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사의 철학

The Philosophy of Big History

 

―― 샘 미키(Sam Mickey)

 

최근에 나는 국제거대사협회(International Big Histroy Association)의 학술회의에 참석했다. 그 협회는 "거대사"에 대한 연구 및 교육을 지향하는데, 거대사의 목표는 (협회 웹사이트에 적혀 있듯이) 구체적으로 "입수할 수 있는 최선의 경험적 증거와 학문적 방법들"을 사용하여 "우주, 지구, 생명 그리고 인류의 통합적 역사를 이해하"는 것이다. 그것은 역사의 마당을 우리 우주의 138억 년 전체 역사에 대한 포괄적이고 학제적인 설명에 개방한다.

 

물질, 생명 그리고 인류에 대한 통합적인 진화적 견해를 표명하고자 하는 목표에 관한 한 결코 거대사만 있는 것은 아니다. 다양한 학문 분야와 사유 학파들이 거대사의 통합적 목표를 공유한다(예를 들면, 우주 이야기, 종교와 생태 분야, 통합 이론, 에코페미니즘, 복잡성 이론, 탈인간주의적 인문학, 과정 철학). 거대사 학자들은 진화적 지식에 대한 이런저런 통합적이고 학제적인 원천들로부터 배워야 할 것이 여전히 많이 있다.

 

참석한 학술회의에서 분명했던 것은 거대사의 기본 범주들과 근본 가정들 가운데 철저히 해명되어야 할 것이 여전히 많이 존재한다는 점이었다. 이것은 참석자들 사이에 벌어진 논의에서뿐 아니라 거대사에 대한 주요한 기여자들의 강연들 가운데 일부에서도 명백했다. 특히 나는 거대사에서 "의미"의 역할이라는 문제와 관련된 패널에서 데이비드 크리스천(David Christian)과 신시아 브라운(Cynthia Brown)이 행한 강연들에 관해 생각하고 있다. 크리스천과 브라운 둘 다 자신이 철학자나 종교학자가 아니고, 그래서 그런 종류들의 탐구에 대한 관여는 시작일 뿐이라는 점을 인정했다. 거대사의 미래는 현재는 "아마추어적인"(브라운이 겸손하게 말했듯이) 그런 노력들의 후속적인 전개에 상당히 의존할 것이다. 인문학의 연구와 방법들을 통합하지 못하면 물질, 생명 그리고 인류에 대한 진정으로 통합적인 이해를 발달시키지 못할 것이고, 그래서 강단을 지배하는 분과학문적 저장고의 파편적 지식을 극복하지 못할 것이다.

 

계속해서 분명히 하거나 수정할 필요가 있는 문제점들 가운데 일부는 다음과 같다.

 

1.

종교에 대한 크리스천의 논의는 실제적인 종교적 전통들에 대한 지식을 거의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은 임시방편적 분석으로 구성되었다.  그는 거대사가 인간 공동체들에 대한 지도와 지침을 제공하는 기원 서사들의 표현을 종교와 공유하는 방식에 관해 언급했으며, 그리고 거대사가 138억 년에 이르는 우주의 역사 전체를 포괄하기 때문에 그런 지도 및 안내 체계들 가운데 가장 크다는 이점을 지니고 있다고 말했다. 그런데 거대사는 가장 큰 지도-안내 체계를 지니고 있지 않다. 그것은 정말 우리가 "거대한(big)"이라는 낱말을 말할 때 무엇을 의미하는지라는 의문을 제기한다. 가장 포괄적인 지식이라는 의미에서 "거대한"이라는 낱말이 제시된다면, 분명히 종교가 더 큰 지도-안내 체계를 지니고 있는데, 종교가 다양한 앎의 방식들(정서적, 미학적, 인지적, 언어적, 육체적, 대인적 그리고 도덕적 앎)을 더 성공적으로 통합하기 때문이다. 물리적으로 거대하다는 의미("거대한"이라는 낱말의 꽤 작은 의미)에서만 제시되더라도, 몇몇 종교들은 거대사보다도 여전히 더 크다. 예를 들면, 힌두교에서 시간의 척도(어느 정도는 자이나교와 불교 전통과 공유한다)는 마이크로초에서 수조 년까지 이르며, 그리고 그것은 우주의 탄생, 발달 그리고 파괴의 한 순환에 해당할 뿐이다. 그것들의 우주론은 순환적 우주라는 스토아적 관념[즉, 에크파이로틱 우주 이론(ekpyrotic universe theory)]과 비슷하다. 각 순환은 몇 백조 년 동안 지속된다. 그것은 거대사의 거대함의 정량적 연장성보다 훨씬 더 크다.

 

비슷하게도, 크리스천은 과학이 종교보다 더 상세하고 정확하다고 말했다. 또 다시, 상세함과 정확함에 대한 정의를 미리 상정하고 있지 않다면, 그것은 결코 참이 아니다. 정량적 상세함/정확함을 의미한다면, 크리스천은 옳다. 그런데 정성적 상세함/정확함을 의미한다면, 크리스천은 틀렸다. 물질, 생명 그리고 인류에 대한 정성적 동역학, 강도적 동역학 그리고 기호학적 동역학에 대해서는 종교가 거대사보다 훨씬 더 상세하고 정확한 설명을 제시한다.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단일한 "과학"과 단일한 "종교"를 물화함으로써 과학-종교 논쟁이 그릇된 이분법을 전제하고 있는지에 대한 의문은 제쳐두어야 할 것이다.

 

2.

크리스천은 의미를 지도와 안내로 규정하는데, 이 경우에는 우주 속에서 인간뿐 아니라 지도-안내 체계를 갖추고 있는 모든 것―크리스천의 경우에는 동물 또는 아마도 모든 생명체에게만 확장되는 듯 보인다―에 대해 의미가 존재한다. 그것은 의미에 대한 부정확하고 상세하지 않은 설명으로서 기호학, 의미론, 체험 그리고 행위주체성을 분석하는 철학적 방법들을 따르거나 심지어 동원하지 않은 것이다. 현상학, 해석학, 급진적 경험주의, 생물기호학, 과정 사상, 신유물론 그리고 페미니즘 이론 모두가 전적으로 간과되고 있다.

 

3.

크리스천은 윤리를 인간 공동체들의 산물이라고 간주하고, 그래서 다윈적 진화관을 전달하지 못한다. 다윈의 경우에, 윤리를 구성하는 사회적 "감정"(스미스와 흄을 통한)은 생명의 진화 전체에 걸쳐서 다양한 정도로 존재한다. 인간만이 도덕 또는 실천 윤리적 탐구를 행할지도 모르지만, 크리스천은 비인간 유기체들에서 나타나는 윤리의 맹아적 표현들을 최소한 인정해야 한다. 크리스천은 인지동물행동학, 생물기호학 그리고 스미스, 흄, 다윈 및 레오폴드를 거쳐 발달된 도덕적 감정의 윤리 이론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4.

크리스천은 흄을 간단히 언급했지만, 흄의 감정의 윤리학은 언급하지 않았다. 크리스천은 자연주의적 오류에 준거하여 사실-당위 문제를 논의했을 뿐이다. 거대사의 가치에 대한 해설에서는 자연주의적 오류와 관련된 문제가 있는 듯 보이지만, 진짜 문제는 다른 한 논리적 오류, 즉 선결 문제 요구의 허위(petitio principii, 이유 없이 전제를 세우고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크리스천은 비인간들에게는 행위주체성이 전혀 없다고 말했으며, 그의 추론은 기본적으로 이렇다. 행위주체성은 외부에서 찾아낼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나는 행위주체성을 찾아낼 수 없다. 크리스천은 정량적 외부성과 정성적 내부성(각각 로크의 일차 성질과 이차 성질) 사이의 이분법을 전제로 한다. 더 많은 의문점은 브라운에서 비롯되는데, 브라운은 본질적으로 무의미한 객체들의 집합체로서의 자연이라는 개념을 방법론적으로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전제로 하는 자연주의적 입장을 제시한다. 브라운은 자연주의(자연만이 실재적이고, 그래서 에너지/물질이 아닌 것이 존재할 수 있지만, 그것 역시 자연적인 것일 경우에만 존재한다는 입장)를 선호하여 물질주의(에너지/물질만이 실재적이라는 입장)이라는 관념을 거부한다. 브라운의 경험적, 방법론적 자연주의는 물질주의가 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우주 속 의미로 통하는 문을 개방할 것이지만(그녀는 분명히 신유물론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었다), 어떤 이유 때문에 그녀는 자연적 의미를 설명하는 유일한 방식은 인간이 그것을 생성한다고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초자연적이라고 생각한다. 도덕, 목적 그리고 인간성이 인간 속에 존재하지 않는다면, 브라운에게 그것들은 모두 초자연적인 것이며, 그녀는 인간에 대해서만 그것들의 존재를 상정할 수 있다. 브라운의 자연주의는 방법론적일 따름인데, 이것은 개체들이 자기 나름의 형이상학적 결론을 자유롭게 내릴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또 다른 문제를 낳는다.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

 

5.

브라운은 자신은 형이상학을 수행하지 않고 있다고 주장하는데, 이것은 대체로 실증주의적인 듯 들리지만, 브라운은 형이상학적 주장을 자제하려고 시도함으로써 그런 주장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점을 깨닫지 못했다. 브라운은 형이상학을 초자연주의로 오인하였다(공모를 다중의 사물들이 함께 호흡하는 사건으로 규정하는 것처럼, 형이상학이라는 낱말의 부분들을 규정하고 그것들을 더함으로써 형이상학을 규정하고자 하는 불행한 시도). 요약하면, 브라운은 학생들로 하여금 우주 속에 정량적 연장이 아닌 다른 무언가가 존재하는지 여부에 대한 나름의 결론을 내릴 수 있게 할 환원주의적 방법론을 옹호했다. 기본적으로, 그런 태도는 기계론적 자연에 대한 환원주의적 설명과 상대주의적 다문화주의를 확산시킨다.

 

6.

브라운은 환원주의라는 혐의에 맞서 스스로를 옹호하는데, 거대사는 복잡한 체계를 단순한 체계로 환원시키지 않으며, 복잡성을 자체적으로 다루어야 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인식하고 있다고 말한다. 거대사가 복잡한 가산적 집합들을 단순한 가산적 집합들로 환원시키지 않는다는 점은 좋은 일이지만, 그것은 환원주의의 작은 부분일 뿐이다. 브라운, 크리스천 그리고 다른 거대사 학자들이 신봉하고 있는 환원주의는 비인간의 의미와 행위주체성을 기계론적 자연 또는 인간의 투사 현상의 부대현상으로 환원시킨다.

 

7.

브라운은 거대사는 "우리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결합한다"고 말했다. 그 말은 멋지게 들리지만, 그것은 지식에 대한 환원주의적 규정을 전제로 하고 있으며, 알고 있는 "우리"의 배타성, 즉 이른바 초연한 관찰자들의 과학적 지식과 흔히 전적으로 다른 지식을 갖추고 있는 토착 공동체의 사람들 또는 억압받는 주변부 사람들을 배제하는 강단의 백인 "우리"를 인식하지 못한다. "우리"가 누구인지 그리고 우리가 무엇을 "알고 있는"지는 거대사 학자들이 이해하는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논란의 여지가 있다.

 

8.

끝으로, 문제는 그저 여러분의 역사가 얼마나 거대한지와 관련된 것이 아니다. 문제는 여러분이 그 역사를 사용하는 방식, 지식이 생산되고 분배되는 방식이다. 중요한 것은 결코 여러분의 역사의 크기가 아니라 여러분이 그 역사와 맺는 관계이다...배의 크기가 아니라 바다의 움직임이다. 그것은 결코 농담이 아니다. 경제 성장, (신)식민주의 그리고 진보에 대한 강박의 결과로부터 엄청난 고통을 겪고 있는 문명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거대해지는 것에 우선적으로 관심을 갖는 역사에 대한 접근법을 택하기 전에 큰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