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래의 글은 객체지향 존재론의 정치적 함의에 관해 레비 브라이언트(Levi Bryant)가 자신의 블로그에 올린 글에서 일부 옮겨 놓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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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치학은 필연적으로 관계의 문제를 다룬다. 정치적 개입의 장은 항상 상이한 존재자들 사이의 갈등이나 적대의 장이기 때문에 관계를 다루지 않는 정합적인 정치학은 전혀 있을 수 없다. [...] 관계들의 연결망을 이해하지 않고서 정치적 쟁점들을 이해하는 정합적인 방식이란 그야말로 없을 뿐이다.

 

이런 점에서, 객체지향 정치학에서 진정한 구분은 관계적 정치학과 비관계적 정치학 사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관계들이 외재적인 것으로 다루어지는지 아니면 내재적인 것으로 다루어지는지에 있다. 내재론자(internalist)는 관계들을 "유기적인" 것으로 여기며, 그래서 집합체 내부에서 어떤 특수한 부분의 위치도 자연적이고 다른 형태들의 사회적 조직이 가능하지 않는 방식으로 모든 존재자가 서로 내재적으로 관계를 맺고 있다. 외재론자(externalist)는 관계들을 외재적인 것으로 여기며, 그래서 존재자들의 자연적인 질서가 전혀 없고 집합체들이 다른 방식들로 조직될 수 있다. 루크레티우스, 스피노자, 흄, 마르크스, 푸코, 버틀러, 들뢰즈와 가타리 등과 같은 사상가들을 거론하든 말든, 역사적으로 외재론은 좌파 정치이론가들의 입장이었다. 특수한 사회적 질서의 조직이 우연적이고, 그래서 그것이 달리 될 수 있다는 점이 계속해서 예증된다. 모든 것이 관계들의 산물이라는 점을 예증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이런 관계들이 우연적이고 변화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기 위해 관계들의 분석에 항구적으로 집중한다. 어떤 억압적인 질서들이 산출되는 메커니즘들, 즉 관계적 과정들에 대하여 논쟁하고 변화시킬 수 있도록 그런 메커니즘들을 정확히 이해하는 것이 목표이다.

 

그런데, 좌파 사상과 우파 사상 사이의 논쟁은 그저 외재론과 내재론 사이의 논쟁이 아니다. 또한 그것은 정치적 조립체들에 어떤 존재자들 또는 단위들이 참여하는지에 대한 논쟁이다. 헤겔과 달리, 신자유주의자들은 관계들에 관한 한 외재론자이지만, 신자유주의자들을 좌파로 서술하는 것은 확실히 잘못일 것이다. 오히려, 좌파의 사유 형식과 신자유주의 우파의 사유 형식 사이의 논쟁은 사회적 조립체들을 구성하는 단위들("객체"를 가리키는 보고스트의 술어)과 더불어 이런 조립체들을 조직하는 메커니즘들에 대한 논쟁이다. 마거릿 대처가 서술하듯이, "사회란 존재하지 않는다. 개인들가족들만이 존재할 뿐이다." 신자유주의자들의 경우에, 사회적 조립체들을 구성하는 유일한 단위들은 개인들이고, 사회적 조립체들을 형성하는 메커니즘은 그들 자신의 합리적인 이익을 추구하는 개인들을 통해서 발생한다. 한 개인이 세상에서 성공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그가 게으르고 진취적 기상을 결여하고 있기 때문이거나, 또는 자신의 의지를 적절하게 행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처지에 대한 책임은 각 개인에게 있다. 요약하면, 신자유주의자들은 시장, 사회, 집단 등과 같은 대규모의 단위들 또는 객체들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개인 같은 소규모의 단위들에 열려 있는 기회들에서 어떤 역할을 수행하는 메커니즘으로서 기능하지 않는다는 테제를 신봉한다. 반면에, 좌파의 정치적 정향은 사회적인 것들을 구성하는 단위들에 관련하여 더 다원주의적인 경향이 있다. 개인 같은 단위들에 덧붙여, 그들은 사회, 시장, 언어, 집단, 도시 등과 같은 더 큰 규모의 존재자들의 현존을 위한 논변을 전개한다. 여기서 우리는 이런 단위들이 지배의 관계들 속에서 그리고 해방의 가능성의 형성 속에서 서로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에 특별히 주목한다. 달리 말해서, 이런 단위들은 서로를 제약하고 서로에게 능력을 부여하도록 다양한 방식으로 서로 얽혀 있다. 상이한 규모의 층위들에 있는 객체들 사이의 관계들을 생각할 수 있는 한 가지 방식은 은유적으로 유기체들이 음식물을 흡수하는 방식과 항체의 견지에서 살펴보는 것이다. 사회와 시장 같은 대규모의 단위들은 그것들 자체의 지속적인 자기생성 과정으로 스스로를 유지하기 위한 영양소로서, 무엇보다도, 개인들에 의존한다. 예를 들어, 자본주의 시장 같은 단위는, 엔트로피적으로 해체되어 사라지는 것을 피하며 매 순간 자체의 작동을 계속하기 위해서 내 소비뿐 아니라 내 노동과 그것이 생산하는 잉여에 의존한다. 이런 단위에 대해서 나는 한 개인으로서 특수한 방식으로 선택적으로 관련되어 있을 뿐인데, 여타의 내 특징들(그리고 특히 내 욕구, 욕망, 관심)은 비가시적인 것이 된다. 나는 이런 단위에 의해 내게 매우 파괴적일지도 모르는 방식으로 "소화"된다.

 

비슷하게, 더 큰 규모의 단위들이, 모든 객체들처럼, 다른 존재자들과 선택적으로만 관계를 맺는 한에 있어서, 그리고 그것들이, 유기체처럼, 관계를 맺는 여타의 존재자들을 그것들 자체의 내부의 특정한 기능들에 할당하고자 하는 한에 있어서, [...] 사회 체계 같은 더 큰 규모의 단위들은 그것들의 요소들 사이에서 기호학적으로 그리고 물질적으로 규약을 제정하여 어떤 요소들에게는 이런 위치를, 다른 원소들에게는 저런 위치를 할당한다. 인간들 같은 더 작은 규모의 요소들이 더 큰 규모의 어떤 객체의 요소로서 그들이 담당하는 역할로 환원될 수 없는 한에 있어서, 그들은 이런 역할들에 이의를 제기하곤 한다. 이 지점에서, 자가면역적 반응들이 더 큰 규모의 객체에서 출현하는데, 그것은 개인들에게 (그 단위를 위한) 각자의 "고유한" 역할을 할당하거나, 아니면 부분을 전적으로 파괴하거나 그냥 무시한다. 이것이, 예를 들면, 제도적인 인종차별주의, 성차별주의, 그리고 계급적 편견에서 작동하는 것인데, 더 큰 규모의 단위들은 사람들에게 각자의 인종, 성, 계급적 지위에 따라 특수한 역할을 할당하며, 사람들이 각자의 지위에 계속 남아 있도록 보장하기 위해 강한 제재를 가한다. 여기서 체계는 부분들 사이의 관계들의 패턴이 [...] 시간에 걸쳐 재생산되도록 보장하는 방식으로 구조화되어 있다. [...]

 

그럼에도, 좌파들 사이에서는, 다양한 상이한 단위들이 [...] 사회적 조립체들을 구성한다는 점에 대해서는 의견이 폭넓게 일치하는 반면에, 참으로 어떤 단위들이 이런 조립체들을 구성하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인간주의자들의 테제는, 사회적 조립체들이 다양한 상이한 규모의 층위들에 있는 단위들(개인, 제도, 시장, 사회, 도시 등)로 구성될 수 있지만, 그럼에도 유일하게 참된 사회적 및 정치적 존재자들은 (인간 행위자, 언어, 믿음, 이데올로기, 경제적 교환, 계약, 권력 등을 통해서) 인간들로 직접 구성된 존재자들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초점은 이런 종류들의 메커니즘에 집중되고, 정치적 참여는 대체로 다른 법률을 제정하고, 믿음을 변화시키고, 이데올로기를 비판하는 등의 실천이 된다(이것들은 모두, 틀림없이, 유익한 활동이라고 나는 믿는다). 반면에, 브뤼노 라투르, 제인 베닛, 이사벨 스땅제, 들뢰즈와 가타리 등은, 집합적 조립체들은 인간들과 인간 사회들뿐 아니라 기술, 미생물, 동물, 식물, 강 등과 같은 비인간들로도 구성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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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인간들을 포함하는 이런 더 폭넓은 정향의 요점―내가 공유하는―은 인간주의자들의 방법론들과 그들의 관심사(법률, 규범, 믿음, 이데올로기, 기표, 계약 등)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 참여, 개입, 그리고 분석의 장을 넓히는 것이다. 테제는 모든 사회적 및 정치적 문제가 믿음, 법률, 이데올로기 등의 문제는 아니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중세 시대 동안 기독교의 유일한 지배 형식으로서의 가톨릭교에서 [...] 종교개혁과 기독교들의 폭발로의 변화를 이해하려고 한다면, 우리는 믿음의 층위에서 이런 변환을 고무했을지도 모르는 많은 흥미로운 것들을 발견할 것이지만, 그럼에도 교회에 대한 신뢰를 손상시키는 데 있어서 흑사병의 역할을 부주의하게 무시할 것이다. 이런 미생물들은 뒤이은 조립체들을 형성하는 데 있어서 행위자들이었다. [...] 일단 우리의 사회 사상과 정치 사상에 비인간들을 포함하면, 우리는 사회적 조립체들이 왜 현 상태로 존재하는지에 대하여 더 미묘한 차이가 있는 이해(지도 제작)에 이를 뿐 아니라, 정치적 개입 수단도 확장한다. 알코올 중독자들이 중독되어 있을 때 그들이 음주를 그만두게 하기 위해 그들의 믿음을 폭로하는 것이 거의 의미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람들이 물질적 대체 수단들을 이용할 수 없을 때 그들이 더 지속가능한 방식으로 살도록 하기 위해 환경에 대한 그들의 믿음을 폭로하는 데에만 의존하는 것은 거의 의미가 없다. 사람들이 "끈적끈적한 물질적 연결망들" 또는 끌림의 체제들에 얽혀 있을 수 있다는 점을 인식하는 것이 이런 연결망들을 무화시키고(해체) 다른 물질적 대체 수단들을 제공하는(구성) 데 착수할 기회를 제공한다.

 

[...]

 

번역: 김효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