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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세기의] 자본[Capital in the Twenty-First Century]"과 관련하여 정말로 새로운 것은 그 책이 보수주의적 신화들 가운데 가장 중요하게 지켜져 온 것, 즉 우리가 막대한 부를 벌어들이고 당연히 그럴 자격이 있는 능력주의 사회(meritocracy)에 살고 있다는 강력한 주장을 파괴하는 방식이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최상위 계층의 소득 급등을 정치적 쟁점으로 삼으려는 시도들에 대한 보수파의 반응은 두 가지 변호 노선을 포함했다. 우선 부자들이 그만큼 잘 지내고 있고 나머지 사람들은 그만큼 잘못 지내고 있다는 점을 부인하는데, 만약 부인이 실패하면, 최상위 계층의 소득 급등은 이루어진 공헌에 대한 정당한 보상이라고 주장한다. 그들을 1퍼센트 또는 부자라고 부르지 마라. 그들은 "일자리 창출자"로 불러라.

 

그런데 부자들이 소득 대부분을 그들이 수행하는 일이 아니라 소유하고 있는 자산에서 벌어들인다면 어떻게 그렇게 변호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막대한 부가 점점 더 사업이 아니라 유산에서 비롯된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토마] 피게티(Piketty)가 증명하는 것은 이것들이 근거 없는 문제들이 아니라는 점이다. 일차 세계대전 이전의 서양 사회는 실제로 세습 부자들의 과두정 체제의 지배를 받았는데, 이 책은 우리가 그 상태로 복귀하고 있다는 점을 설득력 있게 논증한다.

 

그래서 이런 진단이 부유세를 정당화하는 데 사용될지도 모른다고 두려워하고 있는 보수파는 무엇을 할 것인가? 보수파는 실질적인 방식으로 피케티를 반박하려고 노력할 수 있었지만, 지금까지 나는 그런 사건의 표식을 전혀 보지 못했다. 그 대신에 [...] 비방이 난무했을 뿐이다.

 

나는 이것이 틀림없이 놀라운 일이 아니라고 추측한다. 이십 년 이상 동안 나는 불평등을 둘러싼 논쟁들에 관여했는데, 여전히 보수적인 "전문가들"이 [...] 숫자들을 간신히 반박해내는 것을 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사실들은 근본적으로 그들 편이 거의 아닌 것처럼 보인다. 동시에, 자유시장 도그마의 그 어떤 측면이라도 의문시하는 사람이면 누구든지 그를 빨갱이라고 추궁하는 것이 [...] 여태까지 우파의 표준적인 작동 절차였다.

 

그래도, 보수주의자들이 피케티를 마르크스주의자라고 비난하는 것을 바라보는 것은 놀랄 만했다. 심지어 나머지 사람들보다 더 정교한 피도코키스(Pethokoukis)조차도 "자본"을 "연성 마르크스주의"의 저작이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부의 불평등에 관한 언급만으로 마르크스주의자가 될 때에만 이해될 수 있다. [...]

 

그런데, 미합중국의 과두 지배계급을 위한 호교론자들이 명백히 정합적인 논변을 제시하느라고 쩔쩔 매고 있다는 사실이 과두 지배계급이 정치적으로 패퇴하고 있다는 점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여전히 돈이면 다 된다[...]. 그럼에도, 관념들 역시 중요한데, 그것들은 우리가 사회에 관해 말하는 방식과 궁극적으로는 우리가 행하는 것을 결정한다. 그리고 피케티 패닉은 이제 우파가 아무 생각도 없다는 점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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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폴 크루그먼(Paul Krugm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