수 있지만, 핵심은 그런 "중요성", 차이를 찾아내는 데에는 많은 작업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상실한 듯 보이는 것은 철학적 탐구의 전반적인 텔로스 또는 목적이다. 이것과 관련하여 나는 내가 일종의 퍼스적 실용주의자라고 생각한다. 나는 개념적 차이와 더 일반적으로 개념이 우리의 실천, 삶의 방식, 느낌의 방식, 탐구의 방식 또는 서로 관계를 맺는 방식에 어떤 종류의 차이를 만들어낼 것이라고 믿는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거의 흥미롭지 않고, 그래서 폐기될 것이다. 우리가 철학을 할 때 우리가 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 궁금하지만, 더 중요하게도, 도대체 우리는 철학을 행하고 있으며, 그리고 철학은 행할 가치가 있는 것인가? 철학이 결여하고 있는 듯 보이는 것은 그것의 활동을 이해할 수 있게 만들고 탐구를 정향하기 위한 나침반을 제공하는 전체적인 전망이다.


그것은 소박하고 낭만적이지만, "지혜와의 사랑 또는 우정"으로서의 철학의 원뜻이 바로 상실한 듯 보이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왜 지혜에 관해 신경을 써야 하는가? 나는 왜 이런 특별한 종류의 지식을 욕망해야 하는가? 왜 누군가가 지혜를 욕망해야 하는가? 나는 누구나 지혜를 욕망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왜냐하면 지혜는 사는 방법에 관한 지식이고, 좋은 생에 관한 지식이며, 그 목적을 달성하는 데 도움이 되는 방법에 관한 지식이기 때문이다. 지금 모든 사람이 나를 비웃고 있다. 더 이상 누가 지혜를 진지하게 간주하는가? 누가 좋은 생에 대한 어떤 그림이 있다고 믿는가? 내가 그러한지 모르겠다. 나는 이런 의문들과 관련된 매듭에 묶이게 된다. 그렇지만, 그런 의문과 더불어 철학은 개화하고 여타 의문들―존재론적 의문, 윤리학적 의문, 인식론적 의문, 기타 등등―도 나름대로 개화한다. 그것들은 좋은 생에 관한 의문과 좋은 생이 어떠할지 알고자 하는 욕망에서 개화한다. 존재론―존재의 본성에 대한 물음―과 형이상학이 도대체 어떤 가치가 있다면, 이것은 우리가 현명한 결정을 내리기 위해서는 세계 또는 실재의 참된 본성에 관한 것을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돈키호테가 되어 풍차를 공격하는 돈키호테처럼 우리 생을 보내고 싶지 않은데, 왜냐하면 그렇게 함으로써 끔찍한 결과가 초래되고 우리 생은 헛된 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영혼이 있는지 여부 또는 신은 존재하는지 여부 또는 나는 물리적 존재자일 뿐이지 여부는 중요하다. 이런 의문들에 대한 나의 대답에 의존하여 나는 전적으로 다른 방식으로 나의 생을 살 것이다. 나의 실천은 전적으로 다를 것이다. 세계가 과정인지 아니면 사물이나 형상들로 이루어져 있는지 여부는 중요하다. 이런 모든 대답이 나의 실천과 나의 생에 상이한 영향을 미칠 것이다.


내가 지식, 안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에 관한 의문들을 중시한다면, 이것은 의견에 의거한 행위가 그릇된 것일 수가 있고, 그래서 비극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예방 접종이 위험하고 자폐증을 유발한다는 의견을 갖고 있다. 그래서 나는 딸에게 예방 접종을 시키지 않는다. 그녀는 병에 걸려 죽거나 이전에 종식되었던 새로운 계통의 질병을 위한 온상이 된다. 신앙―즉 예증이 없는 확신―이라는 개념 그리고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의 유혈사태가 일어나게 되는데,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신의 의지를 알고 있다고 확신하지만, 아무도 그것을 여타의 사람들에게 증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유일한 사랑의 행위는 "진리"를 보는 것을 거부하는 사람들을 살해하는 것이다. 그러나 들뢰즈가 주장하듯이, 독사(doxa), 즉 의견에 맞서는 철학의 영원한 전쟁에서 가장 흥미로운 것은 진리의 단순한 오류, 단순한 실수가 아니라―그리고 나는 진리 대응설이 필수적인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에 속한다오히려 철학의 진짜 적은 사유에서 떠나지 않는 환상들―미신, 시뮬라크라의 유혹, 소외, 어리석음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데올로기―이다. 철학이 어떤 가치가 있을 수 있다면, 그것은 무엇보다도 좋은 생을 추구함좋은 생이 어떤 것으로 판명되는 간에에 있어서 거듭해서 우리를 자기파괴적이고 자기패배적인 행위로 이끌게 되는 사유에 내재하는 이런 환상들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것, 치료하는 것에 있다.


그 다음에 윤리학―현대 시대에 철학 분야들 가운데 가장 슬픈 분야가 되어버렸다―이라는 철학의 여왕이 있다. 윤리학은, 뭔가 하면, 좋은 생에 대한 그림을 제공하는 철학 분야이다. 그것은 제기되는 여타의 의문들과 수행되는 모든 비판의 목적이 되는 철학 분야이다. 오늘날 윤리학이라는 분과학문이 어떻게 되었는지―안락사는 도덕적인 것인지 여부, 낙태의 근거는 어디에 두어야 하는가, 선로 위 다섯 사람을 살해하게 될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열차의 선로를 한 사람을 살해할 선로로 바꾸는 행위가 정당한 것인지 여부 또는 무한한 타자를 향한 떨림과 책임에 대한 성찰에 관한 비속한 의문들을 다룬다에 대해 관심이 위축되고 경멸감을 느끼지 않기는 어렵다. 의무론자와 공리주의자자 사이의 논쟁과 규범에 관한 끝없는 이야기로 윤리학은 얼마나 슬픈, 진절머리나는 분과학문이 되어버렸는가! 이런 모든 의문과 성찰과 관련하여 외설적이고 대단히 추한 것, 심원한 문화적 부패와 가장 중요한 의문―번성하는 생은 어떠할지 그리고 그런 생에는 무엇이 포함되어야 하는가?―를 제기하지 못하는 무능력을 가리키는 것이 존재한다. 사이코패스와 연쇄 살인자 또는 지구에 쓰레기를 투척하고 엄청나게 잔인한 공장형 축산을 실시하는 자본가를 설득할 방법을 결정하는 것이 긴급한 윤리적 쟁점이라고 생각하는 마음은 얼마나 뒤틀린 것일까? 우리는 좋은 생에 관한 의문을 더 이상 상상조차 하지 못하지만, 주변 세계의 도처에서 공포, 잔인함 그리고 부정의를 볼 때 이루어지는 정치적 비판과 개입에 있어서 그런 의문은 우리 마음에서 떠너지 않는다. 그런데 요구되는 전부는 약간의 변증법적 부정, 약간의 변증법적 반전일 것인데, 그래서 우리가 비난하는 것을 우리가 긍정하는 것으로 변환시킨 다음에 그것을 우리가 창조하고 싶은 세계의 목표로 사용하는 것이다. 그런데 아무튼 철학은 그런 반전 능력을 상실해버렸고, 그래서 우리에게는 가능할 사유의 조각들만 남아 있는 듯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