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세 시대에 죽는 법을 배우기

Learning How to Die in the Anthropocene

 

―― 로이 스크랜턴(Roy Scranton)

 

I.

2003년 침공 후에 이라크로 차를 모는 것은 미래로 차를 모는 것처럼 느껴졌다. 우리는 미군 검문소들과 불타버린 탱크들을 지나 푸른 새벽에 바그다드가 지옥의 광경처럼 떠오르기 시작할 때까지 하루 종일 후송했다. 불길이 정유탑들의 꼭대기에서 시퍼렇게 멍이 든 하늘을 태웠고, 거대한 기념물들이 튀어 나와 지평선에 기대어 있었으며, 파괴된 고가도로들이 폐허가 된 교외, 폭격당한 공장, 그리고 오래된 좁은 도로들 위로 갑자기 내려앉았다.

 

문명들이 재난을 향해 맹목적으로 행진해온 까닭은 인간들이 내일도 오늘과 거의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믿도록 배선되어 있기 때문이다.

 

"충격과 공포"로 미군은 인구 육백 만의 도시―휴스턴이나 워싱턴과 크기가 거의 같은 도시―에 세계의 종말을 풀어놓았었다. 하부구조는 박살났다. 수도, 전력, 교통, 시장과 안전은 혼란과 현지 지배 상태에 빠졌다. 그 도시의 세속적인 중산층은 갱단, 모리배, 근본주의자, 그리고 병사들 사이에서 갈취당하여 사라졌다. 정부는 추락하고 있었고, 벽은 올라가고 있었고, 종족은 구분되고 있었으며, 야만적인 위계 체계들은 잔인하게 확립되고 있었다.

 

나는 미합중국 육군 사병이었다. 이 기묘한 불안정한 세계가 나의 새로운 집이었다. 만약 내가 살아남는다면 말이다.

 

이 년 육 개월 후에 오클라호마 주 포트 실(Fort Sill)에서 다시 안전하고 느긋한 상태에서 나는 그 세계에서 빠져 나왔다고 생각했다. 그때 나는 텔레비전으로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뉴올리언스를 강타하는 장면을 시청하고 있었다. 이번에는 날씨가 충격과 공포를 초래했지만, 나는 바그다드에서 목격했던 것과 동일한 혼돈과 도시 붕괴, 동일한 계획 실패, 그리고 동일한 혼란 정세를 목격했다. 82 공수사단이 진입하여 전략적 지점들을 장악했고, 그래서 이제 사실상 군법 아래 거리들을 순찰했다. 내 부대는 소요 통제 작전에 대비하여 경계 상태에 들어갔다. 내가 바그다드에서 목격했었던 암울한 미래가 모국에 도래하고 있었다. 테러 행위도 아니고, 대량살상무기도 아니라, 하부구조가 파괴된, 자체의 체계에 가해진 충격에서 회복될 수 없는 붕괴 중인 문명.

 

그리고 허리케인 샌디가 강타한 지 일 년 이상 동안 여전히 복구가 진행 중이고 많은 비판자들이 동부 해안 지역은 작년 11월만큼이나 거대한 날씨 사건에 대비하고 있지 않다고 주장하고 있는 오늘, 미래가 사라지지 않고 있다는 점은 명백하다.

 

올해 3월, 미합중국 태평양사령관 새뮤얼 J. 로클리어 3세(Samuel J. Locklear III) 장군은 메사추세츠 주 케임브리지의 안보 및 외교 정책 전문가들에게 기후변화가 미합중국이 직면한 가장 큰 위협―테러리즘, 중국 해커들, 그리고 북한 핵미사일보다 더 위험한―이라고 말했다. 기온 상승, 해수면 상승, 그리고 급진적인 불안정화로 인한 격변이 "일어날 가능성이 가장 높은 것일 것이고... 안보 환경을 파괴할 가능성이 가장 높을 것이며, 우리가 흔히 논의하는 여타 시나리오들보다 더 가능성이 높을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로클리어는 혼자가 아니다. 미합중국 국가안보보좌관 톰 도닐런(Tom Donilon)은 4월에 컬럼비아 대학의 새로 설립된 국제에너지정책센터에서 연설하면서 거의 같은 것을 말했다. 미합중국 국가정보국장 제임스 클래퍼(James Clapper)는 3월에 상원에서 이렇게 말했다. "극단적인 날씨 사건들(홍수, 가뭄, 혹서)은 점점 더 식량 시장과 에너지 시장을 마비시킬 것이고, 그래서 국가를 더 취약하게 만들고, 사람들의 이주를 강요하며, 소요, 시민불복종, 그리고 파괴 행위를 촉발할 것입니다."

 

민간 부문의 경우에, 세계은행의 최근 보고서 "열을 낮추기: 기후 위기, 지역적 영향, 그리고 회복력을 위한 변론(Turn Down the Heat: Climate Extremes, Regional Impacts, and the Case for Resilience)"은 지구온난화의 효과에 대한 무서운 예상을 제시하는데, 현재 기후학자들은 지구 기온이 한 세대 내에 섭씨 2도 상승할 것이고 90년 내에 섭씨 4도 상승할 것이라고 예측한다. 하와이 대학 연구자들의 예상에 따르면 우리는 일찌기 2047년에 "역사적으로 전례가 없는" 기후를 다루게 된다. 전에 미합중국 항공우주국에 근무했던 기후과학자 제임스 한센(James Hansen)은 우리가 "묵시론적" 미래에 직면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런 암울한 견해는 앤더스 레버만(Anders Levermann), 폴 에를리히(Paul Ehrlich)와 앤 에를리히(Anne Ehrlich), 로니 톰슨(Lonnie Thompson), 그리고 다른 많은 사람들을 비롯한 전세계 연구자들이 지지한다.

 

이런 예언자들의 합창단은 급진적으로 변화된 지구 기후가 광범위한 격변을 일으킬 것―어쩌면이 아니라, 잠재적으로가 아니라, 불가피하게―이라고 예측한다. 우리는 돌아설 수 없는 지점을 통과해 버렸다. 정책 전문가, 기후과학자, 그리고 국가안보 관리들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문제는 더 이상 지구온난화가 현존하는지 또는 그것을 멈출 수도 있는지 여부가 아니라, 우리가 어떻게 그것을 다룰 것인가이다.

 

II.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새로운 시대를 가리키는 낱말이 있다. 인류세(Anthropocene)가 그것이다. 지질학자들이 받아들였고, 지식인들이 숙고했으며, <<이코노미스트>>와 <<뉴욕타임즈>> 같은 출판물들에서 논의되었던 이 술어는 우리가 지구의 지질 역사에서 새로운 시대―지질학적 힘으로서의 인간 종의 도래로 특징지워지는 시대―에 진입했다는 관념을 나타낸다. 노벨상을 수상한 화학자 폴 크루첸(Paul Crutzen)이 2002년에 그 술어를 고안했으며, 그리고 지구온난화에 의해 초래되는 변화가 세계의 기후와 생물 다양성뿐 아니라 지구의 지질 자체에 영향을 미칠 것―그리고 그저 몇 세기 동안이 아니라, 수 천년 동안―이라는 증거가 점점 더 쌓임에 따라 그 술어는 꾸준히 수용되게 되었다. 지구물리학자 데이비드 아처(David Archer)의 2009년 책 "장기 해빙: 인간들은 다음 100,000년의 지구 기후를 어떻게 변화시키고 있는가(The Long Thaw: How Humans are Changing the Next 100,000 Years of Earth's Climate)"는 대기 중 이산화탄소의 매우 큰 농도와 해빙이 이상 폭풍과 더 더운 여름을 넘어서, 그 어떤 예상 가능한 미래를 넘어서 지구를 어떻게 급진적으로 변화시킬 것인지에 대한 명료하고 간략한 논변을 펼친다.

 

런던 지질학회의 층서학 위원회―플리오세, 홍적세, 그리고 충적세 같은 지질학적 시대를 구획짓는 "황금못(golden spike)"을 규정하는 것을 책임지고 있는 과학자들―는 인류세를 더 고려할 가치가 있는 술어, "지구 역사의 규모에서 유의미한" 술어로 채택했다. 실무 집단들은 그것이 어느 수준의 지질학적 시간 규모[충적세와 같은 "세(epoch)", 또는 그저 "칼라브리아절" 같은 "절(age)"]일지, 그리고 어느 시점에 그것이 시작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지 논의하고 있다. 20세기 중반의 거대한 가속의 시작인가? 1800년 경의 산업혁명의 시작인가? 농경의 등장인가?

 

이라크에서 매일 임무 수행을 위해 출동할 때마다 나는 미래의 몸통을 내려다보며 텅 빈 암흑의 구멍을 보았다.

 

인류세가 제기하는 도전은 그저 국가 안보, 식량 시장과 에너지 시장, 또는 우리의 "생활 방식"에 대한 도전―이런 난제들도 모두 실재적이고, 심대하며, 그리고 피할 수 없을지라도―이 아니다. 인류세가 제기하는 가장 큰 도전은 인간이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우리의 감각에 대한 도전일 것이다. 100년 내―세 세대 또는 다섯 세대 내―에 우리는 오늘날보다도 평균 기온이 섭씨 4도 더 높고, 해수면이 최소한 1에서 3미터 더 높으며, 곡물 지대, 성장 계절, 그리고 인구 중심지들이 전세계적으로 변화하는 현실을 직면할 것이다. 지금 당장 온실 가스 방출을 전면적으로 중단하지 않는다면, 천 년 내에 인간들은 오늘날보다 해수면이 23미터 더 높았던 삼백만 년 전 플리오세 이래로 지구에 나타난 적이 없었던 기후 속에서 살고 있을 것이다. 우리는 세계 경제가 의존하는 농경, 해운, 그리고 에너지 연결망들의 임박한 붕괴, 이미 잘 진행되고 있는 생물권의 대규모 개체 격감, 그리고 인류 자체의 가능한 멸종에 직면하고 있다. 호모 사피엔스(또는 유전적으로 변형된 어떤 변종)가 다음 수천 년 동안 살아남는다면, 그것은 우리가 거주했던 세계와는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다른 세계 속에서의 생존일 것이다.

 

지질학적 시간 규모, 문명 붕괴, 그리고 멸종은 상세한 분석과 난해한 논쟁, 문헌적 주석을 애호하는 인문학자와 강단 철학자들이 다루기에는 두드러지게 부적절한 듯 보이는 심대한 문제들을 제기한다. 결국, 칸트에 관해 생각하는 것이 이산화탄소를 가두는 데 어떤 도움이 될 것인가? 객체지향 존재론과 역사적 유물론 사이의 논쟁들이 꿀벌의 집단붕괴 이상 현상을 방지할 수 있는가?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 중세 신학자들, 그리고 현대 형이상학자들이 해수면 상승으로 방글라데시가 범람하는 것을 막을 것인가?

 

물론 그렇지 않다. 그런데 인류세가 제기하는 가장 큰 문제들은 인문학적이고 철학적인 의문의 근원에 언제나 놓여 있던 바로 그것들―"인간이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리고 "산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이다. 인류세라는 시대에, 개체의 필멸성에 관한 의문―"죽음에 직면해 있을 때 내 삶은 무엇을 의미하는가?"―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규모로 나타나고 보편화된다. 100,000년 동안의 기후변화에 대해 인간 실존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멸종 또는 세계 문명의 붕괴에 직면해 있을 때 하나의 생명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의 불가피한 종말의 그림자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의미 있는 선택을 할 것인가?

 

이런 의문들은 그 어떤 논리적인 또는 경험적인 해답도 없다. 그것들은 탁월한 철학적 문제들이다. 키케로(Cicero), 몽테뉴(Montaigne), 칼 야스퍼스(Karl Jaspers), 그리고 뉴욕타임즈의 스톤 칼럼란의 사이먼 크리칠리(Simon Critchley)를 비롯한 많은 사상가들이 철학 공부를 하는 것은 죽는 법을 배우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것이 참이라면, 우리는 인류의 가장 철학적인 시대―이것이 바로 인류세의 문제이기 때문이다―에 진입했다. 문제는 이제 우리는 개체들로서가 아니라 하나의 문명으로서 죽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III.

죽는 법을 배우는 것은 쉽지 않다. 이라크에서, 처음에 나는 그 생각에 겁을 먹었다. 통계적으로 나는 꽤 안전했음에도 바그다드는 엄청나게 위험한 듯 보였다. 우리는 총격과 박격포 공격을 받았고 모든 고속도로에 급조 폭발물이 깔려 있었지만, 나는 잘 무장되어 있었고, 우리는 대규모의 의료진이 있었으며, 지금까지 세상에서 나타났던 가장 강력한 군대에 속했다. 내가 집에 돌아갈 확률은 높았다. 부상을 입을지도 모르지만, 살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매일 임무 수행을 위해 출동할 때마다 나는 미래의 몸통을 내려다보며 텅 빈 암흑의 구멍을 보았다.

 

"병사에게 죽음은 미래, 그의 직업이 자신에게 할당하는 미래다." 시몬느 베이유(Simone Weil)가 "일리아스 또는 힘의 시(The Iliad or the Poem of Force)"라는 전쟁에 관한 자신의 뛰어난 성찰에서 적었다. "그런데 인간이 미래에 대해 죽음을 지니고 있다는 생각은 자연에 상반되는 것이다. 일단 전쟁 경험이 매 순간 감금된 채로 누워 있는 죽음의 가능성을 볼 수 있게 만든다면, 우리의 사유는 하루도 죽음의 얼굴을 만나지 않은 채로 보낼 수 없다." 그것이 거울 속에서 내가 본 얼굴이었으며, 그것의 응시는 나를 거의 마비시켰다.

 

나는 "불가피한 죽음에 대한 명상은 매일 수행되어야 한다"라고 지시한 18세기 사무라이 지침서인 야마모토 츠네토모(山本常朝)의 "하가쿠레(葉隱)"을 통해 내가 나아갈 길을 찾았다. 나의 종말을 두려워하는 대신에 나는 그것을 소유했다. 매일 아침, 내 군용 차량을 정비한 후에 나는 급조 폭발물에 의해 폭파당하게 되는 장면, 저격병의 총을 맞게 되는 장면, 불에 타서 죽게 되는 장면, 탱크에 깔리게 되는 장면, 개들에 의해 찢기게 되는 장면, 체포되어 효수되는 장면, 그리고 이질에 쓰러지게 되는 장면을 상상했다. 그 다음에, 차량을 타고 문을 통과하기 전에 나는 내 자신에게 나는 이미 죽었기 때문에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곤 했다. 중요한 유일한 것은 내가 나머지 모든 사람들이 살아서 귀환하는 것을 확실히 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는 점이다. "매일 아침과 저녁에 마음의 준비를 함으로써 자신의 육체가 이미 죽은 것처럼 살아갈 수 있다"고 츠네토모는 적었다. "그는 도(道) 속에서 자유를 얻는다."

 

매일 아침 나의 불가피한 종말을 명상하면서 나는 이라크에서의 삶을 하루하루 헤쳐 나갔다. 내가 이라크를 떠나서 미합중국 본국으로 귀환했을 때, 나는 그 미래를 남겨 두고 왔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나는, 카트리나가 뉴올리언스를 강타한 후에 펼쳐진 혼돈 속에서 그것이 집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 다음에 나는, 샌디가 뉴욕과 뉴저지를 강타했을 때 그것을 다시 보았다. 정부기관들은 충분히 빨리 움직이지 못했고, 그래서 팀 루비콘(Team Rubicon) 같은 자원봉사자 집단들이 재난을 수습하기 위해 진입해야 했다.

 

그런데, 내가 우리 미래―인류세―를 들여다 볼 때, 나는 맨해튼 저지대를 휩쓸 정도로 수면이 상승하는 것을 본다. 나는 식량 폭동, 허리케인, 그리고 기후 피난민들을 본다. 나는 82 공수사단이 약탈자들에게 총격을 가하는 것을 본다. 나는 고장난 전력망, 파괴된 항구, 후쿠시마 쓰레기, 그리고 전염병들을 본다. 나는 바그다드를 본다. 나는 로커웨이즈(Rockaways)를 본다. 나는 이상한 불안정한 세계를 본다.

 

우리의 새로운 집.

 

인간의 정신은 자체의 종말에 관한 생각에 자연스럽게 반발한다. 마찬가지로, 문명들이 역사 전체를 통해 재난을 향해 맹목적으로 행진해온 까닭은 인간들이 내일도 오늘과 거의 비슷할 것이라고 믿도록 배선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런 생활 방식, 현재의 이 순간, 이런 사물들의 질서가 안정적이지 않고 영구적이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은 부자연스럽다. 오늘날 세계 전역에서, 석유를 태우고, 바다를 오염시키고, 다른 종들을 소멸시키고, 대기 중에 탄소를 뿜어내고, 우리의 새로운 디지털 상상계의 끊임없는 기계적인 트윗들을 위해 우리의 석탄 광산 카나리아들의 불길한 침묵을 무시하는 우리의 행위들이 우리는 영원히 이렇게 계속할 수 있다는 우리의 믿음을 증언한다. 그런데 필멸성의 현실이 영원에 대한 우리의 일상적 신념에 충격을 가하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전지구적 기후변화의 현실은 영원한 성장, 영구적인 혁신, 그리고 무한한 에너지에 대한 우리의 환상을 계속해서 침해할 것이다.

 

기후변화가 제기하는 가장 큰 문제는 미합중국 국방부가 자원 전쟁에 대한 계획을 어떻게 세워야 하는지, 또는 알파벳 시티를 보호하기 위해 바다 방벽을 어떻게 세워야 하는지, 또는 호보켄을 언제 소개시켜야 하는지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프리우스를 구입함으로써, 협약에 조인함으로써, 또는 공기조절장치의 작동을 멈춤으로써 다루어질 문제가 아니다. 우리가 직면해 있는 가장 큰 문제는 철학적 문제, 즉 이 문명이 이미 죽었다는 점을 이해하는 문제다. 우리가 이 문제를 더욱 더 빨리 대면할수록, 그리고 우리 스스로를 구하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는 점을 더욱 더 빨리 깨달을수록, 우리는 필멸한다는 겸손한 태도로 우리의 새로운 현실에 적응하는 고된 작업에 더욱 더 빨리 착수할 수 있다.

 

선택은 명료하다. 우리는 도래하는 새로운 재난에 대해 점점 덜 대비하면서, 그리고 우리가 지속할 수 없는 생활에 더욱 더 필사적으로 투자하면서 내일도 어제와 꼭 마찬가지일 것처럼 계속 행동할 수 있다. 아니면 우리는 하루하루를 이전에 온 것의 죽음으로 간주하게 될 수 있고, 그래서 현재가 제시하는 문제들이 무엇이든 간에 그것들을 아무 애착이나 두려움도 없이 자유롭게 다룰 수 있게 된다.

 

인류세에서 살아가는 것을 익히고 싶다면 우리는 죽는 법을 먼저 배워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