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시니즘

Machinism

 

―― 레비 브라이언트(Levi Bryant)

 

<<존재지도학(Onto-Cartography)>>에서 나는 기계지향 존재론(machine-oriented ontology)를 제시한다. "기계"는 "존재자", "사물", "객체" 또는 "세계"에 대한 동의어이다. 기계지향 존재론―또는 더 간단히 "머시니즘(machinism)"―은 세계의 모든 것이 기계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테제이다. <<객체들의 민주주의(The Democracy of Objects)>>의 제1장에서 나는 이 테제를 옹호하는 논변을 전개하는데, 그곳에서는 "객체"라는 술어를 사용하지만 말이다. 명백히 여기서 "기계"라는 술어는 일상 언어에서 사용되는 것보다 꽤 더 넓은 의미에서 사용된다. 자연 언어에서는 기계를 무엇보다도 인간들에 의해 제작되는 것으로 여긴다. 그런 견해는 암묵적으로 세 가지 넓은 존재자들의 범주―나무와 항성 같은 자연적 존재자, 포크와 얼음 송곳 같은 연장 그리고 기계―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기계와 연장 둘 다 인간(그리고 다른 유사한 존재자들)을 자체의 존재 조건으로 갖는 한에 있어서 기계와 연장을 구분짓는 것은 무엇인지 물을 수 있다. 그런데 내가 세계의 모든 것이 기계들로 이루어져 있다고 주장한다면, 내가 자연 언어에서 일어나는 대로의 이 술어의 용법을 왜곡한 것이 분명하다. 명백히 항성, 행성, 완보동물 그리고 나무는 인간들에 의해 만들어지지 않는다(농경은 차를 설계하고 제작하는 것과는 다른 유형의 경작이라는 점을 인정하면). 그리고 명백히, 나무는 배합기, 컴퓨터 그리고 차고 문 개폐기와는 매우 다른 유형의 존재자이다. 기계 존재론은 이런 차이점들에 매우 민감하고, 그것들이 무엇인지 분명히 표현하며, 존재하는 상이한 기계 유형들과 그것들을 구분짓는 특징들에 관한 기계학(machinology)(동물학과 유사한)을 전개해야 할 것이다. 파충류가 포유류와는 상이한 유형의 동물이지만 그럼에도 둘 다 동물인 것과 꼭 마찬가지로, 자동차, 망치, 항성, 건물 그리고 나비도 모두 다른 유형들의 기계이고 상이한 속에 속하지만 그럼에도 기계이다.

 

"존재자"를 가리키는 것으로서의 "기계"라는 술어의 선택은 확실히 수사학적 선택이다. 중요한 것은 기표의 배후에 놓여 있는 개념이지 그 개념을 지시하도록 선택된 기표가 아니다. 그 술어가 호소력이 없다면, 여러분은 기꺼이 다른 술어들을 선택할 수 있다. 술어 선택을 둘러싼 논쟁만큼 짜증나고 가치가 없으며 피상적인 논쟁은 거의 없다. 그렇다면, 아마도 생기론자와 러다이트들을 자극하는 것 외에, 존재자를 기계라고 지칭하는 것의 수사학적 이익은 도대체 무엇인가? 내가 "사물", "존재자", "객체", "사건", 또는 "과정"보다 "기계"라는 술어를 선택했다면, 이것은 내가 "기계"가 우리로 하여금 사물들이 어떻게 조작하고 그것들이 무엇을 행하는지에 대해 주목하게 하는 일을 가장 잘 하기 때문이다. 내 생각에 여전히 "기계"라는 술어만큼 잘 하지는 못하지만, "과정"이 근사적인 술어이다. 머시니즘은 본질적으로 존재에 관한 조작적 관점이다. 그것은 사물들이 무엇인지 묻는 것이 아니라, 사물들이 무엇을 행하는지 묻는다. 이런 점에서, 머시니즘은 현상학이 하나의 분석 틀인 방식과 흡사한 하나의 분석 틀이다. 그것은 특수한 방식으로 존재자들을 분석하도록 고안된 개념들의 틀이다.

 

머시니즘은 "실체주의적" 접근법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과 대조함으로써 가장 잘 이해될 수 있다. 실체주의적 접근법은 어떤 사물이 무엇인지 묻는다. 여기 내 앞에 형광펜이 하나 있다. 실체주의자는 "형광펜은 무엇인가?"라고 묻는다. 이어서 그는 그 형광펜을 묘사한다. "그것은 길고 원통형이다. 그것은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졌다. 그것은 몸통과 두껑을 따라 청색을 띠고, 'Expo'라는 낱말이 새겨져 있다. 그것은 펠트펜이다. 그것은 글쓰기에 사용된다. 기타 등등." 실체주의자는 이렇게 물을 것이다. "무엇이 형광펜의 본질―만약 존재한다면―을 구성하는가?" 본질이라는 개념은 평판이 나쁘지만, 본질을 조사할 때 정말로 모든 사람이 묻고 있는 것은 "어떤 특징들의 집합이 그 존재자가 어떤 종류의 구성원이라는 것을 결정하는가?"이다. 또는 다른 식으로, "무엇이 이런 유형의 존재자를 다른 모든 유형의 존재자들과 구별짓는가?"라고 묻는다. 예를 들면, "무엇이 형광펜을 연필이나 펜이 아니라 형광펜으로 만드는가?" 이런 질문이 왜 그렇게 반대할 만한지 이해하기 어렵다. 반대할 만한 것은 본질의 잘못된 속성들, 또는 어떤 유형의 사물이 실제로는 그 본질을 갖추고 있지 않을 때 어떤 본질을 갖추고 있다는 주장인데, 예를 들면, 특수한 나라의 시민이라는 것 이외에 "미합중국인"에게 어떤 본질이 존재한다("미합중국인들은...같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실체주의적 분석―이것이 전적으로 적절한 환경이  존재한다―을 무시하지 않은 채 머시니즘은 다른 질문을 제기한다. "그것은 무엇인가?"라고 묻는 대신에 머시니즘은 "그것은 무엇을 행하는가?"라고 묻는다. 그런데 이 질문은 이미 실체주의 아래 포섭되어 있다고 주장할지도 모른다. 결국, 형광펜을 분석할 때, 형광펜은 글쓰기에 사용된다고 말했다. 그렇지만, 글쓰기는 인간과 다른 유인원들이 형광펜으로 행하는 것이지 형광펜이 행하는 것은 아니다. 머시니즘적 정향은 형광펜이 무엇을 행하는지, 형광펜이 다른 사물들에 어떻게 작용하고 조작하는지 묻는다. 예를 들면, 글쓰기 도구들이 우리에게 어떻게 작용하는지 물을 수 있다. 수십 년 동안 글쓰기 도구들을 사용함으로써 사용자 손의 뼈와 근육 구조가 바뀌게 되는가? 글을 쓰는 사람의 손은 글을 쓰지 않는 사람의 손과 다른가? 글쓰기 도구들은 우리의 신경학적 구조를 바꾸는가?

 

글쓰기 도구들은 가장 흥미로운 예가 아닐 것이다(나는 그것들이 꽤 흥미롭다고 생각하지만). 글쓰기 체계는 어떠한가? 글쓰기 체계는 어떤 종류의 기계인가? 영어 같은 알파벳 체계들이 존재한다. 마야인들과 이집트인들이 사용한 것들과 같은 상형 문자들이 존재한다. 중국어 같은 글쓰기 체계들이 존재한다. 이 모든 것들은 상이한 유형들의 기계들이다. 이런 체계들은 우리에게 어떻게 작동하는가? 그것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방식과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에 영향을 미치는가? 매클루언은 알파벳 글쓰기 체계가 유클리드적 공간 모형과 뉴턴적 공간 모형을 생성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글쓰기 형식이 우리에게 작용하는 방식 때문에 알파벳 체계의 필자는 유클리드적이고 뉴턴적인 견지에서 공간을 생각하게 된다고 그는 주장한다. 이것은 참인가? 가장 유명한 사례들은 수학에서 비롯된다. 어떤 것들은 로마 수 체계 내에서는 생각할 수 없다. 로마 수 체계라는 기계는 자체의 숫자들이 작동하는 방식 떄문에 나눗셈, 곱셈, 대수, 미적분 등을 전혀 불가능하게 만드는 듯 보인다.

 

도처에서 의문은 사물들이 어떻게 조작하는가, 그것들이 무엇을 행하는가이다. 나무를 하나의 기계로서 생각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 것인가? 그것이 무엇이고 무엇이 그것을 모든 다른 유형들의 식물과 동물과 구별짓는지 묻는 대신에, 우리는 나무가 무엇을 행하는지, 나무가 어떻게 조작하는지, 나무가 무엇에 작용하는지 등을 탐구할 것이다. 우리는 나무를 물, 토양 양분, 이산화탄소와 가스의 흐름들을 세포, 열매, 산소로 변환하는 기계, 그리고 토양과 대기의 바로 그 특성을 변형하는 기계로 간주할 것이다. 나무는 자체 조작을 통해서 스스로(자체 세포들과 세포들이 배치되는 방식)를 만들어내며, 그리고 또한 뿌리가 땅을 뚫고 뻗어가는 방식과 낙엽이 분해될 때 땅을 화학적으로 변형하는 방식을 통해서 주변 토양을 변형한다. 나무는 다른 것들(토양 양분, 물, 햇빛, 이산화탄소 등)을 상이한 것으로 변환한다. 나무의 작용을 통해서 다른 새로운 유형들이 기계들이 생성된다.

 

머시니즘적 분석은 학교와 대학 같은 제도들이 나무 같은 기계들과 대단히 유사하다는 것을 드러낸다. 어떤 제도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의 임무가 무엇인지 묻는 대신에 그것이 무엇을 행하는지, 그것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그것이 무엇에 작용하는지 등을 묻는다면, 우리는 매우 상이한 일련의 대답들을 얻게 된다. 물, 빛, 이산화탄소와 액체 양분의 흐름들에 작용하는 나무처럼 교육 제도는 인간들의 흐름에 작용한다. 그런 흐름들―그것들 자체가 기계들이다―을 상이한 유형들의 세포, 산소, 토양 등과 같은 다른 기계들로 변환하는 나무처럼 교육 제도는 특수한 유형들의 인간 기계를 만들어낸다. <<감시와 처벌>>에서 푸코가 주장하듯이, 정동적으로, 생물학적으로, 그리고 인지적으로, 어떤 교육 기계를 거치는 신체는 그 교육 기계를 거치지 않는 신체와 상이하다. 그것은 상이한 유형들의 성향을 갖춘 다른 것이 되어버렸다. 그런 기계를 평가할 때, 우리는 이 기계는 어떤 종류들의 육체-정신을 만들어내고 있는지 그리고 이것의 결과는 무엇인지 자문해야 한다. 확실히 상이한 교육 기계들이 존재한다. 그것들은 모두 "교육"(그리고 교육에 대한 개념들 자체가 기계들이다)에 복무하고 있다고 주장하지만, 어떤 특수한 교육 기계와 관련하여 걸려 있는 것은 정말 무엇인가라는 의문이 중요한 문제이다. 예를 들면, 철학의 역사와 텍스트 분석에 대단히 집중된 대륙철학 박사학위 프로그램을 살펴볼 때, 우리는 이런 교육 이론은 어떤 종류의 기계인지, 그것은 무엇을 만들어내고 있는지, 그리고 그것은 어떤 종류의 육체-정신을 구성하고 있는지 물을 수 있다.

 

도처에서 의문은 "그것은 무엇을 만들어내고 있는가?". "그것의 조작들은 무엇인가?". "그것은 무엇에 작용하고 있는가?", 그리고 "그것의 산출물은 무엇인가?"이다. 소설 또는 그림 또는 사진 또는 건물 또는 강 또는 별은 어떤 종류의 기계인가? 식단 또는 특수한 이론 또는 사유 학파 또는 규범 또는 특수한 개념은 어떤 종류의 기계인가? 이것들은 모두 무엇을 행하는가? 그것들은 어떤 흐름들에 작용하는가? 그것들은 자체의 작용 대상을 어떻게 변형하는가? 그런 것이 머시니즘의 분석적 틀이다.