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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종말 담론의 형식을 이어 받은 세속 신화는 선善이 최종적으로 승리한다는 희망을 재생산한다. 그러므로 신념의 폭력성을 누그러뜨리려면 먼저 이러한 신화에 의문을 품어야 한다. 세속 사상에서 과학은 이해하고 통제하려는 인간 욕구에 부합하는 상징 체계라기보다는 지식의 보고寶庫이자 계시의 도구로 이해되었다. 탈근대 철학자들은 과학을 여러 신념 체계 중 하나로 치부하는데, 이는 논의할 가치조차 없는 어리석은 생각이다. 인간의 힘이 증대된 사실이 입증하듯이 과학 지식의 유용성은 외면할 수 없는 사실이다. 과학은 세계에 대한 믿을 만한 신념을 형성하는 도구고 종교 또한 그렇다. 단 과학과 종교는 목적하는 바가 다를 뿐이다. 이상적인 과학 탐구의 목적은 모든 것을 아우르는 이론 속에서 인간의 신념들이 세계를 반영하게 되는 종착점을 찾는 것일 수 있다. 그리고 (그것 또한 환상이더라도) 과학이라는 테두리 안에서는 이러한 이상이 유용할 수 있다. 그러나 종교들이 굳이 합일을 지향할 필요가 있을까? 일상 생활에는 진정한 신념이 유용할 수 있지만 영혼의 삶에는 의심이 더 중요하다. 종교는 지식이 아니라 알 수 없는 것과 더불어 살아가는 삶의 방식이다.

 

과학과 종교의 충돌은 이 두 실체를 신념에 관한 것으로 오해하기 때문에 발생한다.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일부 분파에서만 신념이 종교의 핵심에 자리 잡았을 뿐 다른 종교 전통은 교리 문답서보다는 신비를 수용하는 일에 관심을 갖는다. 과학과 종교는 인간을 서로 다른 방향으로 이끌어 가지만 모두 인간 욕구에 부합한다. 현대 세계에서 과학의 권위는 스스로 부여한 힘에서 나온다. 그렇기 때문에 근본주의자들은 천지창조론을 과학인 양 묘사하는 만화를 그려 자신의 주장을 문자적 진리인 양 꾸며내는 것이다. 그러나 사회적 다윈주의, 변증법적 유물론, 사회가 근대화될수록 더 자유로워지거나 평화로워진다는 이론도 천지창조론만큼 우스꽝스럽다. 이러한 세속적 신조는 정교하게 포장되어 합리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 어떤 전통적인 신념보다 더 비합리적이다.

 

오늘날 가장 시급한 과제는 종교가 환원될 수 없는 실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 무엇보다 종교는 [...] 어떤 사회적 변화로도 제거할 수 없는 인간의 욕구를 표현한다. 거기에는 해결할 수 없는 일을 받아들이고 삶의 우연 속에서 의미를 찾으려는 욕구가 포함된다. 인간은 성적 욕구, 쾌락의 욕구, 폭력의 욕구를 버릴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종교도 버릴 수 없다.

 

종교가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라면 종교를 개인적 삶의 하부에 존재하는 것으로 치부하거나 억압해서는 안 된다. [...] 근대 후기 사회는 다양한 세계관을 품는다. 인간의 삶의 가치, 성적 취향, 인간이 아닌 동물의 권리나 자연 환경의 가치 등에 대한 합의도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 근대 후기 사회는 세속적 단일 문화로 통일된 사회가 아니라 다양한 가치가 뒤섞인 사회가 되었고 균일하지 않은 근대 후기 사회가 도덕적으로 균일한 사회가 될 전망도 희박하다. 과거와 마찬가지로 앞으로도 권위주의 국가와 자유주의 공화국, 신권神權 민주주의와 세속적 독재, 제국, 도시국가 등 다양한 형태의 체제가 공존할 것이다. 전 세계가 단 하나의 정부나 경제체제를 받아들이는 일은 없을 것이고 모든 인류가 단 하나의 문명을 받아들이는 일도 없을 것이다.

 

이제 우리는 종교적 다양성을 수용해야 하고 세속적 단일체를 구축하려는 노력을 포기해야 한다. [...] 정부는 종교와 문명이 공존할 수 있는 틀을 짜고 강화해야 한다. 그 틀은 모든 사회에 동일할 수 없으며 영원할 수도 없지만 적어도 진리가 아니라 평화를 추구하는 관용을 구현할 것이다. 그러나 관용의 목적이 진리라면 그 틀조차 조화를 추구하는 전략으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그보다는 차라리 조화에 이를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편이 나을 것이고 더 나은 것은 조화되기를 포기하고 인간의 다양한 경험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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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존 그레이(John Gray), <<추악한 동맹(Black Mass)>>(추선영 옮김, 이후, 2011), pp. 29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