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제는 이렇다. 존재론은 무엇이 존재하는지, 존재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사물들이 어떻게 존재하는지, 그리고 어떤 유형들의 사물들―가능한 가장 폭넓은 견지에서―이 존재하는지에 관한 것이다. 최선의 경우에도, 존재론은 무엇이 존재해야 하는지에 관해서는 아무 주장도 제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존재론은 자체의 순수한 존재 상태에 있는 존재자들의 존재성에 관여하고 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정치는 사물들이 어떻게 존재해야 하는지를 평가하고 존재의 이런 선택과 배치를 만들어내기 위한 시도 전략과 기법들을 개발하는 기계다. [...] 우리의 존재론이 "만물은 불이다"라고 말한다면, 그 존재론은 우리가 어떤 종류들의 불을 조장해야 하는지에 관해서는 말할 것이 전혀 없다. 그것은 우리가 신자유주의 불 아니면 무정부주의 불을 선호해야 할지를 말해주는 것이 아니라, 이런 두 가지 존재 유형은 둘 다 불이라고 주장할 뿐이며, 그리고 불이 이런 배치들 가운데 이런 형태 아니면 저런 형태를 어떻게 취하게 되는지 설명할 뿐이다.

 

어떤 종류들의 존재와 조직이 바람직할 것인지 결정하기 위해서는 존재론이 아닌 다른 것이 필요하다. 화학이 어떤 종류들의 화합물들이 만들어져야 하는지 또는 존재하는 화합물들이 어떻게 사용되어야 하는지 말해주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존재의 존재성에 관한 지식은 단독으로 어떤 종류들의 사물들이 존재해야 하는지 말해주지 않는다. 화학은 우라늄이 존재한다는 사실과 그것이 그렇게 행동하는지는 말해주지만, 우리가 핵무기 제조, 원자력 발전소 건설 등을 실행하기 위해 이 물질을 사용해야 하는지 여부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 이것이 존재론과 관련된 상황이다. 또한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는 존재론적 주장을 비판하기 위해 정치적인 이유나 윤리적인 이유를 결코 내세우지 말아야 한다. 핵무기를 싫어하십니까? 좋습니다. 저도 싫어합니다. 그런데 핵무기가 도덕적으로 그르다는 내 믿음은 우라늄이 이런 조건에서 이런 방식으로 행동하는지 여부와는 아무 관계도 없다. 진화심리학을 싫어하십니까? 저도 역시 그것이 터무니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사회 정책의 층위에서 그것으로부터 당연히 도출되는 유해한 정치적 결과들을 지적하는 것은 그것이 참인지 여부와는 아무 관계도 없다. 진화심리학과 사회생물학의 허위를 폭로하고 싶다면, 그것의 정치적 결과들이 형편없다고 투덜거릴 것이 아니라, 인간들에 관한 그것의 서술에 오류가 있다거나 또는 그것이 방법론적으로 결함이 있다는 점을 보여주어야 한다. 다행스럽게도, 이것이 맞다는 점을 보여주는 증거가 충분히 존재한다. 나의 마르크스주의적 형제와 자매들이 정치적인 이유로 이런저런 과학을 공공연히 비난하는 것을 볼 때마다 나는 얼굴을 찡그리고 놀린다. 정말 또 다시 리센코주의(Lysenkoism)의 길을 가고 싶은가?

 

어떤 사람들은 존재론이 정치학을 가질 필요가 없다고 제안하는 것은 수치스럽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보인다. 아무튼 이것은 정치를 경시하거나 또는 훨씬 더 끔찍한 것―신자유주의는 존재한다!―을 시사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존재의 존재성을 탐구하는 철학 분야가 있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이 사회적 세계들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탐구하는 정치 이론이라고 불리는 또 하나의 철학 분야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 잉크의 화학은 문학의 문학성과 무관하다고 지적하는 문학 이론가 때문에 기분이 상하게 될 것이라고는 결코 꿈에도 생각지 못할 것이고, 그래서 무언가가 어떠해야 하는지 여부에 관한 문제는 그것이 어떤지 여부에 관한 문제와는 무관하다고 지적당하는 것과 관련하여 누군가가 왜 기분이 상하게 될지 특히 명료하지 않다... 아무튼 그 사람이, 무언가를 말하는 것이 그것이 필연적이며 달리 될 수 없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는 것이라는 잘못된 추론을 하고 있지 않다면 말이다. 신자유주의 같은 것이 존재한다고 말하는 존재론의 추문에 대해서, 신자유주의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활동가들과 정치 이론가들은 무엇에 관해 그렇게 작업했는지 나는 항상 의문에 빠진다. 신자유주의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아무 문제도 있지 않을 것인가? 그것이 존재한다는 것이 모든 문제가 아닌가?

 

이런 주장은 존재에 관한 이론들은 정치가 스며들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은가? 물론 그렇지 않다. 이론가들은 모든 종류들의 윤리적 및 정치적 신념들을 지니고 있고, 그래서 이것이 모든 종류들의 방식으로 그들의 작업에 스며들어 그것을 편향시킬 수 있다. 냉전으로 인해 암호화된 메시지들을 해독하기 위한 목적으로 수학 연구가 심화되었고 "더 우수한" 폭탄을 제조하기 위해 양자역학 연구가 심화되었던 것과 꼭 마찬가지로, 정치적 및 윤리적 관심사들이 존재론의 이런저런 영역에서의 연구를 고무시킬 수 있다. 그런데, 그런 정치적 동기 부여의 결과로서 수행된 수학이 참이라면, 그것은 정치와 무관하게 참이다. 소비에트 사회주의자도 어느 모로 보나 자본주의 미국인만큼이나 그런 수학을 사용할 수 있다. 대부분의 사회과학에서 그런 것처럼 본인의 윤리적 및 정치적 편견들 때문에 무의식적으로 데이터를 날조하게 되면, 그런 "발견 결과들"은 허위다. 훌륭한 비판은 탐구 중인 작업에서 이런 것들을 보여주고, 그래서 이런 그릇된 입장들을 내버리는 데 도움이 된다.

 

존재론 자체가 특수한 정치를 처방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왜 존재론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가? 더 우수한 핵폭탄을 만들어내려고 작정한 냉전 정치가들이 양자역학에 관심을 가졌던 것과 같은 이유로 존재론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진리 그리고 존재와 관련된 상황이 중요하다. 플루토늄이 무엇인지, 그것이 다양한 환경에서 어떻게 행동하는지, 조작할 때 그것이 제기하는 위험들, 그것을 목적지에 운반하는 방법, 발사 장치에 결합시킬 때 어떤 종류의 물질들을 사용해야 하는지 등에 관해 알지 못하고서는 매우 우수한 폭탄을 제조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사회적 문제들의 원천과 원인, 권력이 대단히 효과적으로 자체를 영속시키고 엔트로피적 쇠퇴를 견뎌 내는 방법 등을 이해하지 못하고서는 매우 효과적인 혁명을 수행할 수 없다. 장군이 지리, 날씨 조건, 도로와 하천의 배치, 공급선, 적군의 군수품, 통신 채널 등에 관해 생각할 필요가 있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 자칭 혁명가는 세계가 어떻게 조립되는지, 왜 그것은 시간과 지리에 걸쳐 그런 특수한 방식으로 유지되는지, 그리고 그런 조립체들에서 약점들은 어디에 있는지에 관해 생각할 필요가 있다. 이것들은 존재론과 관련된 문제들이다.

"

―― 레비 브라이언트(Levi Brya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