객체지향 철학

 

이십 세기 철학이 마지막 몇 달을 남겨두고 있을 때, 지난 백 년 동안의 이십 세기 철학에 대한 회고적 개관들이 기대했던 것보다 더 적게 이루어졌다. 이것이 널리 퍼진 방향 상실 때문인지 또는 멜로드라마를 피하려는 이해할 만한 소원 때문인지는 추측에 맡기겠다. 그러나 최소한 하나의 역사적 철학 모형이 정기적으로 공표되고 있다. 이것은 이십 세기의 위대한 철학적 성취는 "언어적 전환"에 놓여 있다는 견해다. 언어철학은 구식의 "의식철학"을 대체한 공로로 찬양받는다. 자신의 손가락들을 깨끗히 유지한 채 세계를 그냥 관찰하는 초연한 인간 주체 대신에, 이제 인간은 덜 자율적인 존재인 듯 보이는데, 그는 언어적 의미작용들과 역사적 투사물들의 연결망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가 없다.

 

이 모형의 일반적인 강조점들 가운데 하나는 그것이 분석철학과 대륙철학이라는 두 경쟁 계보 모두를 찬양할 채비가 되어 있다는 것이다. 분석철학은 프레게와 데이빗슨에 의해 이루어진 언어적 전환에 대한 기여들을 자랑할 수 있고, 대륙철학은 비슷한 이유로 소쉬르와 데리다를 자랑할 수 있다. 그 두 교파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통일에 더 가까이 다가섰다고 말한다. 회고해 보면, 이십 세기의 거대한 철학적 임무는 이론적 지식 모형을 해석적 모형으로 대체하는 일이었을 것이다. 절대적 지식에 대한 모든 소박한 신념은 끝났을 것이며, 그리고 그것과 함께 중립적으로 관찰될 수도 있는 세계 자체에 대한 모든 소박한 믿음도 끝났을 것이다. 해석이 시각을 대체한다.

 

그런데 이런 판본의 이십 세기 철학은 한 가지 두드러진 결함을 포함한다. 의식에서 언어로의 외관상 혁명적인 전환은 여전히 절대적으로 통솔하는 인간들을 철학의 중심에 남겨 둔다. 일어나는 전부는 현상학의 명쾌한 청결한 자아가 더 심란한 존재―자기 환경의 구조들을 완전히 초월할 수가 없는, 자신의 맥락에 의해 결정되는 표류자―로 대체된다는 것이다. 두 경우 모두에서 생기 없는 세계는 도외시되며 기껏해야 먼지나 자갈처럼 취급된다. 바위들이 나무와 충돌할 때, 불이 유리를 녹일 때, 우주선 때문에 양성자가 붕괴될 때, 우리는 이 모든 것을 오로지 물리학자들에게 맡겨두라고 요청받는다. 철학은 점차적으로 세계 자체와 관련을 맺어야 한다는 요구를 포기했다. 주체와 객체 사이의 위험한 도약에 고정된 채, 철학은 나무와 뿌리 또는 인대와 뼈를 분리시키는 간극에 관해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객체들의 영역에 관한 모든 언급을 몰수당한 채, 철학은 자기와 세계 사에의 단일한 간극의 주인으로 자부하는데, 여기서 철학은 결코 끝나지 않는 일련의 역설들, 비난들, 반론들, 당파적 집단들, 파문 선고들, 그리고 이른바 르네상스들로 대화한다.

 

그런데 이런 끊임없는 논변 아래에서는 실재가 요동치고 있다. 언어철학과 그것의 반동적인 적으로 여겨지는 자들이 모두 승리를 선언하는 동안에도 세계의 무대는 다양한 객체들로 가득차 있고, 그것들의 힘들이 발휘되고 있으며 대체로 사랑받지 못하고 있다. 적색 당구공이 녹색 당구공을 때린다. 눈송이들이 그것들을 잔인하게 파괴하는 빛 속에서 반짝이며, 파손된 잠수함들은 대양의 바닥에서 녹슨다. 밀가루가 제분기에서 나타나고 석회암 덩어리들이 지진에 의해 압착될 때, 미시건 숲에서 거대한 버섯들이 번성한다. 인간 철학자들이 세계에 대한 "접근"의 바로 그 가능성을 둘러싸고 서로 때려눕힐 때, 상어들은 참치를 때려눕히고 빙산들은 해안에 충돌한다.

 

어떤 티벳 우주론에서 수많은 동물들이 동물원에서 벗어났었던 것처럼, 이 모든 존재자들은 우주를 배회하고, 그것들이 접촉하는 모든 것에 축복과 벌을 가하며, 아무 흔적 없이 사라지거나 자체의 힘을 더 퍼뜨린다. 철학은 이런 객체들을 전혀 거명하지 않는 것에 여전히 만족하여 도대체 그것들을 가리킬 가능성의 조건의 조건의 조건에 관한 "더 일반적인" 논의에 자체를 한정할 것인가? 철학은 원숭이, 토네이도, 다이아몬드, 그리고 석유를 저 바깥에 놓여 있는 것이라는 단일한 표제어 아래 계속해서 뭉뚱거릴 것인가? 아니면 객체지향 철학, 즉 한 존재자의 다른 한 존재자로의 변환들을 서술하기 위한, 그것들이 인간들과 비인간들을 공히 유혹하거나 파괴하는 방식들을 개괄하기 위한 일종의 연금술의 어떤 가능성이 있을 것인가? 이 강연은 후자의 선택지를 승인한다.

 

무엇보다도, 무에서 출발할 필요가 없다. 이십 세기 철학의 미덕은 언어적 전환에 놓여 있다는 폭넓은 합의에 맞서, 나는 지난 백 년 동안의 더 중요하지만 더 은폐되어 있는 추세가 객체들에 관한 일반 이론을 향해 취해졌던 초기의 조치들, 최근까지 일종의 세련되지 않은 소크라테스 이전 방식으로만 취해졌던 조치들을 멈추는 데 놓여 있다고 나는 주장할 것이다. 여전히 살아 있고 번성하고 있는 관련 저자들은 스스로 말할 수 있기 때문에, 여기서 나는 한 쌍의 죽은 사상가들에 한정할 것이다. 내가 보기에, 지금 끝나고 있는 이십 세기의 가장 중요한 두 명의 체계적 철학자는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와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Alfred North Whitehead)인데, 하이데거는 대단히 오독되고, 화이트헤드는 대단히 적게 읽힌다. 둘 다의 저작들에서, 심각한 실수를 공유함에도 불구하고, 특정한 객체들의 운명에 관한 지식에 대한 갈구가 철학에 다시 나타나기 시작한다. 오늘 내 목적은 이런 일이 왜 일어나고 있는지 보여주는 것이며, 그리고 사물 자체의 핵심에서 펼쳐지는, 오래되고 그리고 새로운, 문제들 가운데 몇 가지를 간략히 묘사하는 것이다.

 

나는 방금 언급한 두 인물들 가운데 일반적으로 더 잘 알려진 하이데거부터 시작할 것이다. 하이데거의 철학 전체에 대한 열쇠가 <<존재와 시간>>의 유명한 도구 분석에 놓여 있다는 것이 내 주장이다. 명백히 이것은 이미 수십 차례 언급되었지만, 도구 분석을 진술하는 주석가들은 그것이 실용주의와 관련되어 있거나, 또는 기술에 관한 후기 하이데거의 성찰의 초기 판본을 예화한 것처럼 하이데거의 도구을 불가피하게 오독하고 있다. 확실히 비정통적인 견해인 내 자신의 견해는 도구 분석이 결코 형이상학이 없지 않는 일반적인 객체지향 철학에 못지 않는 철학을 묘사한다는 것이다. 또한 이 도구 분석은 여전히 현대철학의 정점을 나타내는 것처럼 내게 보인다. 그것을 넘어서지도 못했을 뿐 아니라, 제대로 활용하지도 못했다.

 

도구 분석 자체는 꽤 쉽게 요약될 수 있다. 하이데거는 존재자들의 일차적 실재는 나무나 금속 조각 또는 원자로서의 순전한 현존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원시적 검에서의 나무와 근대적 풍차에서의 나무는 전적으로 다른 실재의 적소를 차지하고, 완전히 다른 힘을 세계에 펼친다. 다리는 볼트와 가대들의 단순한 집합체가 아니라, 상당한 총체적인 지리적 힘, 즉 일원적 다리 효과이다. 그런데 이 통일된 다리 기계조차도 결코 절대적인 명백한 단위가 아니다. 그것도 역시 내가 낭만적인 밀애를 즐기러 가는 길에 건너는지 또는 사형장에 가는 죄수로서 건너는지에 따라 매우 다른 실재를 갖는다. 전자의 경우에 그것은 황홀감의 장치이지만, 후자의 경우에는 저주와 비참함을 향한 수단이다.

 

사물은 그것의 목적에 매우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으며, 그리고 이것은 계속 연계된 목적에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어서, 하이데거가 보기에, 엄밀한 의미에서 "하나의" 장치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실제로 한 존재자는 오로지 우연히 관계를 맺는 단단한 객체가 아니며, 오히려 그것을 둘러싸는 지시들과 할당들의 변화무쌍한 폭풍에 의해 결정된다. 화성에서 매우 작은 먼지 한 톨의 이동이, 아무리 작더라도, 객체들의 체계의 실재를 변화시킨다. 하이데거 자신의 용어를 도입하면, 존재자들은 일차적으로 눈 앞에 있는 것(vorhanden)이 아니라 손 안에 있는 것(zuhanden)이다.

 

장치가 대체로 장치일 때, 그것은 무언가가 조용히 의존하는 것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다. 내가 이 논문의 낱말들을 소리 높여 읽는 데 나의 의식 에너지 전부를 쏟을 때, 나는 당연히 여겨는 방대한 양의 부가적인 객체들에 무의식적으로 의존한다. 그것이 이 방의 인공 조명이든, 호흡할 수 있는 공기든, 이 건물의 구조적 얼개이든, 불량배들이 들어오지 못하게 막는 브뤼넬 대학의 안전 요원이든, 또는 심지어 내 자신의 신체 기관이든 간에 말이다. 대재난이 닥쳐 그것들 가운데 하나가 파괴되지 않는다면, 이런 객체들 모두는 잠깐 동안 여전히 충실하고 내가 수고할 필요가 없는 눈에 보이지 않는 기능을 수행한다. 하이데거의 경우에, 장치가 순수한 능력의 그늘진 지하에서 출현하여 자체의 윤곽을 드러내는 것은 일반적으로 장치가 어떤 식으로 부족할 때이다. 도시가 갑자기 전력을 상실하면, 내가 억제할 수 없게 기침하기 시작한다면, 나는 이전에 당연히 여기던 존재자들을 불쑥 떠올리게 된다. 내 환경 속으로 거대한 현전이 쇄도한다.

 

모든 곳에서, 세계는 이런 두 개의 반대 극, 즉 도구와 부러진 도구, 보이지 않는 작용과 돌출하는 현전으로 분리된다. 장치는 야누스 머리이다. 이것은 객체들이 문자 그대로 "부러지는" 비교적 드문 경우들에 대해서만 참인 것은 아니다. 하이데거의 경우에, 객체들이 지각되거나, 이론적 탐구에 의해 밝혀지거나, 또는 어떤 특정한 공간 영역에 그저 위치하게 될 때마다 동일한 역전이 발견된다. 이런 경우들 각각에서 작용 중인 장치의 가려진 실재는 세계라는 모든 것을 집어 삼키는 체계에서 분리되어 그것 자체"로서" 현시된다.

 

그런데 "도구"라는 바로 그 술어가 심각하게 오도될 수 있다. 그것은 대부분의 해석가들로 하여금 하이데거가 무엇보다도 한 제한된 종류의 객체에 관해 말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게 만들었다. 그 분석이 망치, 드릴, 열쇠, 그리고 창문에 대해서만 잘 들어맞으며, 덜 유용한 지위를 갖는 다른 객체들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사실상 하이데거의 의미에서 장치는 전체적이다. 존재자들은 도구 존재자들이다. 객체를 "도구 존재자"라고 일컫는 것은 그것이 목적에 대한 수단으로서 노골적으로 활용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객체의 실재의 조용한 실행과 그것의 명백한 표면의 반짝이는 아우라 사이의 보편적인 대결로 분열되어 있다고 말할 뿐이다. 요약하면, 도구는 "사용되지" 않는다. 도구는 존재한다. 다리를 철과 아스팔트의 단순한 덩어리에서 구출하는 것은 사람들이 그것이 편리하다고 알아챈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 어떤 덩어리도 우주에서 어떤 종류의 실재를 행사하여 어떤 두드러진 방식으로 존재의 풍경을 변화시킨다는 사실이다. 이 실재가 사람들에게 공교롭게도 유용하게 된다면, 훨씬 더 좋다. 그러나 자연적 산길들과 다른 장애물들은 인공 터널에 못지 않게 도구성을 갖는다. 손 안에 있음(Zuhandenheit)은 존재론적 술어이다.

 

자체의 수수께끼 같은 효험으로 물러서 있는 장치는 필연적으로 대부분 불가사의한 채로 남으며, 단호한 이론가와 수선하는 토목공학자로부터 똑같이 감추어져 있다. 도구 존재는 항상 그것에 의존하거나 묻어 들어가 있는 인간의 실천에 의해 밝혀질 수 없다. 도구 분석의 핵심은 그것이 계획과 투사물들에 대한 인간중심적인 분석으로 단단한 뉴턴주의적 덩어리들이라는 관념의 기반을 약화시킨다는 점이 아니다. 핵심은 도구 분석이 단단한 물질로서의 객체에 관한 서술과 기능적으로 유용한 것으로서의 객체에 관한 서술이 파생적인 것이라는 점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보다 더 근본적인 것은 모든 개별적 존재자들이 비롯되는 장치의 불가해한 제국이다. 이 제국은 놀라운 것들로 가득차 있다.

 

최근의 철학이 고대 철학에서 발견되는 일단의 관념들 전체의 반복을 특징지을 정도로 철학의 역사가 순환적 특징을 지니고 있는지에 대한 사변이 있다. 이 주장이 유지될 수 있는지 아닌지 간에, 하이데거를 "존재는 있는 것이고, 비존재는 없는 것이다"라는 유명한 주문을 남긴 파르메니데스에 견줄 충분한 이유가 있다. 자신이 매우 숭배하는 그리스 초기의 이 사상가와 마찬가지로, 하이데거도 객체의 실행적 실재와 그것의 드러나는 표면 사이의 차이를 더 구체적으로 전개할 수 없는 채로 두려울 정도로 단순한 이원론을 반복하는 것에 갇혀 있는 듯 보인다. 시간이 더 주어진다면, 모든 구체적인 화제에 관해 하이데거가 그 유명한 은폐와 탈은폐의 모호한 드라마 외에 더 제시할 것이 없다는 점을 쉽게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하이데거는 현대의 파르메니데스이다.

 

최소한 얼마간 구체적이기 위해, 그의 유명한 시간론은 시간과 전혀 아무 관계도 없다는 점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이 낱말은 그의 저작 전체에 걸쳐 발견되는 단일한 반복적인 이원성을 가리키기 위한 많은 문학적 상징들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망치에 대한 그의 "시간적" 분석에서 나타나는 전부는 망치가 실제 효과의 수행(이른바 "과거")이자 세계의 특정한 투사에 연루된 인간에 대한 그것의 의미에 의해 결정되는 별개의 실재(이른바 "미래")로 간주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이런 두 순간의 모호한 공존이 하이데거의 "현존"을 제시한다. 끝! 이것이 마법사가 시간을 영원히 그것의 궤도에 동결할 수 있을 때조차도 유효할 이른바 하이데거의 시간론이다. 하이데거가 기술, 인간의 기분, 예술작품, 동물 유기체, 또는 사실상 (여태까지 출판된) 17,000쪽에 이르는 오십여섯 권에서 구체적인 화제로 여겨지는 그 어떤 것에 관해서 말하고 있다고 주장할 때 동일한 단조로운 분석이 일어난다. 이 점은 널리 인식되고 있지 않지만, 그것은 연속으로 몇 시간 동안 하이데거를 읽어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친숙한 불쾌한 뒷맛의 주요한 원천들 가운데 하나이다.

 

주요 주제로 돌아가면, 하이데거의 사유에는 두 가지 존재 양식―"손 안에 있음"과 "눈 앞에 있음"으로 알려진 존재 양식들―사이의 보편적인 대립이 존재한다. 쉬운 조치는 이 대립을 전통적인 방식으로 첫 번째 존재 양식은 "객체"의 권역에 속하고, 두 번째 존재 양식은 "주체"의 권역에 속하는 것처럼 읽는 것일 것이다. 도구는 생기 없는 인과관계의 노골적인 힘과 동등한 듯 보일것이고, "부러진" 도구는 즉각적인 환경을 초월함으로써 있는 그대로의 환경을 넘어가서 그것에 관해 비판적으로 성찰할 수 있는 인간의 지각 또는 인간의 능력과 동등한 듯 보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하이데거 자신을 분노하게 하거나 냉정하게 거부하게 만들 몇 가지 진술을 행함으로써 이 틀에서 즉시 벗어나야 한다. 그것들 가운데 하나는 이렇다. 도구와 부러진 도구 사이의 이원론은 사실상 인간들이 전혀 필요하지 않으며, 생기 없는 존재자들만으로 가득찬 세계에서 완벽하게 유효할 것이다. 어떤 사람이 유명한 한 쌍의 당구공을 대면한다고 가정하자. 하이데거의 경우에, 이 공들이 경기자가 그것들에 관련하여 대면하는 것으로 환원될 수 없다는 점은 이미 이해되었다. 그것들의 가장 깊은 실재의 수행으로 물러서 있는 그것들은 관찰자에 의해 부분적으로 대상화되거나 탈은폐될 수 있을 뿐이다. 이것은 좋다. 문제는, 인간들은 여전히 지각되지 않은 깊이를 지닌 세계를 직면하지만, 생기 없는 객체들은 가장 미약한 접촉에서도 서로의 실재를 망라하는 것처럼, 충돌하는 두 공도 서로를 대상화한다고 가정하지 않는다는 점에 놓여 있다. 일 번 공은 반짝이고 만지면 뜨거울 수도 있을 것이다. 이 번 공은 물론 이런 성질들에 전적으로 무감각할 것이다. 그런데 반짝이는 공의 표면을 미끌어져서 은하로 굴절되는 광선에 대해 반짝임은 어쨌든 존재한다. 그리고 그 공의 열기는 그것에 접촉했을 때 순식간에 녹는 떨여져 나온 얼음 조각에 대해 압도적이다. 다시 말해서, 생기 없는 객체들도 "해석학적 순환" 같은 것에 사로잡혀 있다. 그 어떤 객체도 다른 한 객체로부터 모든 즙을 결코 흡수할 수 없다. 그렇다면, 인간 지각과 순전한 물리적 인과관계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는가? 물론 있다. 그러나 하이데거의 존재론은 그것을 찾아낼 곳이 아니다. 자신이 오직 인간 현존재에 대한 설명으로 시작한다는 지지할 수 없는 하이데거의 믿음을 고려하면, 실재적 사물과 그것이 다른 사물들에 의해 대면되는 방식 사이의 반복되는 그의 이원성은 그가 원하는 것보다 훨씬 더 포괄적인 것으로 판명된다.

 

하이데거에 대해 매우 많이 언급했다. 이 강연에 할당된 시간이 끝나가고 있기 때문에 화이트헤드는 피상적으로 다루어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보상의 방식으로, 앞서 말한 하이데거에 대한 해석은 대체로 화이트헤드적 해석이라는 점을 강조할 수 있을 것이다. 하이데거는 자신의 도구 해석을 인간 존재와 그것의 위험들의 권역에 한정하려고 의도하며, 그리고 나는 그것을 객체들 일반에 적용하기 위해 하이데거의 의도를 위배하여야 했던 반면에, 화이트헤드는 공개적으로 생기 없는 실재를 포용한다. 우주에 관한 모나드적 이론에 대한 가장 최근의 옹호자로서 그는 막대나 한 올의 머리카락의 내면적 삶을 가리키는 데 "사유" 또는 "느낌" 같은 낱말들을 활용하는 것에 대해 결코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그렇지 않다면, 하이데거에서 발견되는 것과 동일한 이원론이 화이트헤드에게도 존재한다. 하이데거는 그것이 대상화되는 한에 있어서 눈 앞에 있는 것을 사물로 일컫는 반면에, 화이트헤드는 더 플라톤적인 판본의 비슷한 개념인 "영원한 대상(eternal object)"을 사용한다. 그 두 술어의 그 어떤 직접적인 동일시에 대해서도 반대할 사람이 있을 정도로 충분히 미묘한 차이점들이 그 둘 사이에 있다. 그 점을 논증할 시간이 부족하다는 점을 고려하여 나는 그냥 그것을 주장할 것이지만, 거의 연결되지 않는 이 두 존재론자들 사이의 훨씬 더 강력한 연결을 주변적 증거로서 인용할 것이다. 나는 개별적 개체들이 아니라 존재자들의 연결망에 항상 철학적 수위성을 부여하는 그들의 명백한 경향을 가리킨다. 하이데거가 "하나의" 장치 같은 것은 궁극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강하게 주장할 때, 우리가 모든 현실적 존재자들을 철저히 정의하는 단일한 합생(concrescence)이라는 화이트헤드의 학설의 메아리를 듣는 것은 불가피하다. 두 경우 모두에서, 객체와 관련된 그 어느 것도 객체들의 전체 체계로부터 유보되어 있지 않다. 각 순간에 모든 존재자는 전적으로 전개된다.

 

이 학설의 결과, 또는 아마도 그것의 원인은 영속적인 고전적 실체들의 가능성에 대한 화이더헤드와 하이데거 둘 다의 편집증에 가까운 집착이다. 엄숙한 하이데거는 지속 가능한 물질이라는 관념을 격하시키는 반면에, 더 훌륭한 기질의 화이트헤드는 시간과 공간에서 모험을 겪을 수 있는 실체에 관한 그 어떤 개념도 가시적으로 비웃을 뿐이다. 이 인물들 각자의 경우에, 가장 경미한 우발적 사건이나 가장 변덕이 심한 인간 행위도 전체 우주를 변화시킬 수 있는 놀라운 능력이 있다. 가장 사소한 사건이 모든 객체들을 포함하는 전체 관계적 체계를 바꾼다. 영혼의 불멸에 관한 바로 그 의문에 대한 화이트헤드의 부정적 태도―종교적인 사람들 가운데 드문―를 주목하자. 결국, 엄격한 의미에서 영혼은 한 순간도 지속하지 못할 때, 왜 이것에 관해 걱정하는가? 개체들과 전체 사이의 알맞은 균형을 취한다는 그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화이트헤드의 작업에는 개체들에 대한 대단히 미약한 감각이 존재한다. 객체는 전체 합생의 어떤 영역에 대한 속어에 지나지 않게 된다. 그것은 여기 그리고 지금 세계 체계에서 표현되지 않을 그 어떤 것도 박탈당하며, 모든 갑옷, 모든 방화벽, 모든 사생활을 박탈당한다. 요약하면, 그것은 무한히 상호연결된 제국으로 증발된다.

 

하나의 유령이 이십 세기의 이 학설에 떠돌고 있다. 실체에 관한 고전적 이론들이라는 유령. 라이프니츠의 경우처럼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우에도, 세계를 조사하여 실체들과 비실체들을 구분하는 것이 최소한 원칙적으로 가능하다. 실체라는 타이틀은 어떤 존재자들에게 부여되지만 더 많은 존재자들에게는 부여되지 않는 보상이다. 이것은 라이프니츠가 아놀드와 주고 받은 때때로 신랄한 서신에서 가장 흥미로운 형식으로 일어난다. 라이프니츠는 우리에게 두 개의 다이아몬드를 상상하라고 요청한다. 하나는 듀크 대공에 속하는 것이고, 나머지 다른 하나는 모굴 대왕에 속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 다이아몬드들에 관해 한 쌍으로 말할 수 있지만, 이 쌍은 "하나의 이유 있는 사물(thing of reason)"에 지나지 않는다. 그 두 다이아몬드를 더 가까이 밀착시킴으로써 그것들이 단일한 실체로 변환되지 않을 것인데, 그것들이 접착되더라도 말이다. 왜냐하면 접착된 두 다이아몬드가 실체라면, 한 무리의 새들도 실체일 것이고, 손을 잡고 원을 그리는 사람들도 실체일 것이라고 라이프니츠는 말한다. 명백히 그는 이 주장을 귀류법에 의한 증명이라고 간주한다. 그런데 우리는, 하이데거와 화이트헤드의 경우에, 손을 잡고 원을 그리는 사람들이 가장 단단한 다이아몬드나 가장 순수한 영혼과 꼭 마찬가지로 실재적인 통일체일 것이라는 점만 떠올릴 필요가 있다. 그들의 경우에, 시간적 영속은 결코 실재에 대한 타당한 기준이 아니다.

 

이 이십 세기 사상가들의 공통 오류로 지정되어야 하는 것은 세계를 변화하는 관계들의 체계에 불과한 것으로 환원시키는 그들의 공통적 경향이다. 한 가지 간단한 사유 실험이 그들의 입장이 수반하는 난점들의 일부를 보여줄 것이다. 플루토늄 한 덩어리가 근처 어디에도 생물체가 존재하지 않는 사막에 버려져서 밑 바닥의 모래를 누르고, 빛을 먼 공간에 굴절시킨다고 하자. 가장 넓은 하이데거적 의미에서 이 인공 금속은 손 안에 있는 것이다. 그것은 그저 향후에 우연히 용도를 갖는 한 덩어리의 원자들이 아니라, 일차적으로 세계에서 수많은 다른 행위들을 수행하지 않는 한편, 어떤 행위를 수행하는 특정한 행위자이다. 그런데 현재 그 플루토늄을 둘러싸고 있는 모래와 죽은 잡초들이 그것의 치명적인 방사성의 깊이를 알리지 못하는 반면에, 과거에 존재했던 그 어떤 생물체들도 수 분 안에 죽었을 것이다. 요약하면, 이 기묘한 물질에는 현재 우연히 얽혀 있는 결합과 연합들에 의해 결코 망라되지 않는 부가적 실재가 있다. 이 실재는 표현되지 않았고, 항상 그렇게 남을 것이다.

 

이 곤경에서 벗어나는 일반적인 쉬운 방법은 어떤 동물들의 도착에 앞서 방사성의 상태를 설명하는 "잠재태"에 호소하는 것이다. 그 플로토늄은 "현실적으로" 치명적인 것이 아니라, 올바른 환경이 주어진다면 잠재적으로 치명적이라고 말할 것이다. 이런 접근방식(그리고 그것의 뛰어난 고전적 계보를 고려하면, 나는 얇은 얼음 위에 있는 듯 보일 것이라고 깨닫는다)과 관련된 약점은 잠재태라는 주제가 치명적인 성질의 현실태가 무엇인지에 관한 어려운 의문을 회피하는 비열한 방식을 허용한다는 점이다. 잠재성의 견지에서 성질에 관해 말하는 것은 이미 외부에서 그것에 관해 말하는 것, 즉 그것의 존재론적 지위를 밝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대상화하는 것이다. 여기서 "치명적인" 것의 잠재태는 무엇인가? 또는 다시 말해서, 이 경우에 "잠재적으로" 치명적인 것이라는 것이 그야말로 무엇인가? 원자들? 또는 훨씬 더 기묘한 것?

 

1. 명백히, 잠재적으로 치명적인 것은 그것이 현재 관계들의 상태, 즉 그것이 모래와 빛과 죽은 잡초들과 맺고 있는 관계들의 상태에 놓인 금속일 수가 없다. 정의상 일단 그것에 새로운 요소들을 더하게 되면 이 관계들의 체계는 더 이상 그것 자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화이트헤드의 술어를 사용하면, "플루토늄과 햇빛"은 "플로토늄과 햇빛과 죽어가고 있는 고양이"와 동일한 합생이 아니다.

 

2. 상식적인 믿음은 여기서 잠재태는 플로토늄 원자들의 물리적 덩어리, 즉 많은 잠재적 관계들을 지지할 수 있는 영속적인 기체라는 점일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하이데거/화이트헤드의 획기적인 업적에 조금이나마 공감한다면, 이것은 유지될 수 없다. 일차적 실재는 플루토늄 사물과 모래 사물과 고양이 사물이 아니라, 오히려 이것들 각각의 실재가 나머지 것들에 의해 정의되는 전체 체계이다.

 

이 두 입장은 서로 충돌한다. 플루토늄의 현실태는 현재의 전체 세계 상태에서도 발견될 수 없고, 영속적인 초우라늄 물질의 별개의 덩어리에서도 발견될 수 없다. 플루토늄으로 알려진 객체는 물질적이지도 않고 관계적이지도 않는데, 이것은 여전히 결정되어야 할 의미에서 그것이 비물질적이기도 하고 실체적이기도 하다는 점을 의미한다.

 

―― 그레이엄 하만(Graham Harman), <<사변적 실재론을 향하여(Towards Speculative Realism)>>(2010), pp. 93-1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