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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게 계몽주의는 데카르트적 합리성을 의미하지 않고, 반드시 역사의 한 특수한 시기도 의미하지 않으며, 오히려 존재하는 인간의 사회적 집합체들 내의 잠재적 경향 같은 것인데, [...] 그것은 모든 시기와 장소에서 크고 작은 강도 또는 밝기를 나타낸다.

 

그렇다면 이 경향과 강도의 본성은 무엇인가? 내 경우에 [...] 계몽(주의)은 내재성(immanence)과 동의성이다. 이 내재성은 세 가지 축을 따라 전개되고 불균등하게 발달할 수 있는데, 세 가지 축은 존재론적 축, 인식론적 축 그리고 정치적 축을 가리킨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내재성을 초월성(transcendence)과 대조해야 한다. 존재론적 신조로서의 초월성은 어떤 세계 또는 존재자가 그 밖의 모든 것들 위에 군림하면서 자체는 아무 영향도 받지 않은 채 여타의 모든 것들에 영향을 미치는 수직적 세계를 전제로 하는 신조라면 무엇이든 가리킨다. 초월성의 가장 명백한 사례는 플라톤의 형상들 또는 신에 관한 어떤 관념들 같은 것일 것인데, 여기서 형상들과 신은 모든 존재자 위에 군림하면서 자체는 아무 영향도 받지 않은 채 그것들에 형상과 구조를 부여하고 세계를 통제한다. 정치의 영역에서 초월성은 권위의 초월성, 주권자의 초월성, 아버지의 초월성, 지도자의 초월성인데, 여기서 법은 이 존재자로부터 절대적으로 제정되고, 이 존재자 자체는 법 위에 군림하며, 절대적 복종이 명령된다. [...] 여기서 우리는 슈미트(Schmitt)에 관해 생각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인식론적 초월성은 스콜라철학자들이 아리스토텔레스와 성서에 관해 이야기하는 방식의 경우처럼 계시, 특별한 신비로운 통찰, 또는 신성한 상징들의 권위에 근거를 두는 지식에 관한 테제라면 무엇이든 가리킨다.

 

반면에 내재성은 세계가 충분하다는 테제라고 나는 믿는다. 존재론적 층위에서 계몽주의 또는 내재성은, 초월적 신, 형상 또는 본질 형태의 "외부 세계", "보충 세계"란 전혀 존재하지 않으며, 오히려 존재자들이 서로 영향을 주고 받는 단일한 평탄한 존재 평면이 존재할 뿐이라는 점을 의미한다. 여기서 우리는 루크레티우스의 상호작용하는 원자들, 스피노자의 일원론 또는 다윈의 생태학에 관해 생각해야 한다. 이런 틀 내에서는 세계 위에 군림하는 존재론적 입법자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정치적 층위에서 계몽주의는 "공통의" 것이라는 엄밀한 의미에서의 코뮤니즘을 의미한다. 정치적으로 계몽주의는, 사회를 만드는 것은 인민들(그리고 비인간들!)이고, 어떤 타고난 우월성 덕분에 지배할 자격이 있는 그 어떤 초월적 입법자도 존재하지 않으며, 그리고 주권자들이 존재할 경우에도 이 주권자들의 권위는 사람들과 비인간들에서 비롯될 뿐이지 혈통, 신의 의지, 돈, 뛰어난 지성 또는 뛰어난 군사적 역량 같은 그들 존재의 그 어떤 고유한 특질에서도 비롯되지 않는다는 견해이다. 마지막으로 지식의 영역에서 계몽주의 또는 내재성은, 모든 사람이 논증 또는 예증할 자격을 갖추고 있고, 모든 사람이 논증과 예증에 참여할 수 있으며, 그리고 단지 누군가가 왕, 교구 신부, 존경받는 학자 등이라는 이유 때문에 그의 말이 옳다고 간주하지 않는다는 점을 의미한다. 여기서 계몽(주의)은 아인슈타인 같은 갑자기 출현한 젊은 무명의 신참자도 뉴턴 같은 거인에 이의를 제기할 수 있다는 점을 의미한다.

 

나는 데카르트적 (또는 흄적) 합리성이 성직자와 전제 군주들에 도전하는 것에 있어서, 그리고 사람들이 그저 명령을 따르기보다는 세계를 함께 알게 되고 사회를 함께 구성하는 코뮤니즘을 고무하는 데 도움을 주는 것에 있어서 꼭 필요했다고 믿고 있지만, 계몽주의를 이런 형태들의 합리성이라고는 간주하지 않는다. 계몽주의는, 인민들의 이익에 따르지 않는 방식으로 혈통, 결연 그리고 조약들에 의거하여 교황이 지배자들을 결정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민들이 이런 쟁점들을 결정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스피노자, 흄, 데카르트 또는 프로이트가 "정념" 또는 정동을 탐구하면서 세계가 아니라 우리에게서 비롯되는 것을 풀어나갈 때, 그들은 정동에 합리적으로 접근하여 인간을 괴롭히고 비참하게 만들며 대부분의 인간적 잔인함을 생성하는 슬픈 정념들로부터 인간을 자유롭게 하는 방법들을 찾아냄으로써 계몽(주의)의 이상을 실천하고 있다. 또한 나는 평등의 추구, 성별, 인종 그리고 종교에 무관한 만인의 참여 그리고 경제적 평등을 위한 투쟁이 계몽(주의)의 핵심에 놓여 있다고 여긴다. 거듭해서 이런 모든 투쟁은, 인간의 특성은 고유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드는 것이라는 테제와 내재성을 전제로 하고 있다. 나는 계몽이란 인류를 스스로의 잘못으로 빠진 미성숙 상태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것에 있다는 칸트의 의견에 동의한다. 그런 미성숙은 우리를 지배할 가부장에 대한 욕구와 세계에 대한 신화적 사유로 구성된다. 칸트에 맞서서 나는, 계몽은 전제 군주나 권위자들에게 도전하지 말아야 한다는 테제을 거부한다. 지금까지 계몽주의는 많은 비난을 받았는데, 환경 파괴, 전쟁, 인간의 잔혹성, 식민주의적 잔혹 행위, 자본주의적 불평등 등의 원인을 계몽주의의 탓으로 돌려왔다. 내 생각에, 이런 것들은 계몽(주의)의 결과가 아니라 충분히 계몽되지 않았기 때문에 일어났다. 사실상 우리가 이런 식으로 계몽(주의)을 비판하는 바로 그 사실이 계몽(주의)에 있어서 핵심적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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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비 브라이언트(Levi Brya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