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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지금까지 생략되었던 것, 즉 공존 또는 함께 있음이라는 사실 자체가 어떻게 경험되는지를 설명하기 위해 한 마디 언급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천사가 바라보듯이, 나와 나무가 함께 있다는 노골적인 사실을 의미한다. 함께 있음은 주체와 객체의 함께 있음이다. 그리고 경험적 방법의 경우에 이것은 그 상황에서 그것들이 각자의 특성 속에 함께 속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앞의 항은 향유이고 뒤의 항은 응시이기 때문에, 그리고 그 관계는 항들을 관련시키기 때문에 다음과 같은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함께 있음은 어떻게 경험되는가? 그것은 능동형인가 수동형인가? 이제 천사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나는 내가 보는 말과 함께 있고, 말은 나와 함께 있으며, 우리 둘은 함께 있다. 그런데, 앎의 관계에서, 함께 있음이 어떻게 경험되는지 물을 때, 우리는 경험을 하는 존재, 즉 마음의 관점에서 그 물음을 묻는다. 그러므로 자체를 향유할 때 마음은 자체가 말과 함께 있음을 향유한다. 그것은 말이 자체, 즉 마음과 함께 있음을 응시하지 않는다. 내가 말을 본다고 내가 말할 때, 객체는 보이는 대로의 말이 아니라, 어떤 색깔들과 모양을 지닌 객체이다. 보이는 대로의 말 또는 보이는 말은 경험자 자신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그 문제를 논의하는 철학자의 관점에서 바라본 말에 대한 서술이다. 그러므로 내가 보는 것은 내가 나와 함께 있다고 여기는 말이 아니다. 그런데 말을 응시할 때 경험자인 나는 내가 말과 함께 있다는 사실을 경험하고 있다. 말이 나와 함께 있음은 내가 말과 함께 있는 것처럼 나에 의해 경험된다. 내가 말을 본다고 말함으로써 나는 그것을 표현한다. 말의 우리의 관점에 응한다고 추정할 수 있다면, 결국 그는 자신이 나와 함께 있는 것처럼, 즉 그가 나에 관해 파악하는 것과 함께 있는 것처럼 향유할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동일한 경험이 아닐 것이다. 그것은 말의 경험이지 나의 경험이 아니다. 사실상, 말이 나의 향유와 함께 있는 것처럼 내가 말을 응시한다고 내가 말하는 것은 언어적 변주일 뿐이고, 따라서 내가 나 자신이 말과 함께 있음을 향유한다는 진술의 반복일 뿐이다. 나는 그 관계를 두 번 셈하지 말하야 하고, 사실상 나는 그렇게 할 수도 없다. 나는, 이른바, 내 자신의 입장에서만 우리를 묶는 줄을 경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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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뮤얼 알렉산더(Samuel Alexander)의 1916-1918년 기포드 강연록 <<공간, 시간, 그리고 신성(Space, Time, and Deity)>>(1920)의 서론 부분(pp. 20-1)에서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