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과 객체(Art and Objects)


그레이엄 하먼(Graham Harman)


'형식론(Formalism)'은 많은 분야에서 자주 나타나는 낱말 중 하나인데, 그 낱말이 의미하는 바에 대한 명료하거나 합의된 감각은 거의 없지만 말이다. 그렇더라도, 형식론은 여전히 시각예술에서 부정적인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낱말인 한편으로, 문학 연구에서는 최근에 그 낱말을 소생시키고자 하는 잠정적인 노력이 있었다. 이 책에서 나는, 그 낱말과 시각예술 사이의 지속적인 관련성을 평가하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으로, 형식론을 더 정확히 규정하려고 시도했다.


내가 보기에, 형식론은 '자율성'이라는 용어와 밀접히 연결된 임마누엘 칸트의 철학과 관련지어 가장 잘 규정된다. 칸트는 자신의 윤리철학에서 '타율성'이라는 용어와 대비하여 '자율성'이라는 용어를 채택한다. 윤리학에서 자율성은, 무엇보다도, 윤리적 행위는 어떤 숨은 동기나 보상이나 그 행위의 결과를 목적으로 수행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 자체를 목적으로 수행되어야 함을 뜻한다. 윤리적 행위는 순수한 의무를 고려함으로써 그것 자체에 의해서만 촉발된다. 이런 이유로 인해 칸트는 자신의 윤리철학이 '형식론적' 특질을 갖는다고 언급하는데, 요컨대 칸트의 윤리철학은 주로 어떤 행위의 선하거나 악한 '내용'의 문제가 아니라 그 행위가 윤리적 고려에 의해서만 촉발되는지 여부의 문제다.


'형식론'과 '자율성'은 칸트의 예술론에서 명시적으로 언급되지 않더라도 그 이론의 핵심에 암묵적으로 놓여 있다. 아름다움이 개인적으로 마음에 드는 것과 구분될 뿐 아니라 유용한 것과도 구분되는(칸트가 하나의 예술형식으로서 건축을 낮게 평가하듯이) 한에 있어서 칸트의 미학은 형식론적이다. 아름다운 것은 그 자체로 아름다운 것이고, 게다가 충분히 발달한 취향을 갖춘 사람이라면 누구나 무엇이 아름다운 것인지에 대해서 의견이 일치해야 한다. 이런 식으로, 예술작품이나 여타의 것의 아름다움은 우리의 순수한 심미적 판단을 흔히 더럽히는 온갖 불순한 인간의 동기로부터 자율적이다. 더욱이, 그런 판단이 만인이 보편적으로 보유하는 초월적 능력에서 비롯되는 한에 있어서 그 판단은 아름다운 작품보다 오히려 우리와 관련되어 있다. 그러므로 작품과 인간 관객은 서로에게서 자율성을 갖게 된다.


객체지향 존재론(OOO)이 모든 존재자의 비관계적 특질에 관심이 있다는 점을 참작하면, 그것은 사회·정치적 요소나 역사적 요소, 또는 심리적 요소 같은 비미학적 고려에서 벗어난 아름다움의 자율성에 대한 칸트의 관심에 경의를 표할 수 있을 뿐이다. 이런 점에서 OOO는 헤겔주의적 영감이나 마르크스주의적 영감, 또는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영감을 받은 미학들보다 칸트의 형식론적 미학을 대단히 선호하는데, 그들 미학에서는 예술이 정신의 전 영역의 역동적인 상호작용에 속하기에 예술작품은 다양한 역사적 요소들과 명쾌하게 분리되기보다는 오히려 그 요소들을 반영한다. 그런데도, 칸트는 암묵적으로 자율성을 어떤 특정 유형의 자율성, 특히 인간 사유의 세계로부터의 자율성으로 읽는다. 다른 화학 원소들이 단일한 화합물로 결합하는 것, 또는 새들이 무리를 짓는 것은 아무 문제도 없지만, 인간과 예술작품을 단일한 단위체로 결합하는 것으로 여기는 태도는 칸트적 관점에서 바라보면 존재론적 재앙인 듯 보인다.


이 책은 클레멘트 그린버그(Clement Greenberg)와 마이클 프리드(Michael Fried)가 뛰어나게 표현한 모더니즘적 형식론이 칸트적 형식론의 좋은 면과 나쁜 면을 모두 취한다고 주장하는데, 그들이 '형식론'이라는 용어를 거부하는 사태는 그 용어에 대해서 이 책이 취한 정의와 다른 정의에 근거를 두고 있다. 칸트는 예술작품과 관찰자 사이의 분열을 창출하면서 관찰자에게 우호적이었던 반면에, 그린버그와 프리드는 이 관점을 뒤집으면서도 그 관점의 기본적인 이원론은 그대로 내버려둔다. 예를 들면, 프리드의 경우에, 예술작품은 그것을 보는 사람과 맺게 되는 어떤 종류의 연극적 관계를 통해서도 전복되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도, 프리드 자신의 예술사적 글은 자신의 예술비평의 이런 전제를 약화하는 경향이 있다. 프리드는 18세기 반연극적 예술의 디드로적 전통과 재빨리 동맹을 결성하지만, 쿠르베와 마네에 관한 그의 연구는 우리를 다른 방향으로 이끄는 '몰입성 연속체'(쿠르베)와 근본적 '대면성'(마네)을 선호하여 마침내 이 전통과 결별하게 됨을 인정한다.


이 논증에서 도출되는 결론은, 프리드와 반대로, 우리는 예술에 대한 연극적 구상을 긍정하면서도 예술에 대한 비관계적 구상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연극적인 것은 사실상 비관계적인 것이고, 그리하여 이 사실로 인해 우리는 프리드와 그린버그에게서 나타나는 관점보다 1960년대 이후 예술에 대한 더 긍정적인 관점을 취하는 입장에 처하게 된다. 더욱이, 이것은 OOO 자체의 존재론에 대한 함의도 지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